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저거 팔아버릴거야!”
“워- 워- 진정해!”
하리의 오피스텔 구석에 애물단지 처럼 놓여 있는 양꼬치 굽는 기계.
술이 제법 취한 하리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기계를 팔아버리겠다며 중고거래 어플을 켜자 윤희가 말리고 나섰다.
“수한이가 10주년 선물로 사준거라며! 그걸 왜 팔아?”
“오늘 같은 날에도 바쁘다고 잠수탄 놈인데 이거 끝내자는 신호 아니야?”
“정치부 기자잖아. 요즘 이슈가 많아서 매일 밤 샌다며, 이해 해야지.”
“내가 지 때매 임용까지 봤는데, 이런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하리는 양꼬치 기계의 사진을 정성껏 찍어 중고 어플에 등록했다.
오늘은 하리가 임용고시의 합격소식을 들은 날.
남자친구인 수한이 일 때문에 바빠 연락이 되지 않자, 베스트 프렌드 윤희가 젖먹이 아기를 떼놓고 나와 술판을 벌이는 중이다.
"하긴. 나도 니가 임용을 볼줄은 몰랐다."
“낸들 알았겠니. 정말 한치 앞도 모르겠다.”
한곳에 매여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의 하리가 중국어 교사가 됐다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프리랜서 통번역 일을 하면서 때 되면 훌쩍 가방을 메고 세계 어디든 발길 닿는대로 여행을 떠나는 즉흥적인 여자.
큰 키에 화려한 이목구비, 어디를 가도 시선을 한 눈에 받던 하리는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별명이 백자였다.
성이 백씨인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부가 백도자기 처럼 하얗고 반짝인다며 그렇게 불렸다.
그렇게 새하얀 백자 옆에 항상 소나무 같이 서 있던 남자 수한.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가 연애 만큼은 한 남자와 한 이유는 자유분방한 하리를 감당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따뜻하고 다정하게 기다려 주던 남자, 수한.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12년간 단단하게 유지돼 왔고, 당연히 두 사람은 결혼을 하는 수순이었다.
수한이의 집에서 하리를 탐탁치 않아한다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프리랜서를 백수취급 하는 시월드에 내가 들어가야 할까?"
"수한이네 집안이 좀 그렇다며. 부모님 두 분 다 교수에, 아들까지 최대 언론사 기자가 됐는데... 며느리 자리에 얼마나 기대가 크겠어?"
"그런 집에서 중국어 교사 됐다고 얼씨구 할까? 성에 안찰게 분명해."
어딜가도 빠지지 않는 외모와 학벌에 현지인 뺨치는 중국어 실력의 하리는 프리랜서 통번역일로 만족할만큼 수입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수한의 집에서는 안정적이지 못한 하리의 직업을 인정하지 않았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자신의 조건이 꿀리는 것이 싫었던 하리가 절치부심으로 임용을 준비했고 1년만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수한은 일때문에 연락조차 되지 않는 상황.
게다가 하리가 뿔이 난 것은 오늘 같은 날 수한에게 축하받지 못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우리 못 만난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
“그건 너 임용준비 때문에 바빠서 그런거잖아. 수한이도 그렇고.”
“아무리 바빠도, 엎어지면 코 닿을데 사는데 퇴근하고 얼굴도 안비치는게 말이 돼? 맘 식은 거야. 분명해.”
“12년 연애 했는데, 어떻게 뜨겁기만 하겠니. 나랑 우리 남편을 봐. 이제 그냥 가족이야.”
‘띵동’
그때, 하라의 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수한이야?”
“아니거든! 양꼬치 기계 올린거 이렇게 빨리 연락 왔네? 너무 싸게 올렸나?”
“정말 팔거 아니면 당장 게시글 내려!”
“저거 공간만 차지하고 쓸데도 없는데 그냥 팔아버릴래.”
“너 잘 생각해라, 나중에 후회한다. 응?”
하라는 양꼬치 기계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중국 유학시절부터 즐겨 먹었던 양꼬치.
양꼬치 맛집에서 꼬치를 스무개나 먹으며 매일매일 양꼬치만 먹고 싶다는 하리의 말을 기억했던 수한이 10주년 선물로 선물했던 기계였다.
“윤희야. 너 그거 알아?”
“뭐?”
“10주년 때 말야… 나는 수한이가 프로포즈 할 줄 알았어.”
“……”
“그때 내 나이 서른이었어. 만난지 10주년 이었잖아. 수한이 회사에서 자리도 잘 잡았고 나도 통번역 하면서 내 밥벌이 충분히 했잖아. 10주년 때 기대하라고 하길래, 난 반지라도 준비했나 했지. 그런데 우리집으로 양꼬치 기계가 배달된거야.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몰랐어 난. 그때는 니가 자랑했었잖아.”
“그때 너 결혼준비 한창 할 때잖아. 프로포즈 못받아서 빡친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 그리고 양꼬치 맨날 먹으니 질리더라. 혼자 저기에 고기 굽고 있으면 처량 맞기도 하고.”
“야! 그냥 팔아버려!”
“그게 맞지?”
“니가 판다면 파는거지. 백자를 누가 말려? 하고 싶은대로 다 하리가 삶의 모토 아니었어?”
“오케이. 그럼 판다고 답장한다?”
“고고!”
하리는 구매자에게 답장을 보낸 뒤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
“내가 저거 팔면 그 10만원으로 아기 장난감 사줄게!”
“10만원으로 살 수 있는 거 별로 없다. 인형 옷 하나 사겠네.”
“저 양꼬치 기계가 인형 옷 하나 값어치라고? 씁쓸하네.”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하리, 갑자기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무슨 노래야? 아이돌?”
“엔투오 몰라? 요즘 뜨는 그룹인데.”
“니가 아이돌 노래도 들어?”
“임용 공부하면서 가끔씩 유튜브 찾아봤는데 힐링되더라고.”
“사진 있어? 난 얼빠라서...”
“노래도 다 직접 만들고 특히 내 최애는 춤선이 예술이야. 사진 보여줄게.”
‘띵동’
하리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검색하려는데, 어플 알림음이 울렸다.
“이 사람 양꼬치에 환장했나. 지금 당장 오겠다는데?”
“절대 집은 알려주지마! 세상이 흉흉하니까.”
“우리 집 뒤에 있는 고산공원에서 만나자고 그러네. 근데 저걸 어떻게 들고 나가지...”
‘Trrr- Trrr-’
이번엔 윤희의 핸드폰이 울린다.
“뭐지? 오늘 밤새 놀겠다고 선전포고 했는데… 여보세요? 뭐???”
윤희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리야. 미안한데, 나 가야겠다.”
“아~ 왜~”
“애가 쫄쫄 굶고 있대.”
“유축 해놓고 나왔다며!”
“이 웬수가 모유 젖병에 옮기다가 엎었댄다. 아오… 우리 애 분유는 입에 안대서…”
“에휴. 얼른 가라… 간만에 술이 달다 했더니만...”
“잠깐! 근데 술마시고 젖먹이면 애 취하는거 아닌가 몰라.”
“엄마 닮았으면 간 튼튼할거야.”
"암튼 쏘리. 고시 합격 축하하고, 다음엔 우리집에서 마시자, 응?”
윤희가 급히 집을 나섰다.
텅빈 오피스텔 안을 바라보며 하리는 괜히 더 센치해 졌다.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시고는 양꼬치 기계 앞으로 가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그녀.
“맞아. 행복했지. 내가 스치듯 하는 말 듣고서 기계 구하러 다녔을 모습을 생각하니까 좋았지. 그런데 어딘가에 반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석구석 뒤지고 있던 내 모습은 진짜 불쌍했다.”
하리는 결심한듯 양꼬치 기계를 집어 든다.
꽤 무게가 나가는 기계를 끙끙거리며 들어올리다 생각났다는 듯 방에서 이민가방을 들고 나왔다.
중국 유학을 갔을때 썼던 큰 캐리어 가방이었다.
"같이 먹는 양꼬치가 맛있댔지, 누가 이런 고철덩어리가 필요하대?"
하리는 씩씩거리며 가방에 기계를 옮겨담고 집을 나섰다.
***
야밤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가는 하리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몸에 딱 붙는 레깅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몸집만큼 큰 가방을 끌면서도 모델 워킹하듯 당당히 걸어가는데, 어느누가 쳐다보지 않을 수 있을까.
가방 속에 쇠꼬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리는 양꼬치 기계의 중고거래가 이미 끝났어야 할 12년 간의 연애를 끝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크고 무거운 존재감으로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기계는 몇달 간 써본 적도 없이 방치 돼 있었다.
더는 뜨겁지 않은 연애.
서로 만나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은 채 시간만 흘러보낸 수한과의 연애와 양꼬치 기계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 하리였다.
그런데 공원에 도착했을 때, 하리의 눈 앞에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채 뛰어오는 수한의 모습이 보였다.
윤희가 집으로 가는 길에 수한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 성격에 하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하리에게 잘 하라고 잔소리를 늘어 놓으며 하리가 술김에 양꼬치 기계를 팔아치우고 있으니 찾아가라는 말을 했을 터였다.
"저런 놈이었으니 내가 좋아했지..."
달려오는 수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리는 중얼거렸다.
180이 훌쩍 넘는 키.
선이 굵은 남자다운 외모의 수한은 와이셔츠를 입었을때 가장 매력적이었다.
역삼각형 어깨와 탄탄한 근육이 잘 돋보이기 때문에.
게다가 한다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고 마는 수한의 추진력과 야망은 하리에게는 없는 것이어서 더 끌리기도 했었다.
좋은 집안에서 바르게 자란 남자.
저 사람과 결혼을 하면 행복하게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던 하리는 자유롭게 살겠다는 인생의 모토를 바꾸고 임용고시를 준비할 만큼 그와의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행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였을까?’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하리 앞에 수한이 나타났다.
하리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윤희한테 메일 받았어.”
“메일? 기지배. 머리썼네.”
밤샘 마라톤 회의 중이었던 수한은 핸드폰을 꺼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하리의 연락조차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회의 때 노트북은 켜둘 것이라고 생각한 윤희가 수한에게 메일을 쓴 것이었다.
"나 아버지 쓰러지셨다고 둘러대고 간신히 나왔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 무거운 기계는 왜 여기까지 들고 나왔어?"
"이래저래 둘러대면 나올 수 있었던 거네, 결국은. 우리 한 달 만에 만난거 알아?"
하리는 앙칼지게 쏘아 붙였다.
그런 하리를 보며 어쩔 줄 모르는 수한.
그리고 그들 곁으로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다.
벙거지 모자에 마스크를 써서 최대한 신분을 감추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큰 키에 쭉쭉 뻗은 다리, 귀에 이어팟을 꼽고 리듬을 타며 걷는 걸음걸이가 비범하다.
집에서 전기로 구워먹는 양꼬치 기계를 구하기 위해 몇 달이나 중고거래 어플을 뒤지던 남자.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것보다 집에서 혼밥에 혼술을 즐기는 그에게 양꼬치 기계는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운명처럼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매물이 올라 온 것.
맞은편에 걷고 있는 여자의 큰 가방 안에 든 것이 양꼬치 기계라는 것을 눈치채고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이 중고거래에 얽힌 한 커플의 사연 따위는 알지 못한채 혼자 구워먹을 양꼬치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는 남자.
하지만 하리와 수한은 그것도 모른채 대화를 이어갔다.
공교롭게도 연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남자.
이 세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