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어요?”
진이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헬리온시티 에서 왔어요!’
“내 이름은 블랑 이에요!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위험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번식이
실패하면 다시 먹이 저장소로 가게 될 거예요”
이봐! 소리를 지르며 앞치마가 눈을 부라렸다.
“일을 하라구 했지, 누가 잡담을 하라고 했어!”
채찍과 다를 바 없는 촉수가 진이를 후려쳤다.
앞치마의 기세에 눌려 여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진이는 알을 닦아주고 이리저리 굴려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투명한 알 속에 움직이는 것은 문어나 오징어 아니면 해파리 같은 유연한
그 무엇이었다.
이 알들은 세발행성으로 부터 온 것으로 세발족들이 꺼지지 않는
불처럼 여기고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한 차례 일이 끝나자 식사 시간이 되었다.
음식이라고 나온 것은 끈적한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액체 한 사발이
나왔다.
저것들이 먹는 그것이었다. 진이가 먹지 않으려 하자 앞치마가 달려와
“우리의 계획을 망가뜨릴 셈이야? 내가 먹어줄까?”
'읍읍' 거리며 먹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미개한 인간들은 이제 모두 사라지게 될 거야! 안 그래?”
“당연하지!”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다.
진이는 여전히 머리를 푹 숙인 채 먹는 시늉을 했다.
언제나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밤이 되자 준과 혁은 연구소의 지하 기관실로 몰래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목적은 그냥 살펴보는 것이었다
실내는 여느 연구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많은 실험실이 죽 이름표를 달고 늘어서 있었다.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다 어디 간 거야!”
“쉿! 무슨 소리가 나는데!”
따라가 보니 잡혀 온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살려 주세요!”
너도나도 창가로 다가와 아우성을 쳤다.
보초들이 오기라도 한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이 사람들 모두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산길을 타고 넘는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
준과 혁이 그들을 데리고 산길을 넘는 동안 보초들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들은 밤이면 모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경비가 삼엄해져서 연구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곳곳에 복제 인간들이 버젓이 돌아다녀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들의 촉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준의 회사에도 복제인간들이 활보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회사를 점점 장악해 나가는 복제인간들은 자꾸만 업그레이드 되어서
나타났다.
“준! 오늘 우리 집에서 파티가 있는데 오지 않을래?
“ 좋죠!”
기분전환도 할 겸 그리고 이 선배 복제인간의 집에 가서 구경도 할 겸
가기로 했다.
준 보다 먼저 입사한 선배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얼마 전에 갑자기 돌아왔는데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상식백과를 머리에 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물어보기도
전에 줄줄이 읊었다.
백과사전에 있는 내용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걸까?
회사 사람들이 모두 와 있었다. (이건 뭐지? 전부 있잖아!)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서로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준이 들어서자 모두가 일시에 정지된 상태로 그를 주시했다.
일시 멈춤!
“아! 안녕하세요!”
그의 인사를 접수했는지 다시 플레이되었다.
혹시 이들이 복제된 후, 그놈의 비디오가 가끔 되감기를 하느라 멈췄던 모양이다.
나머지는 먹고, 춤추고, 이야기하고 즐겁게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파티는 끝났다.
(이 사람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걸까?)
준이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늦은 밤이 되었다.
모두 잠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잠이 들기 시작했다.
바닥과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든 사람들은 이내 깊은 잠이 들어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가 지나자 서서히 그들의 몸에서 나온 촉수가 서로 엉키듯이 타고 올라
벽면을 모두 덮었다.
준이 기겁을 해서 나가려는 순간 집으로 초대했던 선배가 다가왔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것도 눈을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뭘 아는데요…”
라고 말을 마치자 누워있던 모두가 똑같이 말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준은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알긴 뭘 안다고 저 난리인 거야! 그냥 말해도 될 걸 자면서 말하는 거야!
잠꼬대야 뭐야!)
놀란 김에 화가 나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늦잠을 자고 말았다.
창문 사이로 아침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저들의 계략을 무너뜨릴 단서를 찾아야 한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회사에 들어서니 출입 카드를 체크하려 줄을 서고 있었다.
다음은 계단을 올라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제인간인지 아닌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준 자신이 그들에게서 피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각의 벽면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 왜소한 편이었던가?”
모두 건장해 보였지만 자신은 그에 비해 훨씬 왜소해 보였다.
“이게 내가 잡혀가지 않은 이유라니…”
마침 선배가 들어왔다.
어제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건지…
“좋은 아침입니다!”
준이 평소처럼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그는 준을 향해서 씨익 미소를 보냈다.
일이 끝난 후
준과 새로운 파트너 숙과 공원에서 만났다.
어둠이 내린 공원은 찾는 이가 없어서 한적했다.
숙의 정보는 의외로 자세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드론에 관한 소식들이 준에겐 아주 긴요했다.
“우리가 만나는 걸 누가 알진 못하겠죠?”
“걱정 마요”
“이젠 준이 씨가 말해봐요!”
“내가 사는 R-25 구역은 번식지로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
이미 많은 결과물들이 키워지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변이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로드 컴퍼니가 있는 높은 장벽 안쪽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그러면 더욱 조심해야겠어요. 안 그래요?”
“시간이 많으면 좋을 텐데! 앞으로 우리 잘해 봅시다.”
“그래요!”
준이 사는 구역에서 죽은 시체들이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방송에서는 세발족 경찰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 세발 정부가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지휘할 겁니다.
R-25 구역 여러분은 안심하고 일상에 충실 하십시오!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으면 즉시 신고해 주십시오!”
녹음된 마이크를 단 소형 자동차들은 구역 곳곳을 누볐다.
시체들은 지금까지 와는 다른 형태로 죽어 있었다.
물어뜯긴 자국이 선명한 채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던 것이다.
브이는 이미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베칸 자라면서 세발족과 인간의 유전자가 결합해 전혀 다른 생명체가
된 것이다.
월등한 유전자로 결합한 신체와 다소 불안정한 열등 유전자가 서로 충돌
하면서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이 발현됐다.
성장 속도가 빨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체가 되어서 높은 장벽을 넘어
탈출을 해 버렸다.
이미 만들어진 많은 수의 번식체들은 자라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촉수는 숨겨진 무기처럼 강한 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강한 힘이 그들을 끌어당기며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 한 남자가 도로 위에 세워져 있는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하는지 목적지는 없었고 그저 구역들을 배회하고 있었다.
자신을 쫓는 무리가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로드 컴퍼니 소속의 실험체 베칸 인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한편 세발 경찰들은 산속에 있는 버려진 집을 기습했다.
드론이 보낸 영상 속에 베칸이 들어가는 장면을 전송해왔다.
허름한 집은 발로 문을 밀자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래된 가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술병이 나뒹구는 식탁 아래에 시체가 있었다.
역시 찢겨진 상태였다.
번식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갖고 있는 세발족도 이렇게 죽은 시체는
달갑지 않았다.
“이런! 몸뚱이는 왜 이렇게 된 거야!”
“이봐! 처리반을 불러! 끔찍하군!”
“알았습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여럿이군!”
로드 컴퍼니 연구소에서 공격을 받아 죽은시체에서 혈액을 채취해
베칸의 유전자가 얼마나 변이를 일으켰는지 확인 중이었다.
“변이가 확실하군!”
“그래요?”
“더 안 좋은 소식은 세발의 합리적인 정신에도 어긋나고 기준도 없다는 거야”!
“일종의 돌연변이네요”
“더구나 우리와는 채널링이 안돼서 더욱 문제란 말이야!”
“세발 연방에서 폐기 처분이 내리면 곧 시행될 거야. 인내심을 갖자고”
세발 연방은 브이가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득에 나섰다.
브이가 폐기처분 하자는 세발연방에게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박사! 난 베칸을 포기할 수 없소! 그리고 이 실험도 마찬가지요!”
“브이님! 베칸처럼 이미 성체가 된 뒤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네발 행성의 경우에도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브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브이의 촉수가 조금씩 기어 나왔다.
“네발 행성은 이미 복제가 실패로 끝났으니 그 얘기는 집어치워!”
“죄송합니다”
하지만 네발 행성의 복제과정에서도 지금처럼 잔인한
살인은 없었습니다. 그만 인정하십시오”
브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세발 행성의 권위자로서 위신의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박사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복제가 아닌 번식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이가 지구에 오기 전 네발 행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인 번식계획이 있었다.
처음엔 촉수를 이용해 토착인들을 빨아들인 후 적응하는 단계를 거쳤다.
적응하는 방법은 그들의 문화, 생활 양식 등 모든 것을 익히는 것이었다.
토착인들은 껍데기만 남은 채 모두 사라지고 세발족이 그들을 대신했다.
토착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복제들이었다.
흡입해서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구가 늘지 않는 것이었다.
네발 행성은 지구처럼 복제가 가능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인구를 늘리기 위한 번식과정에 들어갔는데
첫 번째 실험체가 그만 과다 촉수 발생으로 죽고 말았다.
네발 행성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시리얼과 결혼하려 했지만, 브이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시리얼이 지구로 탈출을 하고 말았다.
세발의 지도부는 이제 브이의 정복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방식의
번식정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브이의 비뚤어진 신념이었다.
브이의 자존심에 불똥이 된 시리얼을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로드 컴퍼니의 실험실에서는 세발의 박사들이
살아있는 블랑 1을 해부하기 위해 한창 분주했다.
블랑이라는 여자에게서 나온 생명체였다.
“이 변형은 왜 일부만 변형하는 걸까요! 빨리 변형을 일으키는 보조 인자를 찾아야 합니다.
어쩌면 비부호화DNA 즉 정크 DNA의 돌연변이가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돌연변이는 아마도 서로 다른 행성 사이의 번식과정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원시적 유전자가 발현되는 발단이 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살인 괴수가 얼마나 탄생할까?”
“아마 수십 명은 될 겁니다. 그들이 다시 번식을 시도했다면
수백, 혹은 수천 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브이님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이 실험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