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많이 나면 위험하다. 자리에 누워 쉬어야 한다.”
아니 말을 할 줄 아는 건 둘째 치고 이놈 말투가 대체 왜 이래.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딱딱하다 못해 로봇 같은 말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일부러 그러나? 아니면 뭐 컨셉 같은 거야? 뭐지?
놀람 반 호기심 반에 말을 더 걸어볼까 입을 연 찰나였다. 녀석이 느닷없이 내 손목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 자, 잠깐만!”
잠깐 잠이 든 채로 조금 쉬었다고 해서 몸 상태가 바로 나아질 리가 없었다. 순간 눈앞이 핑 돌며 시야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녀석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고맙긴 한데 조금 민망했다. 내가 이 녀석의 다리를 베고 잠들긴 했지만 오늘 초면인데.
“안 무겁냐? 내려줘”
“괜찮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내 말에 녀석은 자리에 멀뚱히 선 채로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했다. 딱히 힘들어하는 기색 같지는 않고 다만 조금 고민하는 듯한 낌새다.
곧 고민을 마친 녀석은 걸음을 옮겼다. 멀진 않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 위에 나를 올려놓았다.
“아, 고마워.”
“기다려.”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손을 뻗어왔다.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손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비에 젖은 축축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을 뿐이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뭐… 뭐 하는 거야?”
“내 손은 약손이다.”
“풉! 뭐라고?”
“이렇게 하면 낫는다. 내가 봤다.”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나와 달리 녀석은 나름 진지했다. 뭐 녀석이 웃겨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지끈거리던 두통이 가시는 게 느껴졌다. 몸을 에던 한기도 조금 덜해진 것도 같다.
“어, 그래. 아까 전보단 좀 낫네. 약손 인정”
“너는 몸이 약하다.”
“알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러셨는데, 원래 나기를 좀 허약하게 타고 낫다 하대. 그래도 약손이라니 푸흡, 너 꼭 우리 외할머니처럼 말한다.”
“너는 비를 맞으면 안 된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뭔 소리야 그게?”
“넌 비를 맞고 나면 늘 앓아누웠지.”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얘 뭐야? 누군데 내 어릴 적 일을 알고 있어?
잊었던 한기가 으쓸하게 느껴져 몸을 떨었다. 그러자 녀석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안아주려는 듯이 두 팔을 벌리는 걸 밀어내며 경계했다.
저 녀석 말대로였다. 나는 어릴 때 비만 오면 방 안에 있다가도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비를 맞기만 하면 몸살이 나서 열이 펄펄 끓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께서 간호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일은 외할머니 외에는 알 사람이 없는데. 설마 외할머니께서 이 녀석 몸으로 환생하신 건가?
아니. 로봇마다 삐걱대는 모습을 보면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너. 스토커야?”
“스토커가 뭐지?”
“상대방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거 말이야.”
“네가 아까 그 남자 뒤를 쫓아다녔던 것처럼 말인가?”
“야! 그거랑 그게 같냐?”
“그럼 뭐가 다르지?”
“나는 그 사람 팬이고! 지, 직업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 거야...! 스토커랑은 달라.”
겨우 변명을 그러모아 궁색한 대답을 했다. 나름 단호히 스토커와 선을 긋는 내 대답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논쟁에서 이기긴 했으나 어째서인지 진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스토커다운 짓을 정녕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느냐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젠장… 양심에 찔린다.
다행히 녀석은 더이상 불편한 주제로 추궁하지 않았다. 나도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기, 그… 오늘 고마웠어. 혹시 괜찮으면 사례를 좀 할까 싶은데.”
“사례?”
“아, 그래! 어차피 차에 가봐야 하니까 같이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 참고로 내 이름은 은서리야.”
“알고 있다.”
“어, 그, 그래.”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내 이름을 정말 알고 있었다면 좀 무서워질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일부러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뭐야?”
“천하대장군이다.”
“어…….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이름은 한소을이다.”
“한소을… 예쁜 이름이네. 나는 그냥 한소을이라고 부를게. 기왕 이것도 인연인데 반갑다.”
손을 더 내밀어 녀석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한소을은 악수를 한 채로 위아래로 흔들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던 손이 어느새 넉넉하게 내 손을 감싸며 맞잡아왔다.
“...?”
손을 잡고 이끌려 하는데 그 자리에서 녀석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버틴다기보다는 정말로 그 자리에 말뚝을 박힌 듯이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야, 장난치지 말고 따라와.”
“나는 장난치지 않는다.”
한소을의 팔을 잡고 끙끙대며 잡아당기다가 결국 포기했다. 이만한 조각상도 이것보단 쉽게 옮기겠다 싶을 만큼 무거웠다.
“으응? 진짜 이상하네. 뭐가 문제지?”
허리에 팔짱을 낀 채로 고민에 잠겨 있을 때, 한소을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장승”
“응?”
“날 옮기려거든 저 장승을 완전히 부러뜨려야 해”
“그게 뭔 소리야?”
잘 못 알아듣는 날 위해 한소을이 몸을 반쯤 돌려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반쯤 부러진 채 바닥에 기울어져 있는 장승 하나가 있었다.
잠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저건 아까 내가 잠이 들었을 때 기대고 잠들었던 늙은 고목인데. 경황이 없어 잘 알아보지 못했는데 고목이 아니라 장승이었던 건가.
“근데 그게 왜.”
“저것과 연결되어 있어 나는 이 이상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뭐? 장난하냐?”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장승의 길이 만큼이다.”
이게 뭔 또라이 같은 농담이야. 우스갯소리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싶어 피식 웃었다가 정색하고 날 바라보는 시선에 웃음이 멎었다. 다시 장승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한소을을 보았다가 머릴 긁적였다. 언뜻 보니 녀석이 서 있는 위치가 대략 장승의 길이만큼 떨어져 있긴 한데. 아니, 대체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하, 진심이야?”
어쨌든 다시 하늘은 우중충해지며 다시 비를 뿌릴 태세였고, 다시 비를 맞아 더 심한 감기에 걸리기 전에 주차장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녀석의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당장 이놈의 발이 땅에 붙박인 이상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고민 끝에 일단은 따라주는 시늉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걸로 하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물음에 한소을이 내 손을 잡은 채 장승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반쯤 부러진 채 땅에 처박혀 있는 장승의 모습이 기괴하고도 을씨년스러워 다가가기가 꺼림칙했다. 저런 것에 멋도 모르고 기대어 잠들었다니 담도 크다, 은서리.
스스로 비아냥대며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갔다. 한소을은 자신이 그것을 부러뜨릴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내가 부러뜨려야 된다는 소리였다. 흠… 불길한데. 보통 이런 거 망가뜨리면 막 벌 받고 그러잖아.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넌 못 부러뜨리냐? 네가 나보다 힘도 세잖아.”
“난 그것을 부러뜨릴 수도 없고, 만약 할 수 있다 해도 나 자신을 스스로 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소멸되어 버린다.”
“풉, 그럼 네가 장승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
“알았다, 알았어. 말로는 뭔들 못 하겠냐. 어쨌든 참신한 농담이긴 했어.”
고갤 끄덕이며 장승 앞에 섰다. 설마 이거 부러뜨렸다고 벼락 맞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참고로 저 옆에 있는 장승은 벼락을 맞고 부러졌다.”
“야! 안 그래도 무서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줄래?”
겁에 질려 소리친 뒤에 엉거주춤 허릴 굽히고 장승 위에 발을 얹었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나무를 꺾으니 우두둑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동강 났다. 아마도 이미 썩은 나무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벼락을 맞거나 벌을 받는 등의 우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하고 막 한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응? 이게 뭐야?”
부러진 마디에 무언가 반짝이는 실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을 따라 눈을 돌리니 실이 한소을의 몸을 관통한 채 연결된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진짜라고? 장승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거짓부렁이 아니라 사실이었어?
“그 실을 끊어줄 수 있나?”
“어? 어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갤 끄덕이고는 부러진 마디에서 튀어나온 실을 잡았다. 예사 물건이 아니니 어지간한 힘으로는 끊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을 테지. 어느 정도 마음의 각오를 하고는 실을 쥐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실을 쥔 양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실이 끊어졌다.”
“응?”
한소을의 말을 듣고서 실눈을 뜨고서 살펴보았다. 끊어지기는커녕 내 손바닥이 베이지나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팽팽했던 실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녹듯이 끊어져 있었다. 그것을 양손에 쥐고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것이 스르륵 움직여 한소을에게로 향했다. 곧 그의 몸이 실을 끌어당기듯이 흡수했다.
“으음…”
실을 모두 삼키기까지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잠시간 멈춰서 있던 녀석은 약간의 탄성과 함께 눈을 떴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때? 잘된 것 같아?”
“실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잘됐다는 뜻이지?”
“그래”
“그럼 이제 저건 어떻게 할 거야?”
완전히 부러져 바닥에 누워버린 장승 녀석을 가리켰다. 어쨌든 분질러 훼손시켜버리긴 했으니 뒤처리는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거기다 믿기지는 않지만 눈앞에 멀대 같이 선 녀석과 기묘하게 연결된 관계였기도 하고.
이런 내 생각을 뒤엎고 한소을 놈이 괘씸한 소릴 했다.
“글세”
”글쎄라니?“
“내가 왜 저걸 신경 써야 하지?”
아니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