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린 시절 동화를 읽으며 자신이 공주가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동화에는 공주와 왕자밖에 나오질 않잖아? 언제나 동화의 끝은 이렇더라? 공주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우리는 분명 스쳐 지나가듯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공주와 왕자를 만나게 하기 위해 애쓰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모습 말이야. 그 수많은 마법사와 동물들과 심지어 마녀까지.
너무 유치한가?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라고 해서 다를까? 심지어 난 사극에서도 본 적 있는데. 왕이 사랑하는 여자를 간택할 때, 그 곁에서 보좌하던 수많은 무수리 말이야. 모든 이들이 두 주인공을 위해 애쓰는 그 많은 조연은 늘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밀려가더라고. 등장을 하긴 했는데 지나간 흔적도 없어. 아무도 그가 왔다 간 자리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아. 왜냐하면 이건 공주와 왕자의 이야기니까. 언제나 아름다워야만 하는 줄거리에 조연들의 구질구질한 인생이 끼어들어선 안 되거든. 언제나 주인공을 보조하는 데에 최적화되어야만 할 뿐이거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누구냐고?
“앗, 죄송합니다!”
“조심 좀 하지, 참. 쯧쯧…….”
“27신부터 다시 가겠습니다! 하나, 둘”
찰칵!
슬레이트 치는 소리가 나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겨 카메라 밖으로 달아났다. 또다시 실수로 카메라에 찍히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었다.
겨우 숨을 돌리고 나니 젖은 몸이 으슬으슬했다. 손에 들린 장우산이 무색했다. 우산을 들고서도 비를 쫄딱 맞았다는 게 아이러니하고도 씁쓸했다. 덕분에, 다행히 내가 우산과 온몸으로 커버해준 배우님의 얼굴은 비를 맞지 않아 뽀송뽀송했다. 아무렴, 어떻게 세팅한 머리고 메이크업인데.
흐뭇하게 화면에 담긴 예술작품을 바라보았다. 배우님은 매무새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가감 없이 화면에 담아주었다. 과연 주인공다운 면모다.
그리고 주인공인 왕자는 당연히 공주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이 장면이 드라마의 마지막 완결이었다. 길게 이어진 플라타너스의 길을 지나,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엔딩을 장식하는 것이다.
“히히……. 헤헤헤”
배우님의 오타쿠답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눈앞도 가물가물한 데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는 손도 덜덜 떨리는 게 위험하군. 아무래도 오늘 배우님에 대한 나의 달콤한 애정이 혈당 과다로 위험수치까지 치솟은 모양이다. 역시나 나의 배우님은 오늘도 멋지구나. 물론 마지막에 키스신을 추가하자는 감독 새끼 말에 여자주인공과 예정에 없던 키스신을 찍게 된 건 몹시 안타깝지만…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로 타협 보기로 했다.
아,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
“어어, 쟤, 쟤 쓰러진다!”
“컷! 방금 소리 지른 사람 누구야?!”
“미, 민준 씨, 자기 매니저 쓰러졌어!”
흐린 시야 너머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발들이 보였다. 뭐야, 누가 쓰러졌는데? 누가?
......내가?
“민준 씨, 미안한데 일단은 진행할게요. 빨리 마무리하고 병원 데려가자.”
“아이, 씨발……. 성가시게. 아무튼 그냥 진행하면 되죠?”
“어, 그게 화면에 매니저 핸드폰이 날아가는 게 잡혀서 포옹하는 장면부터 다시.”
“다시 찍으라고? 하, 진짜 은서리. 그렇게 작작 찍어대더니 도움이 안 돼, 하여튼”
의식이 점차 멀어지는 듯 귀까지 먹먹한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우님 특유의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신나게 욕을 내뱉고 있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고 차에 단둘이 있을 때 외엔 들어보지 못한 욕지거리가 입봉이라도 터진 듯 줄줄 쏟아진다. 아, 안 돼요 배우님! 그 입에 상스러운 언어는 그만……. 머리 비어 보이는 거 티 난단 말이에요.
“으… 어…….”
“야, 쟤 카메라에 안 걸리게 멀리 치워라.”
그러나 나의 간절한 외침은 그들에겐 닿지 않은 모양이다. 대신 열이 나고 벌벌 떨고 있는 내 몸뚱이를 누군가가 질질 끌고 가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나는 예쁘게 단장된 플라타너스 길가 옆으로 치워졌다. 몸을 가누지 못해 옆으로 휘청이며 쓰러졌다. 아, 그래. 나는 배우님을 보고 흥분해서 열이 오른 게 아니라 아픈 거였어. 몸살이 난 거였구나.
뒤늦은 깨달음을 얻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닥에서 올라온 한기로 몸이 추웠다. 눕는 것보단 앉아있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몸을 가눌 수는 없기에 곧 기댈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곧게 솟은 늙은 고목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것도 플라타너스인가. 고갤 들어 찬찬히 살펴볼 여유 따윈 없었기에 몸을 질질 끌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몸을 기대 쉬기로 했다.
“아… 하하하…….”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빗물에 섞여 내가 우는지 안 우는지도 잘 모르겠다. 에이, 몰라. 눈물이 나올 테면 나오라지. 어차피 나 우는 것 따윈 아무도 관심 없고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긴 할까? 이 세계에 저 두 아름다운 남녀가 주인공이라면 나는 조연, 아니, 무수리다. 아니 무수리도 취소. 무수리는 적어도 주인공들 근처에서 알짱거리기라도 했지, 실상 나는 무수리만도 못한 존재였다.
매니저란 자리가 그랬다. 절대 원 샷을 받아서는 안 되는, 아니, 원 샷이 다 뭐야. 카메라에 찍혀서도 안 되는 그림자 같은 자리다.
뭐… 나라고 태생부터 매니저로 타고났겠는가. 애초에 연예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직종에 종사한다면, 적어도 연예계에 남들보다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연예인이라는 거 해봤다. 되게 어릴 때 아역배우 한다고 이리 찔끔, 저리 찔끔 화면에 얼굴 내밀었다. 소속사에서 아이돌도 준비해 보자고 해서 춤 노래 준비했는데, 내가 아이돌로서 완성되는 시간보다 회사가 망하는 게 더 빨랐다. 끝.
그래도 동경한 연예계란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부딪히고 또 부딪혀봤다. 그래봤자 끈 떨어진 연답게, 망한 회사 출신의 연예인 지망생은 보는 오디션마다 다 떨어졌다. 오디션 볼 때마다 깜냥이 안 된다며, 조금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벽에 부딪힐 뿐이었다. 그렇게 지금은 매니저로서 좋게 말하면 맡은 연예인을 돌보고 빛내주는, 나쁘게 말하면 따까리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 정도 했으면 됐어. 포기하자. 아직 이십 대 중반이고 취업하기엔 안 늦었으니까… 무수리도 못 됐으면 그냥 포기하자.
“흐어어엉…….”
하지만 포기가 안 되었다. 모든 게 다 화가 나고 서러워 울음만 북받쳤다. 속에서 천불이 일어 가슴을 두드리며 울었다. 나는 왜 주인공이 아닐까. 아니, 하다못해 지나가는 조연이라도 해봤으면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을 텐데 왜...?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민준이, 수연이도 수고했어”
“저희 종방연 바로 있는 거 아시죠? 정리하시고 바로 모여서 출발하겠습니다!”
멀리 떨어진 숲길로부터 떠들썩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곳만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화기애애하고 평화롭다. 구석에 짐짝처럼 버려진 나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축하고 어둡고 외진 이곳은, 갓 이곳에 버려진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버려져 있었던 듯하다. 개중 내 등을 받쳐주고 있는 고마운 늙은 고목을 어루만졌다. 피차 버려진 사이에 조금 더 기댄다고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정신 좀 차리면 금방 갈 테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 나약한 몸뚱이는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비를 너무 많이 맞은 모양이다. 몸이 물을 먹은 듯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꺼풀도 점차 잠겨들어 사위가 어두워졌다. 아니, 이건 의식이 가라앉는 거다. 잠이 드는 걸까?
모르겠다. 기절이든 기절 잠이든 간에 나는 저체온증으로 의식이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럴 때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을 꺼내 불을 밝혀 몸을 데우고 즐거운 환상을 보았는데, 나는 그럴 성냥이 없다. 등에 맞닿는 늙은 고목의 썩은 나뭇결만 느껴질 뿐.
때문에 나는 성냥이 아닌 젖은 고목만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즐거운 환상 대신 즐거운 꿈이라도 꾸길 바라며 점차 잠에 빠져들었다.
“으으음……. 으헉!”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지레 놀라 깨어났다. 순간 여기가 어디고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 문득 시야를 가득 메운 채 날 쳐다보고 있는 허여멀건한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으악!”
뜨악한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행히 상대가 뒤로 몸을 물린 덕분에 서로 머릴 부딪히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숨이 다 가빴다. 한참을 심호흡하며 숨을 달래고는 겨우 낯선 이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어…”
정작 놀란 건 난데 그쪽이 더 놀랐다는 표정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다.
“괜찮아?”
상대가 너무 놀란 듯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니, 괜찮으냐는 소릴 들어야 할 건 난데 저놈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보고 나니 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애써 물어봐 준 내 배려에 괘씸하게도 아무런 대꾸 없이 물끄러미 마주 볼 뿐이었다. 아니면 혹시 말을 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미안한데.
침묵이 조금 더 길어지자 양심의 가책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이 녀석 진짜 말 못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있는 동안 제 다리에 머릴 벨 수 있게 해줬으니 감사는 표해야겠다. 어떻게 알아듣도록 말을 해야 할까.
“어……. 일단은 고마워. 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텐데. 비도 다 맞고. 어, 어쩌지? 아, 맞다! 차에 가면 마른 수건 있는데 그걸로 옷이라도 좀 말릴래? 더러운 수건 아니고 비상용으로 늘 가지고 다니는 거 있거든. 괜찮으면 같이… 갈래?”
최대한 느릿느릿, 가급적 입 모양이 보이게끔 말을 이었다. 하얗게 빚은 도자기 같은 얼굴이 까맣게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껌벅거리는 걸 가만히 살폈다. 녀석은 내 기대에 부응하듯 느리게 말을 이어가는 내 입술을 조용히 응시했다. 알아들었을까?
그러나 뒤이어 나온 말은 녀석이 말을 못 할 거란 나의 오해를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너, 열이 많이 난다.”
“응? 너 말할 줄 알아?”
“열이 많이 나면 위험하다. 자리에 누워 쉬어야 한다.”
아니 말을 할 줄 아는 건 둘째 치고 이놈 말투가 대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