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언군을 강화로 유배하라.”
성은 결국 은언군을 강화도로 보냈다. 하지만 은언군은 덤덤히 성의 명을 받아들였다. 이미 그의 집과 식솔들은 강화도로 가 짐을 정리 중이었다.
“서둘러~ 내일이면 군마마께서 도착하실 테니.”
유아의 제안이었고, 성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대신들의 반발도 사지 않으면서 은언군이 되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성은 은언군이 가는 길도 보지 않았다. 은언군은 특별히 가마를 타고 강화도로 갔다. 그의 죽은 아들, 구상군이 성의 양자가 되었기에 누리는 특혜였다.
“전하!”
구준은 성을 나무라듯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성은 떳떳했다.
“어찌 그러시오?”
“전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눈 가리고 아웅 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대들의 제안을 받지 않았는가? 은언군은 그 힘겨운 유배를 얼마나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내 마음이 찢어지오. 구상군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아비에게 유배가 말이 되오?”
“조정의 중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예. 영상이야말로, 참으로 충신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여론에 귀 기울여 주세요.”
“사형이 아닌 것이 어딥니까?”
“허!”
성은 주위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 힘겨워졌다. 스스로 창문을 활짝 여니, 후원이 보였다. 성은 아직 중궁전에서 머물고 있었다. 구준은 중궁전의 분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그가 진짜 경계해야 할 사람은 눈앞의 국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향기를 풍기는 왕비가 아닐까.
“전하. 언제까지 중궁전에 머무실 것이옵니까? 이만 대전으로 옮기시지요.”
“난 좋소. 매일 중전과 마주하려 시간을 따로 뺄 필요도 없고. 대전에선 이렇게 후원이 보이지 않잖소.”
“하여 규장각은 아예 후원에 두지 않으셨습니까?”
“그것과는 별개지.”
성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 후원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혹여, 구설에 얽힐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간언 아닌 간언. 바른 소리, 쓴 소리라는 명목 뒤에 숨은 정치적 의도. 그런 구준의 발언에 화사하게 피어나던 성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런 구설이 생기지 않게, 영상부터 중전에 대한 존경심을 좀 가지는 게 어떤가?”
“제가 그러지 않은 날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런가?”
“전하와 마마께는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충심을 다하고 있나이다.”
“고맙소. 이만 물러가보시오.”
“예, 전하.”
구준은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을 걸으며 성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때, 성이 손을 들어올려 구준의 걸음을 멈췄다.
“아, 참! 구명겸이 죽기 전 유서를 썼소. 하여, 조사는 계속 될 것이오. 은밀히. 이 일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것이니. 영상도 각별히 보안에 신경 써 주시오.”
“예?”
성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익 올라가는 입 꼬리는 꽤나 사악해보이기까지 했다.
“아직, 진범이 잡히지 않았소.”
구준도 알고, 성도 아는 진범. 그러나 입 밖에 내는 순간 두더지는 다시 굴속으로 숨어버린다. 누가 꼬리를 숨기고 잡느냐에 달린 싸움. 둘 중 하나의 존폐를 거는 위험한 싸움이었다.
***
유아는 후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근처엔 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의 젊은 관리들은 꽃 미모를 자랑했고, 궁녀들은 괜히 설레어했다. 그런데 유아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규장각을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보다가 시선 거두기를 여러 차례, 유아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설렘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쭈뼛거렸다. 연실도 곧 침이 떨어질 듯 입을 헤~ 벌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꽃 관리들을 바라보다 어디선가 다가오는 싸늘한 기운에 정신을 차렸다. 그곳에서 봉수가 연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상선.”
“김상궁. 신씨가 이를 알면, 참으로 가슴 아파 할 건데?”
“신경 끄시지. 뭔일이야?”
“내가 나타났다는 건 뭐겠어?”
“헉! 마마!”
연실은 아직도 기다리며 몸을 베베 꼬는 유아에게 다가갔다.
“전하께서 오셔요.”
“그래?”
유아는 그 말에 어째 더 설렌 표정을 지어보였다. 볼도 발그레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성이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중전. 여기서 뭐 하시오?”
“예?”
성은 궁녀들이 정신 팔려 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 차창 너머로 보이는 꽃 미모의 관리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창문을 닫으라 해야겠군.”
“규장각으로 가십니까?”
“응. 당신은?”
“전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나 말고. 만날 사람이 있소? 어디? 저기?”
성은 규장각을 가리켰다. 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기대감 가득한 표정. 성은 질투가 났다.
“누구?”
“제 벗들이요.”
“어째 당신은, 나보다도 벗이 많소. 좀! 자제하시오.”
“그래도 가장 절친한 벗은 전하뿐입니다.”
“됐소. 입에 침이나 바르고...”
유아는 성에게 바투 다가가서는 속삭였다.
“어째 나보다도 질투가 많아?”
“마음에 안 들어. 나 말고 친한 사내들이 있다니. 참으로 무정한 여인일세.”
규장각에선, 관리들이 차창 너머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 성과 유아를 발견했다.
“참으로 그림일세.”
“그러게.”
꽃 선비들이 창문가로 모여들자, 궁녀들이 두 손을 모아 그들을 동경했다.
“어머나!...”
유아와 성은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때서? 처소에서 쫓아내지 않는 게 다행이지.”
“허, 참! 내가 왜?”
“당신 잠 안 온다고, 나까지 잠을 못 자잖아. 좀 자게 둘래?”
“당신도 좋아하잖아. 엄청.”
“됐고. 일 하러 가.”
“싫어. 당신이랑 있을래.”
“애처럼 굴 거야?”
“그럼, 맘마 줄 거야?”
“변태.”
“불공평해. 왜 나만 이렇게 안달이나? 당신은 날 보면 흥분이 안 돼?”
유아는 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참아. 이렇게.”
“오~ 그렇단 말이지?”
피식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은 유아는 궁녀들의 모습에 궁금증을 가졌다. 그리고 그제야 창가에 죄다 달라붙어 본인과 성을 쳐다보는 규장각 관리들을 발견했다. 성은 그것도 모르고, 유아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좀! 다 보잖아요. 전하.”
“응?”
성도 그제야 규장각을 보았다. 성이 매서운 눈빛으로 한 번 노려보자, 규장각 관리들은 후다닥 흩어져 일에 다시 집중했다. 성이 창가의 관리를 향해 창문을 닫으라고 손짓을 하자, 관리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창문을 죄다 닫아버렸다.
“여름인데 덥게.”
“당신을 보잖소.”
“뭐, 어때요.”
“안 돼.”
“팔불출이라고 욕해요. 사람들이.”
“칭찬이오.”
“일 보세요.”
“당신은?”
더 말해야겠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진짜?”
유아는 봉수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요즘 많이 한가하신 가 봐요?”
봉수는 성을 규장각 쪽으로 안내했다. 성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유아는 고개를 절래 내저었다. 연실은 유아에게 슬쩍 다가와 말했다.
“저런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 너무 귀엽지 않니?”
그 말에 연실은 똥 밟은 표정을 지었다. 성이 규장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다. 박지원, 박제가 등의 학자들이었다.
“박선생님.”
“중전마마.”
박지원이 가장 먼저 유아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어 박제가와 홍대용이 와서 인사했다.
“저희들은 어찌 찾으셨는지요.”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요. 요즘 공사가 다망해 서신으로만 안부를 전하지 않았습니까?”
“저희야, 하고 싶은 연구 실컷하고 좋지요. 토론도 신나게 하고.”
“다행입니다.”
“마마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아니요. 이건 순전히 전하의 의지입니다. 인재를 찾으셨어요. 전하껜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하니까요. 많이 연구하고, 싸워주세요.”
“황공하옵니다.”
“박선생님은 곧 청국으로 유랑가신다고요?”
“예. 사절단에 끼여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귀한 책들을 볼 수 있겠군요.”
“이번엔 유랑기를 써 볼까 합니다. 소설로요.”
“기대됩니다. 물론, 전하께선 소설을 극도로 싫어하시지만.”
“그것이 살짝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포기할 순 없지요.”
“전 기대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유아가 잠시 미소를 거뒀다.
“아, 한 가지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염려요?”
“혹, 선생님들도 정약용선생처럼, 서학을 공부하십니까?”
“예. 재미삼아...”
“잠시 그 학문은 거리를 두시지요.”
“성리학과 거리가 먼 학문이긴 하지요.”
“학문에서 끝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페데르에게 누누이 일렀는데...”
“페데르는 조선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괜히, 모두가 위험해집니다. 그러니 거리를 두세요. 당분간. 좀 오래.”
“예. 염두에 두겠습니다.”
그날 저녁, 페데르가 은밀히 입궐했다. 매일 그의 일상이 이러했다. 어의들의 시선을 피해, 궐 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성과 유아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페데르는 유아를 진맥했다.
“탕약은 꼭 드십시오.”
“응.”
“몸을 따뜻하게 하셔야합니다.”
“응.”
유아는 페데르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오물 거렸다. 입술을 몇 번이고 옴짝거렸다. 눈치 챈 페데르가 유아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그게... 이 말하면, 네가 또 화를 낼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해야겠어. 난 네가 걱정되니까.”
“박지원선생께 들었습니다. 천주학 말이지요?”
“응.”
“그건 제가 믿고 믿지 않고 할 수 없습니다.”
“알아. 하지만, 숨어서. 여긴 성리학의 나라야. 그런 나라에서 하늘이 주인이고, 만인이 평등하다니. 물론, 전하께선 되게 그런 세상을 꿈꿔서 노비를 없애 자고도 하시지만, 그래도. 응?”
“조심하겠습니다.”
***
“투자해. 인삼에 쏟아 부어.”
우겸은 만영의 상단에 있었다. 만영의 응접실 책상 앞에 앉아 당당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반면, 만영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누가 그래요?”
“전하께서도 팍팍 밀어주실 거라니까?”
“장사 하루 이틀 해요? 인삼은 빨리 무르고 썩어서 쌓아둘 수가 없다고요.”
“홍삼 있잖아.”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 바빠요.”
“당신 같은 거상이 나서지 않으면, 다른 상인들은 움직이지 않아.”
“다른 거상도 많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너니까.”
만영은 머리에서 김이 나는 느낌이었다.
“당신의 그 사람한테 가서 전해요. 장사꾼이 투자를 하려면 그에 걸 맞는 환경이 있어야 판을 깐다고. 지금 내가 뭘 보고 투자를 하라는 거예요? 친분으로 그럴거면, 연 끊고요.”
“거, 사람 참! 원래 이렇게 인정이 없었나?”
“장사 인정으로 했으면, 손가락 빨고 있었어요.”
“독한지고.”
“맞아. 나 독해요. 됐죠?”
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우겸이 만영의 어깨를 잡고 극구 말렸다.
“두소마을 자리는 자네가 가장 먼저 찜 해놓게. 그건 내가 장담하건데, 자네 독점이네.”
“두소마을에 아직 사람도 다 안 들어왔거든요?”
“넣어 줄게.”
“영감!”
“좀 도와 줘~. 내가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어?”
우겸은 두소마을을 근대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아니 분명히 말하자면, 만영을 선두에 세우고 홍보를 할 요량이었다. 만영이 움직인다면, 적어도 육의전 상인들은 움직일 테니까.
“부탁해. 응~?”
***
영목의 집. 영목은 하염없이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어 수가 나타났다.
“영목이 안에 있나?”
“이게 누구야? 대단한 장용대장 아니신가?”
“술맛이 좀 나나?”
“나지! 암! 나고말고. 자!”
영목은 술병을 째로 수에게 내밀었다. 수는 술병을 받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됐어. 기방 술에 익숙해서, 이런 귀한 술은 나랑 안 맞아.”
“사람하곤. 그냥 홍련행수랑 혼례 치러. 홍련누이도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내가 그 여자 이겨먹으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엔 없어. 더 일찍.”
“하하하!...”
참으로 공허하고 텅 빈 웃음이었다.
“그만하고 모레는 입궐해. 전하께서 기다리셔.”
영목은 술병 째로 술을 쏟아 붓고는 꿀꺽 삼켰다.
“자네의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더는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네.”
“그게 무슨 소리야?”
영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술 향기가 숨결을 따라 바닥에 가라앉았다.
“나의 주상전하께선, 그분은... 이제 정말 왕이 되었나보네. 아마 곁에 있는 그 여자가 정말 강하긴 강한 가보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죽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