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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아이돌스토리
신스틸러
작가 : 감귤
작품등록일 : 2020.9.23

과거 연습생, 현직 매니저, 조만간 백수 예정.
나 은서리, 연예기획사의 대표가 되어보겠습니다!

 
계약
작성일 : 20-09-30 04:15     조회 : 376     추천 : 0     분량 : 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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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그럼 올라갈까요?”

 

 홍서연이 엘리베이터 밑에 있는 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다. 처음 봤다면 분명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겠지만, 백화점에서 이미 한 번 본 바 있었기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본래 레지던스의 여러 고객을 수송하기 위해 설계되었을 엘리베이터는 무척 속도가 빨랐다. 그뿐만 아니라 카드를 찍은 덕분에 다른 층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최상층까지 직진했다. 순식간에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팅-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일전에도 한 번 온 적 있는 복도였지만 그땐 몸이 아프고 경황이 없어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다시 와서 둘러본 복도는 연예기획사 사옥이라기보다는 호텔 객실 복도를 연상케 했다. 벽에 주르륵 붙은 등은 조그만 초록색 갓을 쓴 채 노란 불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 불빛이 복도 분위기를 한층 따뜻하게 만들었다.

 조명을 받아 은은한 노란 빛을 띠는 벽을 따라갔다. 그 끝에 이르자 진초록색의 문이 나타났다. 조금 의외인 것은 사옥의 모든 층의 출입구가 최신식의 보안 장치를 자랑하는 것에 비해 이 문은 허술한 데가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번호키가 있거나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지문이나 홍채를 인식시켜야 들어갈 수 있는 도어락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모두 아니었다. 그저 진초록색 문에 달린 손잡이 밑에 열쇠가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건물 자체의 보안이 뛰어나다지만 그래도 여자 혼자 사는데… 하고 약간의 걱정이 삐죽 고갤 들 무렵, 홍수연이 이런 나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여기 달린 시건장치는 전용 마스터키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이 열쇠가 아니면 벽 전체를 뜯어내지 않는 이상 열리지 않는답니다.”

 “신기하네요. 그냥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나무문 같은데…….”

 “그렇죠? 한번 열어보실래요?”

 

 어느새 홍수연의 손에 들려 있던 열쇠가 내 손으로 옮겨왔다. 고전적인 모양의 문손잡이에서 어느 정도 짐작했듯이 열쇠 역시 무척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반질반질한 열쇠의 촉감을 느끼며 열쇠 구멍에 끝을 맞췄다. 오래되어 뻑뻑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스르륵, 하고 아주 매끄럽게 열쇠가 들어갔다. 열쇠는 반 바퀴가 돌아가고 나서야 멈추었다.

 

 “들어가시죠.”

 

 문이 열리고, 홍수연의 권유에 쭈뼛대며 먼저 들어갔다. 열린 문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들이고는 겨우 두세 걸음이나 떼었을까,

 

 “우와...!”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벽 한 면을 모두 통유리로 만들어낸 사옥의 최상층은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닥다닥 붙어 빛을 뿜어내는 빌딩 숲 옆으로 크고 깊은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빌딩과 다리에서 쏟아지는 색색의 빛이 강물 위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단지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지난번에는 정말로 내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분명히 이 광경을 보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머릿속에서 휘발된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그렇지만 덕분에 이 아름다움을 처음 본 것처럼 생생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때요?”

 “와, 정말 예뻐요! 잠들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야경이에요.”

 “서리 씨 반응이 궁금했는데 좋아해줘서 다행이네요. 자, 앉으세요.”

 

 홍수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어느 방 안의 소파에 앉았다. 여긴 어디지? 아까 거기가 전실이나 거실이라면 여긴 응접실이려나.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긴 하지만 정작 실생활에 필요한 가구가 없다. 이곳은 오로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이 맞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응접실로 추정되는 이 공간은 낯이 익었다. 절절 끓는 열로 끙끙 앓다가 막 의식을 되찾았을 때, 눈을 뜨자마자 보인 곳이 이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소을이 저쪽 욕실에서 목욕 타올만 허리에 두르고 나왔었지. 그런 민망한 장면은 참 쓸데없이 잘도 기억이 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맞은편에 그 민망한 기억의 주인공이 앉았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워서 일부러 방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눈을 피하는데도 집요하게 시선이 쫓아온다.

 

 “뭘 봐.”

 “보면 안 되나?”

 “응, 안 돼. 닳으니까 그만 봐.”

 “…….”

 

 한 번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날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정작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야경은 눈앞에 두고도 감흥이 없더니, 내 얼굴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눈빛만 보면 녀석의 앞에 내가 아니라 예술품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다시 한번 더 주의를 줘야 하나 고민을 할 무렵에, 홍수연이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아, 혹시 홍차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미리 여쭤봤어야 하는데”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하하”

 “다행이네요.”

 

 각자의 자리에 사이좋게 찻잔 하나와 조각 케이크 하나를 나눠 받았다. 찻잔과 그릇이 예뻐서 그냥 먹기엔 아까웠다.

 

 “혹시 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내가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안 한소을은 거리낌 없이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팍팍 떠먹기 시작했다. 게걸스럽거나 허겁지겁 먹는 식의 추잡한 모습은 아니었다. 다만 큼직하게 덩어리를 떼어내 입으로 가져가는 행위에 적어도 우아하게 보이려는 노력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야, 한소을. 먹는 게 아주 상남자네.”

 “으음?”

 

 녀석이 내 말에 의문을 표하며 홍차를 집어 들었다. 단 두 모금 만에 찻잔이 비었다. 갓 내린 뜨거운 차를 차가운 음료 마시듯 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다. 입천장이 안 뎄을까 보는 사람이 도리어 걱정될 정도였지만, 정작 한소을은 괜찮아 보였다. 이쯤 되니 그저 배가 고프니 케이크를 먹고 목이 막히니 홍차를 마신다는 식의 단순하고도 호쾌한 그의 미식론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맛은 좀 어때요?”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시간이 많았으면 케이크도 직접 구웠을 텐데……. 오늘은 시간이 좀 촉박해서 매장에서 사 왔지만 다음엔 직접 구워드릴게요.”

 

 홍수연이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애써 변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케이크 맛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케이크도 구울 줄 아는 그녀의 전방위적인 재능이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특별히 그녀가 직접 내린 홍차는 가히 최고였다. 평소 차를 즐길 기회가 없어 홍차를 자주 접하지는 못했지만, 차 특유의 쓴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놀라웠다. 차를 마신다기보다는 부드러운 크림을 입에 머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나의 감상을 전하기 위해 막 입을 여는데, 한소을이 먼저 선수를 쳤다. 메마르기 짝이 없는 감상평이었다.

 

 “이건 우유가 들었군.”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우유랑 스팀 밀크가 들어갔어요.”

 “어쩐지 그냥 우유만 넣은 것보다 훨씬 부드럽네요.”

 “난 여기에 그게 더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그거?”

 “응.”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뒤로 기대앉은 한소을이 자신만만하게 고갤 끄덕였다.

 

 “시리얼.”

 “야! 누가 홍차에 시리얼을 말아 먹냐?”

 “똑같은 우유가 들어갔는데 왜 이건 안 되지?”

 

 너무나도 당당한 녀석의 태도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남다른 미식론을 가진 한소을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었다.

 

 “어, 그래. 언제 한 번 시도해 보자. 왜 다들 안 말아먹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시리얼을 홍차에 말아 먹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몇 번 더 오간 뒤에 잡담이 수그러들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되고 난 뒤에 다과 자리를 정리했다.

 깨끗하게 닦인 테이블 위에 결재판이 다시 등장했다. 그걸 보니 웃고 떠들며 잠시 잊었던 긴장감이 다시 치고 올라오는 걸 느꼈다.

 

 “서리 씨 혹시 생각해 둔 계약 조건이 있나요?”

 “…….”

 

 홍수연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드를 매만졌다.

 무작정 달려들기에는 판이 너무 커져 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낮에 보았던 홍소라의 기괴한 모습……. 계약을 해도 괜찮은 걸까.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기회가 될 수도, 혹은 반대로 수렁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 또한 실패에 익숙한 인간이기도 했다. 아직 법적으로 엮이지 않은 이 시점에서 적당히 물러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혹시 계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

 “그리하지 않으셔도 전 서리 씨와 계속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요.”

 

 홍수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미소 띤 얼굴임에도 어째서인지 쓸쓸함이 묻어나는지 모르겠다. 문득 마음을 좀처럼 열지 못하는 그녀에게 친구가 없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쓸쓸함은 아마도 외로움에서 기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젠장. 여우 같은 계집애. 날 왜 친구라고 소개했어? 나한테 왜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어? 그러면 난 거절할 수가 없단 말이야…….

 홍수연의 수작은 친구는커녕 가족조차 없는 나의 취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그리고 친구는커녕 가족조차 없는 주제에 그녀를 가엾게 여기는 나야말로 미련한 곰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반대로, 제가 계약을 하더라도 친구처럼 지내주실 수 있나요?”

 

 내 말에 홍수연이 정말로 기쁜 듯이 웃었다. 근래 본 웃음 중에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당연하죠.”

 

 이후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사인하는 내 손 위로 무거운 시선이 떨어지는 걸 느꼈다. 굳이 고갤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소을은 내가 계약서에 사인한 뒤에도 종이 위에 남긴 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사인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티 없이 순진한 건지, 아니면 어둑하게 가라앉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다 끝난 건가요?”

 “네. 계약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서리 씨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적당한 인재를 영입해 신인 아이돌그룹 제작에 착수하시면 됩니다. 제작 및 홍보 등의 모든 비용은 공식 후원사인 SR 그룹에서 일체 부담하게 됩니다.”

 

 도장까지 다 찍은 뒤 서로 계약서를 나눠 가졌다. 손에 들린 것은 겨우 종이 몇 장일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정작 사인할 때는 실감 나지 않던 감정이 뒤늦게야 올라왔다. 한소을이 뜬금없이 내 손을 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손을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가볍게 손을 얹던 이전의 습관과는 달리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지도록 힘주어 잡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나의 떨림이 멎을 거라 믿는 것처럼.

 

 “자, 그럼 서리 씨. 이 방은 어떻게, 맘에 드시나요?”

 

 미묘하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이 홍수연이 사근사근하게 물어왔다.

 방이 마음에 드냐니… 당연하지 않은가. 저 멋진 야경만으로도 이 방은 충분히 매력적인걸.

 

 “네. 맘에 듭니다.”

 “이 방은 이제 서리 씨 거예요.”

 “네?!”

 “물론 서리 씨가 계약을 모두 완수해서 정식으로 소라엔터테인먼트의 주인이 되고 난 이후의 일이지만요.”

 

 하하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없이 청량했다. 에휴, 놀래라……. 깜짝 놀라 멎는 것만 같았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제 박자를 되찾았다.

 그래도 홍수연의 말을 들으니 내가 얻을 수 있는 보상이 그저 막막한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을 느꼈다. 그래. 내가 계약을 완수하면 이 멋진 방을 받을 수 있다 이거지? 아니. 방이 아니지. 무려 한강이 보이는 이 건물을.

 

 “어떻게든 이 방을 쟁취하겠어요.”

 “그런 마음가짐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그런가요?”

 “네. 저희 같은 기업인들에겐 야망이 있는 편이 좋아요.”

 “...!”

 “그래야 치열한 경쟁을 버틸 수가 있으니까.”

 

 순간 몸에 흐르는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나… 저 말 들어본 적 있어.

 웃음기가 싹 식어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묘한 오싹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쩌면 내 손을 잡고 있는 한소을에게도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진정시킬 만한 것이 필요했다. 아, 그래. 어쩌면 홍소라에게서 후계자 교육을 받은 홍수연이니 기업인의 심리 역시 똑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런 거겠지.

 그러나 겨우 수습해가는 마음과는 달리 굳어진 표정은 좀처럼 수습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무엇이든 큰 실수를 할 게 분명했다. 결국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리 씨?”

 “저, 저는 이만……. 오늘 너무 긴장을 많이 했나 봐요.”

 “어머, 죄송해요. 가뜩이나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들어 놨죠?”

 

 서둘러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소을은 물론이고 홍수연까지 뒤따르는 기색을 보였다.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도망치듯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신의 종족들에게 금세 걸음을 따라잡히고 말았다. 뒤에서 어깨를 붙잡는 손에 흠칫 놀라 멈춰 섰다. 곧 잡은 어깨를 돌리는 손길에 속절없이 몸이 돌려 세워졌다. 내 시선으로는 판판한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기에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고갤 높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리 불편하지 않게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한소을이 허릴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춘 덕분이었다. 녀석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날 응시했다. 가만히 날 가늠하는 듯도 하고 뭔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그 어느 쪽이든 한소을은 불안정한 내 상태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짤막한 말 한마디만 건넸다.

 

 “가자.”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한소을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대로 곧장 방을 빠져나와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까지 다다랐다. 여전히 곁에는 홍수연이 동행하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몸이 떨릴 만큼 무섭진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한소을의 품 안에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방은 아래층에 있어요, 서리 씨.”

 “감사합니다…”

 “혹시 몸이 안 좋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본가에 제 전담 주치의가 있어요.”

 “…죄송해요, 수연 씨.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괜찮아요. 오늘 너무 무리했나 봐요. 푹 쉬고 몸을 좀 회복하면 나을 거예요.”

 

 그녀의 상냥한 배웅을 맞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바로 한 층 아래의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르-

 

 그때, 홍수연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실례한다는 듯 슬쩍 고갤 숙여 보이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눈짓으로 화답했다.

 

 “그럼 들어가요, 서리 씨.”

 

 마침 타이밍도 좋게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닫히는 문틈으로 액정 속에 비친 발신인을 확인하는 홍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전화를 받는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네, 어머니.”

 

 어머니...?

 고갤 번쩍 들었으나 이미 문은 완전히 닫힌 뒤였다. 그러나 소리까지는 완벽히 차단하지 못하는 문틈으로 홍수연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감정이 모두 제거된 듯이 시리도록 차가운 음성이었다.

 

 “계약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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