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습관처럼 아니, 지금까지 딱 3번,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혼자 여행을 찌질이처럼 해왔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장기 휴가를 매년 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의 비겁하고 못난 행동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태는 이런 내게 늘 말했었다. ‘이기적일 만큼 멍청한 놈’, ‘멍청할 정도로 이기적인 놈’이라고. 여섯 달 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떠나면서 내게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이고 멍청한 놈이었는지 고해(?)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난 그의 사과를 무시했지만.
곽 사장님처럼, 그리움 따윈 떨쳐 버리려 애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만났던 그가 더 이상 그곳엔 없었지만 바쁜 하루를 보내는 덕에 잠시 잊을 수는 있었다. ‘버닝 러브’에도 발길을 끊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사흘 전, 분당의 한 주택지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한 번에 열여섯 채의 주택을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 작업을 해야 했기에 양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역시 잘 시간, 먹을 시간까지 투자해 가며 정신을 쏟았지만 꼼꼼히 포맷되어 있지 못한 내 정신 상태에 빈틈이 없을 리 만무했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 작은 틈들로 스며들었던 그리움이, 정신을 놓아 버리자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날 쓰러뜨렸다. 맘 놓고 그리워 할 자격조차 없는 내게 그는 형체 없이도 나를 또 찾아왔다.
‘망할....... 날 구속했다가 자유롭게 했다가, 무엇이 맞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너. 넌 날 아직 깨닫게 하지 못한 거야. 알게 해 줘. 난, 구속되든 자유로워지든, 어느 쪽이든 선택하고 싶어. 무엇이 좋은 건지 깨우치고 싶어.......’
나만의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온전히 혼자인 것이 처음은 아닐 텐데 혼자서 자신의 일상을 보내는 일이 이렇게 지겨운 일이었던가.
낮이 짧아져 출근 시간을 조금 늦추었다. 당분간 출장이 있거나 큰 시공 계획도 없었다. 평소 집을 나서던 시각에 기상을 했고 편의점에 잠시 들러 우유와 샌드위치를 사고 나면 아홉시까지 출근이 가능했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우유는 이미 냉장고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난 그 중 하나를 집어 오늘 날짜를 확인한 후 계산했다. 그곳을 나와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아직 새벽안개가 다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파라솔 테이블과 의자에도 안개가 내려앉아 있어서 티슈로 닦고 앉아야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한 가을 아침의 출근길, 차들과 사람들로 거리는 부산했지만 회갈색으로 변해버린 가로수 잎들이 그나마 땅에 떨어져 쌓이고 가지엔 반도 안 남은 상태였다. 사람들의 옷 색깔도 그 낙엽들과 비슷했거나 그 위에 내린 안개와 비슷했다. 입체감도 색채도, 어떠한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 배경 속에 나는 있었다.
난 우유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서 온몸이 부들거렸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찬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왠지 배가 아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