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땠어? 너희 노래 너희가 직접 들어본 소감은?”
세 사람의 무반주 쌩목 라이브를 모두 들려준 해미가 음량버튼을 최소로 줄였다.
하나와 송이는 그다지 타격이 없어 보였지만, 시원이는 얼굴색부터가 빨갛게 물든 게 연지곤지를 찍은 새색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오오~ 엄청 못 부르네요. 어디 사는 누구인진 몰라도 음치 가산점을 줘야할 것 같아요.”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사람을 대신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송이가 대표로 목소리를 냈다.
무에코, 무반주의 라이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핸드폰에 자기 노래를 녹음해서 재생해도 아마 이거보단 낫지 않았을까?
“음치 가산점이라. 그거 좋네. 그치만 아마 그런 제도가 있어도 해택은 못 받을 거야.
이 정도면 평균에서 평균 이상 정도는 다들 하는 거니까. 세 사람 다.”
“에~ 이게요? 우리나라 평균이 생각보다 낮네요. 수시컷도 이랬으면 많이들 좋아했을텐데.”
“후훗 그런가? 그치만 공부하는 것만큼 노래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사람은 그만큼 적으니까. 공부에 비하면 평균치가 낮은 게 오히려 정상이지 않을까? 게다가 웬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도 이렇게 자기 노래를 처음 들으면 꽤 충격 받아. 내 노래 실력이 이것 밖에 안되나 하고.”
모니터 화면에 전원을 끈 해미는 빙글 돌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말 안 해도 다들 느꼈던 게 있는 거 같으니, 내 이야기는 여기서 넘어가도록 할게.
바로 연습에 들어가보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빈 페트병 세 개를 일렬로 쭈루룩 정리한 해미가 방금 다 마신 빈 페트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페트병? 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자기 앞에 놓인 페트병을 집어든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간단해. 잘 봐봐.”
혹시 특별한 장치가 있는 건 아닌지 페트병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하나를 보던 해미가 페트병을 입에 물었다.
“콰드드득!”
그와 동시에 구겨지기 시작한 페트병.
2L짜리 페트병을 불과 몇 초 만에 초토화시킨 해미는 구깃구깃 구겨진 패트병을 흔들어보였다.
“어때? 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폐활량 훈련이란 말씀이시죠?”
완전히 압축된 페드병을 보던 시원이 물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선 하나는 이미 페트병과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맞아. 미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하듯이, 난 소리의 기준도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해. 그 시대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소리는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지.
하지만 소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폐활량은 어떤 소리를 만들어도 필요한 재료야. 기본 재료가 부실한 요리는 요리사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명확하지.”
“오오~ 역시 공주님의 비유는 뭔가 느낌이 다르네요. 시원이가 나이 먹으면 공주님 같은 느낌이려나요?”
“나이를 먹다니... 저기 우리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싸늘하게 날아와 꽂히는 송이의 비수에 갑자기 무릎이 시린 해미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나이 들어 보였던 건가?
“콰득! 콰드득!”
두 사람의 대화가 현재 진행형이던 그 때.
흘러가는 대화의 마침표를 대신 찍어주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그와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하는 두 개의 시선.
송이의 일타 쌍피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해미와 시원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에 팍 구기지 못한 페트병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구기고 또 구기고 있는 하나의 모습을.
“좋아. 셋 다 고생했어. 그럼 오늘 마지막 수업을 시작해볼까?”
페트병뿐만 아니라 색색들이 풍선까지 한 아름 굴러다니던 작업실을 말끔하게 정리한 해미가 어디선가 꺼내온 이불 세 장을 바닥에 쭈르륵 깔았다.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던 세 사람은 담소를 멈추고 여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 누워봐.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구경한다는 느낌으로.”
“누워요? 지금요?”
“오오~ 혹시 덮쳐지는 건가요?”
“뭐?!”
색이 다른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나오는 완전히 다른 세 개의 목소리.
그 중 유독 땀샘을 자극하는 송이의 목소리에 뺨을 긁적인 해미는 하나 남아 있던 이불을 마저 펼쳤다.
“아하하...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봐주라. 자기 전에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연습법을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니까.”
“밤하늘을 구경하는 거면~ 벌레들도 날아다니는 건가요?”
“뭐? 벌레? 하하, 그거 재밌는 상상이네. 그래. 뭐 좋을 대로 해.”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고 누운 송이를 바라보던 해미는 하나와 시원이를 번갈아 보았다.
나란히 누운 세 사람의 가슴은 균일하게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럼 그 상태에서 무릎을 굽혀봐.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렇게요?”
“그래. 그 다음엔 여기 이 부분을 아래로 잡아당긴다는 느낌으로 숨을 쉬어 봐.
가슴이 아니라, 배를 부풀린다는 느낌으로.”
하나의 흉부의 가장 아랫단에 손을 올린 해미가 산맥을 타듯 하나의 명치 라인을 타고 갔다.
“아핫! 간지러워요! 간지러워!”
해미의 움직임을 따로 실룩이던 하나의 입가에선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아니라 배를 부풀리는 느낌이라... 뭔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데굴데굴 굴러 자신의 영지를 침범하는 하나를 반대편으로 굴린 시원이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숨을 쉬면 폐가 확장되니까 가슴이 부푸는 게 너무 당연한 거 같은데 말이다.
“과학 시간에 한번쯤 봤을 모형을 떠올려 봐. 횡격막을 아래로 잡아당기면 폐가 팽창하는 폐 모형 말이야.”
“폐 모형...?”
“그래. 본 적 있지?”
“네 확실히 본 적은 있긴 한데...”
해미 언니가 말하는 모형을 떠올린 시원은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셨다.
배를 들어가게 해보려고 힘을 줘본 적은 있어도 나오게 하려고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은데...
“혹시 감이 안 잡히는 게 아니라, 배가 나오는 게 쑥스러워서 그런 건 아닐까?
다른 사람 시선 의식하지 말고 집에 혼자 있다고 생각해 봐.”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린 시원을 내려다보던 해미가 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해미가 느끼기에 시원이의 호흡은 제대로 가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급브레이크를 잡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에헷! 의사 선생님 앞에서도 그렇게 부끄러워 할 거야? 내가 뭐 맨 살을 보이란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린 해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어보였다.
해보라는 듯 방긋 웃어 보이는 해미의 표정에 시원은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시원시원, 벗으면 더 굉장하다고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확실히... 그건 굉장하긴 하지.”
“풉~!!”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듯 누워있던 송이와 하나의 담담한 담소에 진지했던 시원의 호흡은 로켓처럼 발사되어 버렸다.
“뭐...뭐라는 거야?! 지금!”
얼굴을 붉힌 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치만 굉장한 건 굉장한 거잖아? 특히 미드가.”
“음... 확실히... 그건 물건이긴 하지.”
그에 돌아온 너무도 평온한 대답.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달들의 티타임 같은 분위기에 시원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벼... 별로 굉장하지 않거든!! 그리고 그런 이야기 남들 앞에서 하지 말란 말이야!”
“헤에~ 해미 언니가 남이야? 그런 거야?”
“그럼 남이지! 나겠어?! 어?”
그 뒤로 이어진 잠깐의 투닥거림.
“푸훗! 하핫! 하하하하!”
‘친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해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해미는 참지 못한 웃음을 털어내고 있었다.
설마 작업실에서 이런 풍경을 맏이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툭! 투두두둑! 투둑!”
조용한 교실 한켠을 조용히 장식하고 있는 샤프 소리.
평소와 다름없는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원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익숙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끼어들어 잘 들어갔다고 소문이 날까?’ 라고 눈동자에 써있는 하나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봐. 듣고 있으니까.”
“짜잔~!”
무심한 시원의 반응에도 환하게 웃어 보인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카메라? 그건 학교에 왜 가져온 거래?”
하나가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건 그렇게 이상하거나,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카메라로 뭔갈 찍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실제로 중학교 졸업 USB에는 하나가 직접 만든 영상이 들어가기도 했었으니까.
“후후훗, 듣고 놀라지나 마셔! 오늘 이걸로 우리 프로필 영상을 찍을 거라구!”
“프로필 영상?”
“응!”
샤프를 내려놓는 시원의 물음에 하나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방금 말한 ‘우리’의 범위는?”
“응? 뭘 당연한 걸. 나랑 시원이랑 송이! 그리고 해미언니도 가능하면 찍을 생각이야.”
“가능하면 찍을 생각이라니... 그거 그냥 쳐들어가서 카메라 들이밀겠단 소리지? 기자들처럼.”
“응? 아하하하... 그... 그럴지도?”
가늘게 뜬 두 눈으로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시원에 이야기에 시선을 피한 하나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아~ 사이즈 보아하니 내가 말려도 소용없겠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프로필? 난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맴버 구성을 보아하니 대충 답이 나오긴 했다.
학교 단위에서 뭔가를 하는 거라면 저 맴버가 저렇게 묶였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었다.
“우리 뉴튜브 채널에 올릴 프로필 영상을 만들 거야! 아~ 물론 아직 노래도 안 나왔고, 춤 콘티도 못 짰고, 뮤직비디오도 못 찍었으니까 올라가는 건 한~참 뒤가 되겠지만! 미리 찍어둬서 나쁠 건 없잖아?”
“왜 그런 걸 만들어야 하는데.”
“응? 왜라니? 당연히 만들어야지!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모르는 사람한텐 자기소개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
생각보다 타당한 하나의 이야기에 시원은 한 호흡을 삼켰다.
확실히 그건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프로필이야 자기소개서 양식에 순서대로 쭉 기재해서 올리면 되잖아. 왜 그게 영상이여야 하는 건데?”
하나의 주장에 한 수 접은 시원이 방향이 다른 물음을 던졌다.
프로필의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전달방식엔 여전히 물음이 남았다.
“음... 기껏 우리 영상을 봐준 사람들한테, 글자만 띡 써서 던져주는 것보단, 직접 움직이고 말하면서 보여주는 게 더 예의이지 않을까? 우리 채널에 놀러와 준 사람들이면 그만큼 우리한테 관심을 줬다는 소리인데... 그리고 난 글자보다 영상이 더 좋다고!”
“...”
그리고 돌아온 하나의 두 번째 답변.
큼직큼직한 동작까지 선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원은 말없이 공책을 덮었다.
반론의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거 다 만드는 거야?”
“응? 몰라! 그치만 만들고 싶어!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아이돌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잖아!
그리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른다는 거. 조금 쓸쓸할 거 같기도 하고.”
“...”
가볍게 던지는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묵직함에 무겁게 눈을 깜빡인 시원은 하나의 카메라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손 때 묻은 하나의 중고 카메라.
A급매물을 싸게 샀다고 방방 뛰며 자랑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카메라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