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층이 아니라… 아래층이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간접조명이 은은히 바닥을 비추는 어두운 복도였다. 마치 호텔 객실 복도와 같은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밝은 조명을 비롯한 산뜻한 인테리어와 오가는 사람들로 활력이 넘치는 지상층과는 달리, 지하층은 전반적으로 어두운색의 벽과 바닥을 깔고 무거운색의 가구를 놓아 진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VVIP 라운지답게 인구 밀도는 확연히 떨어져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내리… 내릴까요?”
“네.”
마봉구의 목소리도 눈에 띄게 작아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긴장감이 마른침을 삼키며 어두운 복도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돌아선 마봉구의 손에 어깨를 붙잡혔다.
“으악...!”
“쉿…….”
그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침묵할 것을 종용했다. 얼결에 입을 꾹 다물고는 마봉구에게서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서리 씨. 이곳 라운지에서는 반드시 정숙하셔야 합니다. 쓸데없는 잡담이나 소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엄금되어 있어요. 알겠죠?”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마봉구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경고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곳 분위기는 잡담보다는 비밀스럽고 거국적인 대화를 하는 분위기인가 보다. 눈치 없이 구느니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싶어 입에 지퍼를 채웠다.
복도 끝에는 둔중한 느낌의 커다란 양 문이 있었다. 실제로도 무거운 문을 마봉구가 조금 힘겹게 열어젖혔다. 여린 틈새로 보이는 내부 역시 어두웠다. 간간이 천장에 놓인 간접 조명과 테이블 위에 놓인 고전적인 디자인의 뱅크 스탠드만 띄엄띄엄 불을 밝히고 있을 뿐, 메인 조명은 없었다. 덕분에 이 공간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누가 있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지어진 구조 같았다.
입구 앞에 서서 홍소라가 어디 있는지 부지런히 두리번거리며 어둑한 내부를 둘러보는데, 방 한쪽 구석의 스탠드에서 불이 켜졌다.
“서리 씨, 이쪽으로”
마봉구가 속삭이는 음성으로 날 부르고는 앞서나갔다. 그를 뒤따라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중간중간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발과 테이블을 피해 걷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게 겨우 불이 켜진 스탠드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흐억...!”
“쉬잇…….”
마봉구가 놀란 신음이 새어 나올 뻔한 내 입을 급히 막았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는 홍소라가 앉아 있었는데, 생기라고는 다 빨려 나간 듯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백화점에 같이 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가진 나이에 비해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는데. 지금은 온몸의 수분이 마른 것처럼 피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혹시 스탠드 조명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가. 손을 들어 내 손등은 어떻게 보일지 살피는데, 그녀가 메마른 손을 들어 자신에게로 까딱였다.
“이리로 가까이.”
홍소라가 지목한 것은 나였다. 마봉구의 손에 떠밀려 한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더욱 기괴했다. 그것은 늙고 추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괴이한 데가 있었다.
“내 모습이 이상하지요?”
이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홍소라가 고갤 끄덕끄덕했다. 거짓을 말하거나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어서 아주 작게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맞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나는 너무 많이 늙었어요.”
홍소라가 손을 들어 자신의 주름지고 비쩍 메마른 손등을 바라보았다. 평소 언론에서 보았던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차갑고 완벽해 보이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눈앞에 있는 이는 그저 늙고 지친 노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녀는 들었던 손을 앞으로 뻗어 내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부터 입고 걸친 코트와 가방, 구두 순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왠지 그 눈빛이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인 건 내 착각이었을까.
“예쁘네요. 역시나 꾸민 보람이 있군요.”
“감사… 감사합니다.”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아.”
“…….”
마지막 말이 오싹하게 느껴진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마치 나의 젊음을 탐내듯이, 아니, 그렇게 어루만지면 젊음을 가져갈 수 있다는 듯이,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미련이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조금 물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홍소라는 눈에 띄게 경계하는 나의 행동에 불쾌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성을 되찾은 듯 손을 내려 자세를 정돈했다. 눈빛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서리 양을 이 자리로 부른 것은… 이걸 주기 위해서예요.”
홍소라가 내민 것은 검은색의 카드였다. 이게 뭘까 조금 고민하는데, 이번에는 뒤에 선 마봉구한테서 "흐억...!"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카드가 보통의 물건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나의 추측에 답하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한도 카드예요. 어떤 것이든 금액에 제한 없이 결제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건지…….”
“아까 말했지요? 나는 이제 너무 많이 늙었다고.”
“아뇨, 회장님 그런 말씀은-”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 이제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홍소라의 눈이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과거의 기억을 살피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묘하게 슬퍼 보이는 그 얼굴에서 그녀가 지나온 삶에 대한 보람보다는 회한에 젖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홍소라는 누가 보아도 성공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녀가 추진하는 모든 사업이 성공했고 심지어 독신의 몸으로 키워낸 홍수연마저도 SR 그룹을 이어받을 만한 완벽한 후계자가 되었다. 일과 육아를 완벽히 이뤄낸 워킹맘인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감히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왜? 대체 무엇이 부족하기에 저리도 비탄에 잠겨 있는 걸까.
“회장님...?”
“아, 내가 너무 분위기를 가라앉혔네요. 일단은 앉아요.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홍소라의 권유에 테이블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주춤주춤 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마봉구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 있었다.
“우리 수연이가 제 성을 물려준 수양딸인 것은 서리 양도 알 거예요.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예전에 기사에서 읽었습니다. 입양…하셨다고요.”
“수연이는 참 착하고 예쁘지요. 똑똑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수연이를 제 집에 들인 게 그 애 나이로 십 대 중반이었으니 후계자 교육을 시작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었어요. 더군다나 그 애는 양자였으니, 흠을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힘들단 소리 하나 없이 그걸 다 묵묵히 감내하더군요.”
홍수연이 홍소라의 수양딸인 것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홍수연을 자신의 호적에 양자로서 입적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발표를 했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그녀가 내린 결단에 언론이 들썩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양자가 아니라 실은 홍소라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었다. 그 일이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니 당시 얼마나 파격적인 행보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정식으로 양자가 되었으니 홍수연이 그녀의 후계자로서 키워진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홍수연이 후계자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과정이야 언론에 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배경에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나중에 제가 물어봤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힘든 과정을 다 버텨낸 거냐고. 큰 야망이라도 있는 거냐 물었습니다. 저희 같은 기업인들에겐 야망이 있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치열한 경쟁을 버틸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수연이는 다른 대답을 하더군요.”
“어떤… 대답을 했나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신의 목적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릴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저 발언을 한 획조차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한소을. 녀석이 그렇게 말했었다. 자유로운 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녀석은 이미 이뤘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뒤이어 나온 말이 그것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대답이 홍수연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 두 사람. 서로가 서로를 만나야 할 운명인가 보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한 쌍처럼 어울렸던 건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복선이었나 봐.
심장이 들떠서 마구 날뛰는 건 좀처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에 내 심장이 이리도 뛰는 걸 보면 나는 천생 무수리 체질인가 보다. 가만히 심호흡하며 겨우 마음을 달래고는, 이어지는 홍소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정확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만나야 할 사람이 서리 양이라고 생각해요.”
“네?”
아니. 아니요.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회장님.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홍소라를 보았다가 손사래를 쳤다. 이분 족적을 보면 분명 시대를 꿰뚫어 보는 눈매가 날카롭고 사람 보는 눈썰미도 장난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아무래도 대단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홍수연의 행동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지. 아, 그래. 홍수연은 날 친구라고 소개했었다. 그녀는 단지 날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애매한 관계 탓에 친구라 둘러댄 것뿐인데, 그 말이 홍소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 거다. 나는 그 오해를 풀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운명이 짝지어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도.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회장님, 저는 그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네. 아까 회장님께서도 보신 바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가 함께 식사할 때 같이 있었던 남자인데-”
“누구요. 아까 서리 양옆에 앉아있던 그 사내자식이요?”
“어… 네. 그 사내자식이요.”
머쓱함에 이마를 긁적였다. 그 사내자식이 회장님 따님의 ‘만나야 할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한소을에 대해 부정적인 홍소라의 태도를 보니 선뜻 소개해 주기가 망설여졌다. 어떻게 해야 잘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어줄 수 있을까 고뇌하는 내 귀에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서리 양,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정확한 편이에요. 아마 그 사람은 아닐 겁니다. 수연이를 오래도록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그 아이가 만나길 바라왔던 사람은 서리 양이 맞을 거예요. 수연이가 서리 양에게 회사를 양도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연예인, 엔터테인먼트 다 좋다. 그런데 그런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할 때 되지 않았냐고 물을 때마다 그 애는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만나야 할 사람을 찾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그러니 제 필요에 의해서라도 서리 양이 맞아야 할 겁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 거예요.”
어째서?
내 마음속의 질문에 답하듯 홍소라가 말을 이었다.
“수연이가 SR 그룹의 후계자로 돌아오길 바라니까요. 아까 말했지요? 저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
“수연이가 하루라도 빨리 방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군요. 그러기 위해선 서리 양이 협조를 좀 해줘야겠습니다.”
“회장님...?”
나뭇등걸같이 딱딱한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야위고 마른 손답지 않게 억세고 강한 손길이었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마치 가시덤불에 엉긴 듯이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은 그녀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로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음성은 마치 마녀의 저주처럼, 혹은 언령처럼 떨쳐낼 수 없이 귓가에 들러붙었다. 아니,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소라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도록 하세요. 물질적인 지원은 제가 모두 담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