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짜 뭐?”
“…진짜 못말려요. 완전 막무가내야.”
브리택이 싱긋 웃었다. 달리아는 그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들판에 바람이 불고, 잔디와 그녀의 머리칼이 같이 휘날렸다.
“이제 안 놓칠거야.”
“…그래요.”
그가 다시 자신을 와락 껴안았다. 달리아는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곤, 저릿해지는 가슴 깊은 안쪽을 느꼈다. 그는 분명 자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고, 자신도…자신도 그랬다.
기억에는 없었지만, 마음의 비어버린 곳을 한 번 알게 된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 사실이 없을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브리택, 이제 묘지를 돌아봐야 할 시간이에요.”
“그래….”
브리택은 순식간에 다시 커다란 늑대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달리아를 지키기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옆에 내려둔 은촛대지팡이를 다시 잡아들었다. 그 끝의 영원히 녹지 않는 밀랍초에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실 이제 촛불이라고 말하기도 뭐했다.
달리아의 옆에 그가 있을 때면 그 불꽃은 마치 횃불처럼 타올랐다. 이전의 샛노란 촛불일 때보다 더 먼 곳까지 더 환하고 따뜻하게 밝혔다.
“갈까요?”
브리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달리아의 옆에 섰다. 그리고 달리아의 작은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갔다. 이윽고 길고 높고 날카로운 묘지의 담장이 나타났다.
달리아는 망토의 품 속에서 반쯤 녹슬어가는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요, 브리택.”
문을 활짝 열고, 그가 다 들어가자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그리고 열쇠를 품 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겼다. 묘비들 사이로 검은 것들이 불쑥거리다가, 그녀가 들고 있는 새하얀 불빛에 가만히 사그라들었다.
“다들 평온함을 되찾고 있는 것 같네요.”
사실 오늘 밤의 순찰이 조금 힘들 것임을 달리아는 직감하고 있었다. 묘지에 있었던 영혼 중 하나가 뛰쳐나가선, 묘지를 돌보는 묘지기와 의무의 동반자 서약을 맺고 돌아왔으니….
묘지의 영혼들도 서로 대화하며 소통한다. 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사회관계가 있다는 것은 묘지기로서 일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이었다. 아마 오늘밤은 가장 왁자한 밤이 될 것이었다.
“질투라도 해 보라지. 모가지를 물어뜯어서 두 번 죽게 만들어 줄….”
“…브리택.”
브리택이 달리아를 올려다보았고, 그녀의 가늘어진 눈과 마주했다. 그제서야 그는 내밀었던 송곳니를 집어넣곤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묘지기는 묘지의 영혼들을 박살내는 게 아니라, 달래주는거에요.”
“…그래.”
유난히 커다란 묘비의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온 것은 그 때쯤이었다. 아주머니라고 하기에는 흰머리가 너무 많았다. 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코펠티아 할머니, 오늘도 좋은 밤이네요.”
“오오, 그래, 손녀딸. 우리 손녀딸도 잘 지냈어?”
반쯤 쉰 목소리였다. 브리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기억 속 달리아에게는 저런 할머니가 없었다.
“그럼요, 할머니, 할머니 딸 코델리아에요. 오늘도 푹 주무실거죠? 저랑 약속하신 거에요?”
달리아는 쪼르르 달려가선 그 할머니의 영혼을 와락 안아주었다.
“그럼, 그럼. 우리 손녀딸이 부탁하는데, 그럼! 이 할미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으니까 걱정말렴. 알았지?”
“알았어요, 할머니. 할머니 최고에요.”
새치가 가득한 할머니의 영혼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브리택의 눈동자는 놀람에 동그래져있었고, 코펠티아의 영혼은 다시 묘지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다시 나오지 않았다.
“방금 그건….”
“아, 코펠티아 할머니요. 저를 자꾸…자신보다 먼저 떠난 손녀딸로 착각하시더라고요. 임종하시기 전에는 치매셨다고 해요. 여기 묻힌 지는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인지….”
그제서야 브리택은 영혼을 달래는 묘지기의 의무가 무엇인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손녀딸인 척 해줬던 거야?”
“쭉 그래드렸죠.”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네가 저 할머니에게 그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거야?”
“영혼을 잘 달래주지 못해서 그 눈을 결국 감지 못하게 된다면…저택의 밑에 갇혀 있던 것들과 같은 악령이 될 수 있어요. 억울함과 원통함과 비통함에 사로잡혀선, 그 어떤 다른 이의 행복도 용납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브리택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다면 저 저택 밑에 갇힌 영혼의 일부는 선대 묘지기들의 잘못으로 악령이 된 사례일 수도 있었다.
“달리아, 혹시 너도….”
“전 아직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요. 이래뵈도 꽤 실력이 좋다고요?”
그가 피식 웃어버렸다. 달리아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달리아는 튀어나오는 꼬마아이에게 미리 준비해둔 사탕을 주고, 기사 서임을 받기 직전에 마차에 치여 죽어버린 청년의 영혼에게는 기꺼이 그의 어깨에 지팡이를 휘둘러 서임식을 치러 주었다. 비통하게 자살한 과부의 영혼에게서는 단검을 빼았고, 대신 꼭 끌어안아주었다.
브리택은 그녀가 여기 묻힌 모든 이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죽었는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거나, 아니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묘로 돌아갔다.
“브리택, 알지는 모르겠지만…우리 머스그레이브 공동묘지는 아마도 영혼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이 땅 위에 몇 안되는 장소일 거에요. 지금 영혼들이 일어나는 걸 봤나요? 여기서만 그러진 않아요.”
“그렇다면…?”
달리아는 대리석으로 만든 길을 지팡이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걸었다.
“이 밖은 혼돈이에요. 망자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그 영혼이 인간들에게 달라붙는…. 물론 몇몇 대도시들이야 교회의 사제님들이 기적의 힘을 빌어 어떻게 지키신다고 하지만, 그러지 못한 작은 마을들과 소도시들은 이미 폐허가 되고 말았죠.”
“그럼 이곳에서 삼십 분 거리에 있다는 그 마을은…?”
“거긴 무사해요. 금촛대 공동에서도 강력하고 넓은 결계를 만들거든요. 이 주변 마을은 머스그레이브의 보호 아래 있어요. 그리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걸 보면…당신은 아마 이 머스그레이브의 영토 안에서 살다 죽은 영혼이겠죠.”
이 안의 사람들은 묘지기 일가인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일원을 제외하고는 밖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한 정보 차단이었고,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모든 길에는 통행금지 표시가 쳐져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자라면서 붉은 천이 묶인 나무들 밖으로는 절대 나가서는 안된다고 배웠으니까.”
“오로지 묘지기들만이, 그리고 사제들만이 밖을 돌아다닐 수 있어요. 사제들은 신의 힘으로 망자들을 짓누를 수 있고, 묘지기들은 그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으니까요.”
브리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해주는거야?”
“…첫 번째로는 이제 당신도 머스그레이브의 일원이니까. 두 번째로…저를 사랑한다면서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는 솔직히…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싶진 않아요.”
달리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브리택. 첫날의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서약을 취소할 수 있어요. 물론 제가 조금 몸져눕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해요. 묘지기로서 저는 어쩌면 가끔씩 밖으로 불려나갈 수도 있어요. 이 위험한 일에 저랑 함께해도 괜찮겠어요?”
브리택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마주보았다. 그가 긴 주둥이로 달리아를 가만히 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왜 그 위험한 일을 혼자 하려는거야. 그 작고 하얀 손으로, 왜….”
“…위험하니까.”
그의 푸른 눈빛이 시리게 타올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돼. 절대. 절대 혼자 보내지 않아. 다시는.”
“…좋아요. 고마워요.”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달리아는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달리아.”
“…왜요?”
“묘지기 안 하면 안 돼?”
“…나 화낼거에요.”
하지만 달리아는 웃고 있었다. 브리택은 다시 그녀의 곁에서 천천히 걸었다. 달리아는 구슬을 쫓다 마차에 치여 죽은 아이에게 주머니에서 꺼낸 구슬을 주고, 고양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먹이는 소녀와 함께 울어주었다.
몇몇 악해져가는 영혼들이 주면을 스멀거릴 때면 그녀의 새하얀 불빛과 브리택의 으르렁거림이 그들을 쫓아내었다.
“달리아, 저런 것들이 나중에 큰 악령이 되는 건가?”
“…맞아요. 솔직히 저렇게까지 까맣게 변질되어버리면 저로선 어디 묻힌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운이 좋으면 가끔 다시 돌려놓을 수 있지만요.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어요.”
생전의 탐욕스러웠던 영혼들이 주로 타락하기 마련이었다. 안타깝게도 머스그레이브 공동묘지에는 권력으로 자리를 산 망자들도 있었고, 그들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 할 영혼들이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 달리아의 키보다 큰 은제 십자가들이 빼곡히 박히고 쇠사슬로 이어진 담장이 나왔다. 그 문은 달리아와 브리택이 겨우 지나갈 만큼 작았다.
“조심해야 해요, 브리택. 이 앞으로 한 블록은…위험해요. 우리 묘지기들은 이 블록을 일컫길 ‘검은 왕좌터’라고 하거든요.”
“왕좌터라….”
“선왕께서 묻혀계시거든요.”
달리아는 제물로 바쳐진 검은 양의 털로 짠 망토를 조금 더 세게 여몄다. 브리택은 달리아의 앞에 섰다.
“지금부터는 내가 앞서가겠어.”
“…괜찮겠어요?”
“누구도 너에게 손톱 하나 대게 하지 않는다.”
그가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냈고, 달리아는 품 안에서 은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장검 모양의 열쇠로 문을 열었다.
달리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브리택은 기함했다. 그 안에는 새까맣게 물든 영혼들이 하늘을 휘감고 있었고, 끊임없이 높게 박힌 은 십자가의 결계에 머리를 부딪히며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은십자가 울타리는 하늘까지 높게 뻗은 결계였다.
— 묘지기?
그들이 이윽고 달리아와 브리택에게로 그 눈알을 굴렸다. 달리아는 브리택이 나서기 전에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새하얀 화염이 길게 늘어지며 주변을 압도했다.
— …!
그들은 놀랐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달리아는 이 구간을 겨우겨우 힘겹게 넘어갔다. 그녀의 자그마한 노란 불꽃으로는 그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아의 불꽃이 그들 모두를 억누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지닌 악한 탐욕보다 그녀의 은촛대지팡이에서 뿜어져나오는 온화한 빛이 더 강력했다.
“달리아….”
서약한 묘지기견과 함게하는 묘지기는 달리아가 기억하기로 그녀가 여섯 번째였다. 그들은 그 보지못한 강력한 힘에 굴복했고, 그 따스함이 주는 평온함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도 이런 건 처음봐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급급하던 것이 고작 어제였다. 묘지 바닥에 한 번 구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그대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와 서약했군.
까맣게 물든 영혼의 구름이 전부 다 자신의 묘지로 가라앉자, 그 가운데의 검게 변색된 은 왕좌가 보였다.
“당신은….”
브리택은 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달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선왕이시여.”
— 축하할 만한 일이군.
새하얀 털이 달린 붉은색 망토, 길게 휘날리는 수염, 그리고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와 붉은 머리칼. 비록 죽기 전의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선왕 얀데홀스 4세는 당당했다.
— 그렇게 따스한 빛은 오랜만이야…. 그 빛이라면 짐의 땅에 내려진 오랜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달리아는 지팡이를 든 채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렸다. 브리택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영혼이 된 상태에서 생전의 계급이란 무의미했지만, 선왕 얀데홀스 4세의 영혼은 굉장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예?”
달리아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을 무렵이었다. 얀데홀스 4세의 영혼은 이미 빛의 따스함에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도 이 검은 왕좌터는 당분간 조용할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이 묻힌 땅 속으로 돌아갔다.
“…달리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선왕의 묘비 대신 세워진 그 은왕좌의 팔걸이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브리택. 정말 날 사랑하긴 하나 봐요?”
“…지금껏 못믿었던거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달리아는 대답 대신 방긋 웃으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복슬한 목덜미에 코를 부비며 말했다.
“아뇨, 장난인걸요?”
그가 피식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