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성은 쓰러진 유아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궁인들이 그대로 우르르 달려왔다.
“마마!”
“중전마마!!”
성은 갈팡질팡했다. 다행히 판단력은 빨랐고, 유아를 업으려는 내관들의 등마저 거부한 성은 유아를 번쩍 들어올렸다.
“전하. 소인들이-”
“길이나 터라! 어의를 어서 처소로 오라하고!”
“예!”
성의 말에 가장 재빠른 내관이 어의에게 달려갔다. 연실을 비롯한 중궁전 궁인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유아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내려간 체온은 돌아올 줄을 몰랐고, 사경을 헤매는 호흡은 더욱 가빠왔다. 약간의 하열도 있었다. 성이 매일같이 눕는 그 자리에 누운 유아는 희미한 빛을 따라 눈을 떴다. 아직 반은 감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눈앞의 모든 움직임이 마치 깊은 물속을 헤엄치듯 아른거렸다. 목소리도 물속에서 듣는 듯 웅웅 울렸다. 자신을 걱정하며 내려다보는 성의 모습이 보였다. 무어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하... 뭐라 하신 겁니까?’
성의 뒤로 상선 봉수, 연실, 궁녀들, 내관들, 벽인지 사람인지 구분 안 가는 운검까지. 모두들 걱정되는 마음으로 유아를 바라보았다.
‘연실아...’
그리고 어의의 진맥과 치료가 이어졌다. 간간히 페데르의 모습도 보였다.
“부인?”
유아의 눈앞은 다시 캄캄해졌다. 빛 한줄기 보이지 않았다. 깊은 어둠 속에 유아는 갇혀버렸다.
“어찌 된 것이냐?! 중전의 상태가 왜 이 지경인 것이냐?”
성의 칼날 같은 외침에 중궁전의 궁인들은 일제히 바닥에 얼굴을 박고 죄를 청할 뿐이었다. 그저 죽여 달라는 그 말만 되뇌었다.
“어의는 반드시 중궁을 치료해야 할 것이다.”
“저, 전하...”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냐? 죽을병이라도 걸렸느냐?”
“죽여주시옵소서!”
“그 정도로 심각하더냐?”
“중전마마의 당부가 계신지라.”
“어명이다! 당장 고하라. 중궁의 상태가 어떠한가? 대체 왜 이런 것인가?”
어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어명이라 하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을 열자니 이 대화가 분명 대비전으로 갈 것 같았다. 이 순간 어디에 목숨을 걸어야 자신이 살 수 있을 지를 판단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네 이노옴!!!”
“차라리 죽여주소서!”
“어의라는 자가, 감히 내 명을 거역한다? 운검! 칼을 내 놓으라! 내 이놈의 목숨을 이곳에서 거둘 것이다!”
성의 말에 어 수의 검이 쑤욱 튀어나와 성에게 칼을 빼 건넸다. 번쩍거리는 칼이 목 아래에 닿으니 어의는 안절부절못하며 벌벌 떨었다. 성은 궁인들은 물론, 어의들마저 일제히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유아는 저렇게 사경을 헤매는데, 이들은 어째서 무엇을 숨기려는 걸까? 성은 칼을 잡아들고는 유아의 최측근 연실부터 추궁하고 들었다. 칼날의 끝은 연실을 향했다.
“말하라. 중궁의 상태가 왜 저런 것인가?”
“소인이 알 리가 있겠나이까?”
“정녕 모른다?”
“소인은 중전마마의 몸종이옵니다. 명이라면 죽어서라도 지켜야지요.”
“좋다. 너는 중궁의 상태를 알겠지?”
성의 칼날은 페데르에게 향했다. 페데르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내 칼은 중궁전 나인들에게 향했다. 나인들은 움찔했고, 성의 눈빛으로 보아하니 정말 하나 쯤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른다? 감히! 나를 능멸한다 이 말이지? 좋다! 죽여주마.”
성이 칼을 들어 올려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나인들을 위협하여도 연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장 어린 나인 하나가 벌벌 떨며 연실에게 소리쳤다.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마마님께서는 왜 이를 함구하십니까? 어찌하여 정녕 주상전하께서는 모르셔야 하는 일입니까?!”
연실은 어린 나인의 말에 불 같이 화를 냈다.
“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다물지 못할까?”
어린 나인은 연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에게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닥치지 못할까?!”
“중전마마께오서는, 거짓회임이 아니라 유산을 하셨나이다.”
어린 나인의 말에 성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홍귀인, 미령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산이라니. 어의는 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고하라.”
연실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어의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성은 수에게 칼을 넘겨주었다.
“왜 숨겼는가? 어의! 중궁의 상태를 왜 숨긴 것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죽여주소서!”
그때였다. 연실이 입을 열었다.
“어의를 탓하지 마시옵소서. 어의께서는 서둘러 치료를 하십시오.”
연실의 말에 어의가 움직였고, 성은 어이가 없었다. 어의는 성에게 말했다.
“곧 깨어나실 것이옵니다. 추운 곳에 오래 계시어, 기가 많이 허해지셨나이다. 곧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김상궁만 남고, 다들 물러가라.”
성의 말에 연실만 남겨두고 모든 궁인들이 자리를 떴다.
“상선은 남으라.”
유아, 성, 봉수, 연실. 이렇게 네 사람만이 한 방에 있었다. 유아의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몇 분. 성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유아를 지켜보기만 했다.
“김상궁은 사실대로 고하겠는가?”
“중전마마의 허락 없이는 불가하옵니다.”
“내 아내의 일이다. 고하라.”
“차라리, 죽이소서.”
“오늘 죽여 달라는 자들이 많구나. 그 귀한 목숨을 어찌 그리도 험이 다루는 지.”
“왕과 신하에게만 군신의 예가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여인에게도 군신의 예라는 것이 있지요.”
“좋다. 허면, 나는 나의 군신의 예를 찾아보지. 상선.”
“저, 전하...”
“너는 나의 신하다. 나의 수족이다. 헌데, 어찌 나에게서 멀어지려 하느냐?”
봉수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봉수야.”
성은 봉수를 다정히 불렀다. 봉수는 그럴 때마다 두려웠다. ‘봉수야.’하고 부를 때마다 그의 앞은 때론 얼음판이었고, 달궈진 지옥불 앞이었고, 때론 따끔따끔한 바늘이 있기도 했다. 이번은 사방이 꽉 막힌 좁은 방이었다.
“전하. 소신도 참으로 곤란한 것이-”
“중전이 너에게도 당부를 했느냐?”
“어? 어찌 아셨습니까?”
“맞고 싶지?”
“전하~ 상선이옵니다.”
“말하라. 대체 있다가 떠난 아이는 왜 애초에 없다고 한 것이며, 벌써 한 달이 지난 일을 왜 나만 모르는 지. 왜 다들 숨기지 못해 안달들인지. 뭐가 그토록 목숨까지 걸게 만드는지.”
“하...”
“상선 자리가 이제 덜 아쉽지? 그치?”
“전하.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구중(*입)에 올리시옵니까? 막, 서운하려 하옵니다.”
“어허. 나이가 들더니 넉살만 더 늘었구나. 말장난 할 시간 없다. 당장 말하라.”
“그것이...”
봉수는 연실의 눈치를 살폈다. 성은 이를 금방 알아차렸다.
“김상궁.”
“예. 전하.”
“내가 잠저시절(*세손시절) 중전과 혼례를 하던 날, 자네에게 부탁했던 말 기억하느냐?”
“물론이옵니다. 이런 말까지는 미안하여 하지 않으려 했으나, 목숨을 걸어서라도 부디 마마를 지켜 달라 하셨지요.”
“기억하는 군. 또렷이.”
“그럴 필요가 없으셨나이다. 어찌되던 중전마마의 생이 곧, 소인의 생이니까요.”
“그럼, 이제 이것도 기억하게. 나 또한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내 아내를 지킬 거야.”
연실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것은 중전마마께오서 싫어하실 것이옵니다. 지금 그 말씀이 들리는 듯하옵니다. 절대 아니 된다고요.”
“아니. 오늘 알았네. 반드시 그리 해야겠네.”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전하. 불충하게도.”
“허락하겠네. 이만 나가보게.”
연실은 방을 나갔다. 그리고 봉수는 다리가 풀린 듯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전하. 저 여인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찌 더 무서워지는 지, 다리 후들거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김상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나이 탓이겠지. 봉수 너도 많이 늙었어.”
“치. 이게 다 전하를 모시느라 늙은 것 아닙니까? 자그마치 30여년이 다 되어갑니다.”
“해서, 늙은 김에 스무 살이나 어린 주군의 명을 목숨 걸고 어겨보시겠다?”
“소, 소인이 언제 그런 경거망동을 하였습니까? 절대! 기필코 그런 역사가 없나이다.”
“그럼 말해. 왜 다들 저렇게 벌벌 떠는지. 내 여인은 왜 이러고 있는지.”
봉수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금방 진지해졌다.
“대비전입니다.”
“이 일에, 대비가 끼여 있다?”
“예. 아주 긴밀하게. 허나, 은밀하고도 치밀하지요. 아직까지 물증이 나오지 않아 다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데, 중전이 이걸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대비로부터.”
“무슨 말이냐? 나를 지키다니?”
“또한, 중전마마의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지키기 위함이겠지요. 전하. 잠시 잊으신 듯하옵니다. 중전마마께오선 대비전의 외척이라는 것을. 부원군이 어찌 그 자리까지 올랐나이까? 그것이 모두 대비와 외척들의 덕이지요.”
성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분노로 눈은 충혈 되었다. 당장에 죽이고픈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의 손에 운검의 칼이 아직도 있었다면, 어쩌면 그 칼을 들고 당장에 대비의 목을 땄을 지도 몰랐다.
“해서, 덫을 쳤지.”
“박귀인을 참으로 버리실 작정이시옵니까?”
“그 여인이 무슨 죄가 있느냐? 때가 되면 풀어 줘야지.”
***
대비전엔 김씨 일가가 우글우글 했다. 해가 지자 이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아직 중궁이 젊으니, 후사 문제는 언제고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집안을 배반하려 드니, 보복은 철저히 해야지요. 규수 하나만 물색하세요. 난 그 품에서 우리 주상의 후사를 볼 생각이니.”
“후사를 보시게요? 벌써 왕자 둘이 죽었습니다. 그저, 주상의 업보로 후사가 없다 하심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박귀인도 빼 내야-”
“아니. 그러면 내가 골치 아파집니다. 일찍이 후사를 얻어야, 우리 주상도 걱정 없이 살지요.”
***
의금부 옥사. 홀로 옥사에 갇힌 박귀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편상궁이었다.
“귀인마마.”
박귀인은 옥사 문에 매달려 편상궁에게 애원했다.
“날 좀 꺼내주시게. 대비께선 대체 뭘 하고 계시단 말인가?”
“염려 마시옵소서. 곧 기별이 있을 것이옵니다.”
“무슨 기별? 대체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냐고!”
“딱 한마디만 전하라 하시어 왔나이다. 대의를 위해 참고 견디라고요.”
“뭐? 대의? 난 그딴 거 몰라! 당장 꺼내줘!”
“송구하옵니다.”
편상궁은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편상궁! 네 이년! 가지 마! 나 꺼내주고 가라니까?! 야!!!!”
***
미령의 처소.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자 콜록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마마. 물드시옵소서.”
미령의 곁에 있던 상궁이 밤새 미령의 곁을 지키며 수발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영목이 업무를 제쳐두고 처소로 급히 왔다.
“마마.”
“오라버니. 콜록, 콜록!...”
“어의는요?”
“다녀갔습니다.”
“사가에서 지어온 탕약입니다. 이거부터 드세요. 부탁하네.”
영목은 상궁에게 약재 첩 묶음을 건넸다. 상궁이 탕약을 끓이기 위해 자리를 떴다.
“무리를 한다 싶더니만.”
“괜찮습니다. 콜록!...”
“이만하면 되었다. 전하의 곁에 있어도 보고,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아도 보지 않았느냐? 중전마마도 구했으니, 이만 궐을 나가자꾸나.”
“그래도 괜찮을까요?”
“무슨 말이냐?”
“아직... 콜록!... 위험하실 텐데...”
“중전이시다. 난 네가 더 염려되니 그런 말 마라.”
미령의 기침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결국 피를 토해내기에 이르렀다.
“미령아!”
“콜록, 콜록!... 콜록!”
“서둘러 궐을 나갈 차비를 해야겠다. 전하껜 내가 말씀 드리마.”
“오라버니...”
“응?”
“전, 여기서 죽고 싶어요.”
“미령아! 죽다니 누가!”
“전 오라버니의 걱정과 심장을 먹고 살아온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 때문에 타들어간 속이 이젠 남아나질 않으시니, 혹여 주군에 대한 충성도,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어지셨을까 염려됩니다.”
“무슨 소리. 오라비 걱정은 말거라. 모든 것은 너의 의지다.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죄책감 가지지 마.”
“두 분 마마의 비수가 아직... 중궁전으로 향하고 있어요. 마마께서 저더러 벗이 생겨 좋다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분의 벗이 되고 싶어요.”
“미령아... 어찌 너는 매번 미련한 선택만을 하는 것이냐.”
“오라버니... 전하의 가장 큰 고민... 예전의 오라버니와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알겠으니, 그만. 쉬어야 한다. 어떤 것도 염려마라. 네가 원하는 바가 뭔지 알겠으니. 나도 이제 너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시키는 데로 할 것이니, 단 하나도 염려하지 말고 쉬어. 제발.”
미령은 기운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
성은 아침 업무를 마친 후, 수라도 거르고 의금부로 향했다. 박귀인이 있는 곳이었다.
“박귀인.”
“전하! 전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주세요.”
“안다. 허나, 증좌가 모두 너를 향해 있더구나.”
“증좌라니요? 무슨 증좌를 말씀하십니까?”
“듣지 못하였느냐?”
“제가 어찌 감히 중전마마께 그런 짓을 합니까? 성소용은 궐에 들어와 얼굴 본 것이 몇 번인지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입니다. 중전마마께오서 성소용을 얼마나 싸고돌았는데요! 전 억울합니다! 어찌 용종(*왕의 씨)을 죽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누구냐?”
박귀인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꾸밀만한 사람. 그럼에도 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매달린 식솔만 수십, 수백이었다. 만약 사실을 그대로 고한다면, 대비는 분명 이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었다.
“모릅니다...”
“네 이년!”
“정말 모릅니다... 흑...”
성은 박귀인에게 등을 돌렸다.
“증좌가 모두 너를 향해 있다. 이 이상 수사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너와 일을 작당한 모든 외척들을 역모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 알라.”
“전하! 전하!!!”
***
유아가 깨어났다. 하지만 곁에 간호를 하던 사람들은 어찌 된 것인지 한 사람도 없었다. 방문 너머, 연실을 비롯한 궁인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하긴... 애초에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귀인이 된 것부터가 무리였지.”
“가여워 어쩝니까?”
“혜빈이 또 사람 하나 잡겠군.”
“너무 잔인합니다. 어쩜 그러실까요?”
“지아비도 버린 분이야.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지 않겠어?”
유아는 이 대화의 주인공이 홍귀인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연실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방금.”
“어의를 들라 하겠습니다.”
“아니. 나 옷 갈아입을래.”
“이 몸으로 또 어딜요? 안 됩니다.”
“들었어. 홍귀인 상태가 많이 나빠?”
“마마...”
“전하께서도 알고 계셔?”
“그건 저도 잘...”
“전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아 봐. 만나 봬야겠어.”
“그럴 것 없소.”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유아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날 보고 싶었소? 일어나자마자 날 찾을 만큼?”
밝은 미소의 성과는 달리, 유아의 안색은 나빴다.
“어디가 좋지 않소?”
“전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신첩이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오. 중전의 부탁이라면 내 얼마든지.”
“홍귀인의 처소로 가주세요.”
“응?”
유아는 성의 등 뒤에 서 있는 봉수와 눈이 마주쳤다. 봉수는 아직 홍귀인의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도승지께서 티를 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지금 홍귀인의 몸이 많이 좋지 않다 합니다.”
“뭐라?”
“본래 몸이 약한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전하의 곁에 있는 것이 원이었던 사람입니다. 홍귀인의 곁에서 웃어도 주시고, 말동무도 해 주시고, 안아도 주시고요.”
“부인. 그래도-”
“전하. 부탁입니다.”
“어허. 참... 일어나자마자 절 안아 달라 할 줄 알았더니. 엉뚱한 건 여전하오.”
“어서요.”
“알겠소. 명을 받잡겠나이다.”
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하고는 유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이건 양보할 수 없소. 다녀오리다.”
성의 애교에 유아가 시익 웃어보였다. 궁인들은 이 부부의 애정행각이 부러워 몸을 비비 꼬았다.
“나도 빨리 퇴궐해야겠다. 메~롱!”
연실이 궁녀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어우~ 마마님~!”
***
영목은 성을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왔지만, 성은 자리를 비운 뒤였다.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사가에서 보내는 것이 맞다는 판단에서였다. 영목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매번, 누군가를 구하는 것이 맞지 않나 보구나.”
복도 끝에서 봉수가 영목을 향해 걸어왔다.
“도승지영감.”
“상선. 전하께선 어디 계시오?”
“귀인마마와 계시옵니다.”
“정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실 것 같아 왔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영목과 봉수가 미령의 처소에 다다랐을 때, 처소 밖까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영목은 미령의 웃음소리에 흠칫 놀랐다.
“전하께서 저렇게 크게 웃으시는 것은 간만입니다.”
“그렇군요.”
영목도 간만이었다. 동생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것이.
“전하.”
영목은 성의 앞에 섰다. 미령이 환한 미소로 영목을 맞이했다.
“오라버니!”
“마마. 전하께서 계시온데, 호칭을-”
“오라비를 오라비라 하는데, 문제 될 것이 무엇이냐?”
“황송하옵니다, 전하.”
미령은 아주 즐거워보였다. 영목은 미령의 웃음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홍귀인이 이렇게 재미난 여인인 줄 몰랐네.”
“그러셨습니까?”
그런 좋은 하루였다. 행복했고, 즐거웠고, 뿌듯했던 하루였다. 성은 유아의 명령(?)대로 미령과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누다 잠드는 것까지 확인하려 옆에 앉았다.
“내일 보세. 홍귀인.”
“예, 전하. 행복했습니다.”
미령은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성이 곁을 지키고 앉아 있자, 미령이 슬며시 눈을 떠 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이 오질 않는가?”
“그럼요. 주상전하의 용모가 밤에도 빛이 나시는 걸요?”
“사람하곤. 참.”
성은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전하.”
“말씀하시게.”
“이렇게 잘난 분임에도 불구하고, 전하께 딱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랑을 읽는 법을 모르시지요.”
“사랑을 읽는 법이라.”
“세상의 서책은 모두 통달하신 전하시지만, 사랑은 천자문을 뗀 학당 아이들과 별 차이 없으십니다.”
“뭐라? 내가 그 정도라고? 너무 날 곡해하는 것 아닌가?”
“다들 고개 끄덕 할 걸요? 그러니 익히고 익히십시오. 전하의 곁엔 누구보다도 좋은 스승이 항상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중전, 말인가?”
“그분의 실력까지 가시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사람하곤.”
“전하를 이렇게 밤늦도록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잠시라도 다른 여인에게 나누는 건, 정말 위대한 거거든요. 저라면 질투심에 미쳐버렸을 거예요. 행운입니다...”
그리고 미령은 눈을 감았다. 성은 피식 웃었다. 유아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잘 자라. 미령아. 내일보자.”
성은 미령의 이마에 손을 살짝 얹고는 자리를 떴다. 미령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음날, 봄과 여름사이. 햇살이 산을 넘어 조금씩 궐을 비추자, 계절의 꽃들이 저마다 색을 피워냈다. 따스한 기운에 궁인들의 아침이 활기차보였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쨍그랑~!’
방바닥 위로 깨져버린 탕약이 든 사발. 그리고 그 너머엔 미령이 누워있었다. 상궁의 다급한 발걸음. 아침 일찍 중궁전으로 와 유아의 세수를 도와주려 성이 나타났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됩니다.”
“내가 해주고 싶어 그러오.”
“아부하십니까?”
“그럴 리가.”
그때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봉수가 두 사람 앞에 섰다.
“무슨 일이냐?”
성이 아무리 물어도 봉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상선?”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성과 유아는 어리둥절했다. 한편, 미령의 처소로 미친 듯 달려온 사람. 영목이었다.
“미령아! 미령아!!”
미령의 방 안. 어의들의 고개를 땅을 향했다. 절래 내저은 그들의 얼굴은 침울했다.
“미령아!!!”
“숨을 거두셨습니다.”
“안 된다! 안 된다!! 어찌 이렇게 갑자기 간단 말이냐! 오라비를 두고... 미령아... 안 된다...”
영목은 미령을 품에 안았다. 싸늘해진 얼굴을 맞대어도, 손을 잡아 온기를 나누려 해도 나눠지지 않았다. 영목의 뜨거운 눈물이 미령의 볼에 닿았으나, 금방 식어버렸다.
“미령아... 나의 어여쁜 아우야... 어딜 간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