“너희들, 눈치 게임이라고 아니?”
“눈치 게임?”
“1!”
알려주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1을 외쳤다. 녀석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그나마 그 중의 눈치가 빨랐던 로니가 벌떡 일어나
“2?”
2를 외쳤다.
“자, 시니어. 마셔.”
“???”
그렇게 시니어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자, 그럼 이젠 공동묘지 게임이야.”
“고, 공동묘지?!”
“응. 나, 시니어, 로니. 이 순서대로 갈 거야. 내가 하는 말을 다음 순서의 사람이 더 크게 따라하면 돼. 더 커야 돼.”
이번에는 인자하게 설명도 해주었다.
“아, 공동묘지에, 아, 올라갔더니, 아, 시체가 벌떡, 시체가 벌떡. 벌떡, 벌떡.”
시니어와 로니는 눈을 꿈벅였다.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고 여긴 시니어가 재빨리 헤르미안을 따라했다.
“아--! 벌떡!”
헤르미안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술 자리에서도 이정도로 큰 적이 없었는데.
“아---! 벌떡!”
시니어도 괜히 최연소 기사단장이 아니었다. 우렁찬 목소리로 헤르미안의 뒤를 이었다.
“아— 벌떠,억, 쿨럭, 쿨럭….”
로니가 온 힘을 다해 따라해 보았지만, 그의 여린 성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마셔라, 로니.”
얄밉게도 시니어가 석 잔을 따라 로니에게 쥐어주었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신 로니는 오기를 품었다.
“이번에는 딸기 게임이라고 아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풍경이 많이 변해 있었다.
*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린 음식들. 흐트러진 테이블보. 무슨 게임을 한 건지 테이블 근처에 흐트러진 동전 하나.
탁.
데구르르.
다 마신 포도주 병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
“음냐… 더는 못 마셔….”
사실 술 게임에서 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넉다운 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니는 이미 탁자에 머리를 박은 상태였고 시니어는 눈만 감은 상태 고대로 잠들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그래도 여기가 블러드 필드 되기 전에 탈출해야 하지 않겠니?’
자는 녀석들에게 굴러다니던 담요 한 장을 둘러준 뒤 살금살금 밖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헤르미안?”
젠장. 언제 일을 다 본 건지 반스타인이 벌써 돌아왔다.
“어딜 가는 거지?”
“그러니까… 밤 산책이죠?”
“이 늦은 시간에?”
“달빛이 좋아서요.”
다분히 문학소녀 같은 발언이었으나 반스타인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도 그래. 그럼 같이 갈까?”
그러나 자꾸만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니요, 산책은 혼자 가는 게 좋답니다.”
“그건 절대 안돼.”
“왜죠? 제 기억이 아직 불완전해서 그런가요?”
“아. 그것도 있었군.”
황태자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호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혼자서는 절대 안 돼. 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안 돼. 갈 거면 나와 같이 가지.”
녀석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고집불통 같으니. 지가 뭔데 날 관리해.”
“뭐라고 했지?”
“혼자는 적적했는데 잘되었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반스타인의 옆에서 때아닌 사회생활을 하는 기분에 젖어들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고, 곳곳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까는 그냥 했던 말이기는 했지만 정말 달빛도 예뻤다.
“날이 좋죠?”
“그렇군.”
“와. 여긴 정말 밤에 아무도 안 돌아다니네요.”
“그렇지.”
“한국이라면 이미 음주가무 피크타임이었을 텐데.”
순간 나도 모르게 한국이었을 때의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당황하여 반스타인을 쳐다보자, 그는 전혀 못 들은 듯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평소보다 조용한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와, 못 들었네. 다행이다.’
물론 그가 들었어도 무슨 소린지는 몰랐겠지만.
‘근데 평소보다 조용하다고?’
반스타인의 말을 기점으로 주변의 풍경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따금씩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설마 블러드 필드가 되려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살풋 들었으나.
‘아직 블러드 필드가 활성화 될 징조는 보이지 않는데.’
게임, <블러드 필드에서 탈출하는 방법>에서 평화롭던 에니타스가 블러드 필드로 변할 때는 여러 가지 전조 증상이 나타난다.
첫째, 노랗게 뜬 달이 붉은색으로 변한다.
둘째, 플레이어에게(에니타스 안의 사람들) 상황을 설명하고 생존에 필요한 듀토리얼 및 방법을 알려주는 ‘메신저’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셋째, 괴 생명체인 ‘크리처’들이 나타난다.
‘아직은 셋 중에 어느 것도 나타나질 않았어.’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지금 펜던트를 찾는 게 좋은 방법일까? 그냥 한 시라도 빨리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점점 광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할 때였다.
“블러드 필드에서 살아남았다고 했지.”
반스타인이 블러드 필드를 언급했다.
‘아, 그러고 보니… 헤르미안 설정이 블러드 필드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랬지?’
“혼자 살아남은 건, 지난 기억을 전부 지워버릴 만큼 지옥 같은 일이었을 테고.”
그 순간 그의 손길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반스타인이 가진 강렬한 향이 훅 밀려들어와 잠시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이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굳은 다짐이라도 하듯, 그의 목소리에서는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감정이 들어간 듯 했다.
‘게임에서는 그렇게 공략하기 힘든 놈이었는데.’
생존하랴, 저 까칠 철벽 자식 호감도 작하랴. 너무 공략하기 힘들었던지라 기획자인 나조차도 치트키를 쓰지 않고서는 애 먹었었다.
‘공략하기 힘든 다이아몬드 철벽 남주인 반스타인. 녀석이 내게는 유독 호감을 품은 듯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헤르미안의 버프가 있는 건지 싶었지만. 녀석의 과거를 생각해보니 조금은 납득이 되기도 했다.
타국에서 자라난 반스타인은 애초에 에니타스 황실의 자손이라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뒤늦게 이곳에 온 뒤로 수많은 형제 자매들과 서열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1위가 되었으니… 그만큼 블러드 필드에서 생존 싸움을 벌였다는 헤르미안을 외면할 수는 없었겠지.’
이제야 호감도 작업을 따로 하지 않아도 그가 호감을 가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같은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끼리의 동정심?이라고 보는 게 맞다.
“감사합니다, 태자 전…,”
“쉿.”
감사 인사를 표시한 뒤 물러나려 할 때였다. 순간 반스타인이 내 입술을 가로막더니 주위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바스락, 바스락.
내게는 낙엽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여기 있도록.”
반스타인은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소리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꽤나 심각한 일이었던 모양인지, 굳은 얼굴로 이동하는 반스타인.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어느 정도 사라졌다 싶던 그때.
‘드디어 찾아온 기회다!’
나 역시 발걸음을 광장쪽으로 옮겼다. 내게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퀘스트가 있었다.
‘일단 펜던트를 찾자.’
펜던트를 통해 헤르미안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에니타스에 대한 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는 문이라든지 다른 탈출 방법이라든지, 하다못해 이동하는 짐마차에 몰래 올라타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여기를 뜨는 거야.’
그 순간 반스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절한 로니와 시니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여길 탈출하면, 남은 사람들은?」
나 혼자 그 끔찍한 블러드 필드를 탈출할 수 있다고 한들, 그 녀석들은 여기 남아 최후의 1인이 될 때까지 치열한 생존게임을 펼쳐야만 한다.
「나 혼자만 나가는 게 옳은 걸까?」
녀석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게 최선의 선택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진행 되었을 운명이야. 더구나 이 친구들은 게임 속 캐릭터잖아. 내가 무슨 액션을 취하건 말건, 게임 속의 운명은 바뀌지 않아.'
비겁한 변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일이야. 그냥 빨리 탈출부터 하자. 탈출부터 한 뒤에 도망치라고 편지를 보내든가. 블러드 필드가 이미 활성화 된 뒤라면, 그 거지같은 생존게임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던가.
일단은 내가 안전한 뒤에야 남의 안전을 생각할 머리가 굴러갈 수 있는 법이다.
‘펜던트, 펜던트가 어디 있지?’
보랏빛 장미 모양의 펜던트.
광장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고, 결국 광장까지 도착했다. 광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통행이 없었다.
‘아마 이쯤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아그니스의 발등에 부딪혔던 장소를 샅샅이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꽤 떨어진 골목에서 보라색 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와, 세상에. 저기까지 간 거야?”
아무래도 마차에 채이고 채이다 보니 저기까지 밀려난 듯 싶었다.
서둘러 뒷골목으로 향했다. 쓰레기 하나 없던 광장과는 달리 뒷골목으로 향하는 길목은 쓰레기 천지였다. 역겨운 냄새에 코를 막으며 보랏빛이 도는 물건을 들었다.
그러나,
“자수정 반지…?”
그건 펜던트가 아닌, 알이 굉장히 큰 자수정 반지였다. 검은 빛이 도는 자수정은 왠지 모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 순간, 자수정 반지 위로 게임 속 화면처럼 아이템 설명창이 떠올랐다.
<절망한 여인의 자수정 반지>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거 완전 대박 아이템이잖아?!’
나도 모르게 반지를 꼭 품에 안았다. 이것만 있으면 활성화 된 블러드 필드 안에 있다고 해도 걱정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근데 이게 왜 여기 있지? 분명 중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는데?'
일부러 성질 더럽고 강력한 힘을 가진 악역에게 부여해서 공포를 극대화 시키기로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 그 악역이 누구였더라?'
떠올려보려 했으나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일단 주위에 단서가 있나 싶어 반지가 있던 자리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
길게 죽 늘어진 붉은 선.
그 자리에는 어딘가로 이어진 붉은 선 같은 것이 있었다. 붓으로 칠한 듯한 그 선의 끝을 아무 생각 없이 눈으로 쫓았다.
어둠이 내리깔린 담벼락. 붉은 선이 가리키는 곳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무거운 것을 끄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퍼어어억!!’
둔탁한 무언가를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순간 그 위험한 애가 누구였는지 떠올랐다.
‘셀레나 사제. 셀레나 거였어, 이거.’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뼈가 꺾이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밝은 달빛이 내려앉아 어둠을 밝혔고 가려졌던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왜. 낫질 않지.”
그곳에 성수병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체의 얼굴을 가격하는, 목이 백팔십도 꺾여버린 셀레나 사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