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은 이제 분주한 일을 마무리 중이었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차비를 마친 참이었다. 그때,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중전, 김성희가 동궁전 뜰에 등장했다. 그녀의 등장에 궁인들이 후다닥 길을 만들었고, 허리를 숙였다.
“중전마마 납시셨나이까?”
성희는 도도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동궁전 상궁이 성희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보기 불편한 것이라도 있으신지...?”
“아니. 됐어.”
성희는 자신의 지밀상궁인 편상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편상궁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언제 온다고?”
“반 식경(*약 30분)이면 입궐을 마칠 것이옵니다.”
성희는 눈앞에 펼쳐지는 이 행사가 꽤나 못마땅한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곧 연통을 보내신다 하셨나이다. 아! 저기 옵니다.”
편상궁의 시선이 저만치 닿자,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는 나인이 보였다.
“마마!”
“호들갑!”
“소, 송구하옵니다. 헉... 헉... 도승지영감께오서, 중궁전에서 차비하시면 곧 찾아 뵙겠다 전하라하시옵니다.”
“그 말 뿐이더냐?”
“자세한 이야기는 중궁전에서 하시겠다고 하셨나이다.”
“알았어.”
성희는 휙 돌아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어도, 주위에 있던 궁인들은 성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수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뭐, 그리 대단한 위인 온다고.”
성희는 동궁전 궁인들을 휙 둘러보고는 자리를 떴다. 성희가 잠깐 들리는 그 순간에도 궁인들은 긴장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궁인들은 참았던 뒷담화를 꺼냈다.
“아오~! 심장 터지는 줄.”
“난 오금이 저려서. 약간 젖은 것 같아.”
“여길 왜 와?”
“내 말이!”
“어린 거 티내나?”
“쉿! 입조심! 너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궁인들은 성희가 입궐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위로는 상선과 제조상궁부터 아래로 생각시와 무수리까지. 그 누구도 성희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린 것이 투기는 또 얼마나 심한지, 조금이라도 예쁘거나 홀릴만한 기운이 있는 궁녀는 바로 궐을 나가야 할 정도였다.
성희는 허조대왕에게 가서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전하~아~. 세자의 행동이 너무 굼뜬 것 아닙니까?”
“왜 그러시오?”
“아니, 아침 일찍 채비하여 입궐하라 명했거늘, 방에서 한 시진(*두 시간)이 넘도록 버티고 있었다합니다. 그 자리가 싫은 것인지...”
“어허. 그럴 리가 있소?”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라도 달린 듯 걸음을 옮기질 않는다고 합니다.”
“상선! 상선! 보고하라 하였더니, 어딜 간 게야?”
***
사람들이 거리마다 넘쳐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큰 가마에 쏠렸다. 입궐하는 세자, 청이 타고 있는 가마였다. 사람들은 자릿세까지 내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구경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쏙 하고 나타났다. 어린 성은 어른들 사이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바동거렸다. 한편, 반대쪽에서는 덩치 큰 연실이의 목마를 하고 행차를 지켜보는 유아의 모습이 우뚝 섰다.
“좀만 더 올려봐. 응?”
“어깨 빠지겠다고요!”
“오! 이제 잘 보여. 그대로 있어.”
“다리가 후들거려요.”
“어? 저기 저 사람. 아까 그 사람이네?”
“누구요?”
“아까. 오지랖양반.”
“그 상놈?”
여전히 투덜대는 연실이었다.
그 건너편에 오지랖양반, 성은 우겸의 앞에 섰다. 기대감이 가득 찬 사람들의 얼굴. 성의 눈은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눈이 바빴다. 그가 처음 보는 진짜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이었다. 궐을 나와서도 궐 밖을 나가지 못했던 그였기에 지금 보는 진짜 사람들 사는 세상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연은 점차 성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숙부...”
연에 탄 세자, 청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스스로 그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이었고, 세자가 되지 않아 그나마 자유롭게 살던 그의 삶이 모조리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청이 지나간 곳마다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아니, 궐에 들어가는 분 표정이 왜 저러나?”
“백정 손에 끌려가는 소눈깔 마냥, 눈물이 그렁~그렁 해가지고.”
“죽으러 가나?”
“나라면 얼씨구나 하고 들어가겠다.”
“좀, 비실비실해 보이지 않아?”
“또 죽어 나오는 것 아니여?”
뒤통수에서 수군거리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청의 귓가에 맴돌았다. 청은 두려웠고, 절망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푹 내뱉는 와중, 시선을 끌어당기는 한 곳이 있었다.
“하...”
성은 숙부의 모습에서 아버지 정훈세자를 떠올렸다. 정훈세자는 행차를 할 때면 온 사방의 발을 걷고 백성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좋아했다. 정훈세자는 항상 백성에게 미소를 건넸었다. 청도 조카, 성을 보았다.
“성이?...”
그렇게 조카와 삼촌은 그 길에서 바뀐 운명을 맞이해야했다. 청의 가마가 지나간 자리, 성은 건너편 목마를 타고 있는 유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까 꼬맹이?”
유아는 아까부터 성을 보고 있었다.
“저 양반 참 끈질기네.”
***
지하 동굴의 입구부터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길고 큰 그림자가 점점 불빛을 따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림자가 도착한 곳의 끝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미 원형의 탁자 앞으로 빙 둘러 남자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다들 일찍 모이셨습니다.”
“수장.”
미리 와 있던 남자들은 늦게 도착한 그림자를 향해 일어나 인사했다.
“이제 궐을 오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수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리만큼 불빛이 어두워 그의 수려한 얼굴의 실루엣만이 그를 비추었다.
***
석전놀이로 운종가 상인들도 모두 휴일인 하루였다. 반면, 백씨네 책방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책방에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 눈치도 챌 수 없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책방의 비밀 공간. 그곳에서는 아주 은밀한 일이 벌어졌다. 길고 넓은 책상과 수많은 고서들이 쌓여있는 이 공간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김두준을 노리는 게 좋겠소. 왕비의 오라비이니 우리의 굳은 의지를-”
“아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응?”
비밀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하염없이 책방 문을 두드리는 유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탕탕탕!’
“스승니~임!”
그것이 유아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아챈 사람은 누가 뭐래도 백선생이었다.
“헉! 이를 어째...”
“대장. 왜 그러십니까?”
“아... 그게...”
“왜 그러십니까? 혹, 들킨 겁니까?”
“아니, 내 제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