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암~ 좋은 아침~”
학교 체육복으로 위아래를 깔맞춤한 하나가 반쯤 감긴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반겨주는 아침을 뚫고 달려온 목에 두르고 온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있었다.
“오오~ 나 혹시 늦은 건가?”
편한 조깅차림에 허리춤에 수통 하나를 차고 나온 송이가 하나의 얼굴에 묻은 눈꼽을 떼어주며 물었다.
세수하는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송이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던 하나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으으응. 아냐. 안 늦었어. 약속 시간 5분 전에 정확히 도착했다고”
“그럼~ 하나하나가 일찍 나온 거란 소리네. 칭찬해. 칭찬해.”
“헤헤~ 칭찬받아 버렸다. 그치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내가 꺼낸 이야기니까. 내가 하자고 해놓고 내가 늦으면 이상하잖아.”
송이가 이런 이른 시간에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
그건 자신이 꺼낸 어떤 이야기 때문이었다.
“오오~ 뭔가 어른스러운 말이네. 팔다리가 막 그렇게 뻐걱거리지만 않았어도 몇 배는 더 멋있었을 거라고.”
진심이 느껴지는 하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송이는 하나의 어깨를 콕 찔렀다.
진심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아픔에 화들짝 놀란 하나는 몸을 최대한 뒤로 빼고 있었다.
“아하하... 그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감당이 안 되더라고.
송이 넌 괜찮은 거야?”
뭉치고 결린 어깨를 꾹꾹 주무른 하나가 목을 쭉쭉 늘리며 물었다.
트레이닝복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하얀 파스는 송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진짜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음... 아마 괜찮진 않지 않을까? 한참 꿈나라에 있을 시간에 여기 나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피곤하다는 소리지? 그거...”
“오~ 그렇게도 말 할 수 있지.”
“몸 어디 아픈데는? 팔다리가 막 쑤신다거나, 어깨가 뭉쳤거나 하는 건 없어?”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송이의 팔등을 주무른 하나가 물었다.
송이가 자신과 똑같은 상태였다면, 틀림없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을텐데,
송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음... 그러고 보니, 배가 좀 아픈 거 같긴 해.”
자신의 팔을 쪼물딱거리는 하나를 잠시 지켜보던 송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구름보다 더 구름처럼 흘러가는 송이의 여유로움에 하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배?”
“응. 나 아직 공복이거든. 어제 저녁도 일찍 먹어서 완전 헝그리 상태야~ 날아가는 벌레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나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한 송이가 자신의 명치에 양 손을 올렸다.
타이머가 울리듯 새어나온 “꼬르륵”소리는 송이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아.. 그... 그렇구나. 그건 또 몰랐네.”
엉덩이에 맞닿아 있던 수통의 물을 꿀꺽꿀꺽 들이키고 있는 송이를 보던 하나가 뒷목을 긁적였다.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마 송이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나 어젠 제법 놀랐었다고. 하나하나.”
2/3 정도 남은 수통을 다시 허리춤에 찬 송이가 어깨에 차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며 이야기했다.
“응? 뭐가?”
“설마 아침밥이랑 잠이랑 교환하는 하나가 잠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구. 만우절인지 3번이나 확인한 거 알아?”
에너지를 다 쓰고 자동으로 꺼진 핸드폰 게임을 종료시킨 송이가 핸드폰을 다시금 암밴드 안에 집어넣었다.
이 모임을 주선한 건 바로 하나였다.
하나랑 시원이랑 셋이 있던 그 방에서 하나가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땐 혹시 만우절인가 싶었었다.
“응. 그게 말이야.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가만히 있으면 안돼?”
“응. 어제 시원이랑 너랑 함께 춤을 추면서 느꼈어. 나 완전 고문관이란 거.”
두 사람과 함께 했던 어제.
체력적으로 보나, 전체적인 습득 속도로 보나, 자신은 세 사람 중 가장 꼴찌였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순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두 사람을 따라갈 수 없었다. 부족했다.
더 앞서가도 모자랄 판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대론 안됐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와의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보려 하고 있었다.
송이한테 의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시원이한테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바다로 가기 위해선 이 앞에 있는 바위들을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래? 이제라도 알고 정신 차렸다니 다행이네. 1000개가 1001개가 되진 않을지도 모르겠어.”
하나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그 때.
하나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응?”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생각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하나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고개를 돌린 자신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모습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라?”
“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보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고양이처럼 눈가를 비비고 있는 하나의 앞에 선 시원이 단정하게 묶은 포니테일을 찰랑였다.
원피스 대신 몸에 착 달라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시원은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일 준비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 그치만 어제 송이가 시원이는 못 나올 거라고...”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단톡방에서 시원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개인톡에서도, 단체톡에서도 1이란 숫자는 사라졌지만, 시원이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대신 어제저녁 늦은 시각에 송이에게 이런 전화가 걸려왔었다.
‘모든 냇물이 같은 바다를 보고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그 말뜻에 숨겨진 의미가 뭔지.
밤이 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그리고...
“뭐... 그럴 것 같았는데, 더 좋은 생각이 났거든.”
깍지 낀 손을 하늘로 쭉 뻗은 시원이 좌우로 몸을 풀었다.
어제 밤에 근육 이완 트레이닝을 한 덕분인지, 알 베긴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원피스랑 맞춰 신었던 신발 덕분에 발바닥이 조금 아릿아릿 거릴 뿐.
차라리 신발을 벗고 맨발로 움직였으면 지금보단 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더 좋은 생각?”
“그래.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게 내 적성이라고.
이렇게 초짜티나게 끝매듭을 맺는 건 내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생긴단 말이야.”
가벼워 보이는 운동화 코로 지면을 콕콕 찍은 시원이 가볍게 허리를 돌렸다.
“그치만 시원이는 네 꿈이 있잖아. 선생님... 되야 하잖아. 여기 할애할 시간은...”
어려서부터 시원이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교대에 가기 위해 시원이가 얼마나 노력해왔고, 노력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시원이의 꿈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원이를 곤란하게 하고 말았다.
나 혼자만의 생각과 나 혼자만의 흥. 그리고 나 혼자만의 꿈에 취해서.
그걸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려버렸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 중 일부를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시원이의 꿈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었을텐데...
“물론! 내 꿈은 내 꿈대로 이룰 거야. 그걸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시선을 피하는 하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시원이 박음질 된 하나의 명찰을 손끝으로 훑었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시원의 목소리에 송이는 소리 없는 감탄을 표하고 있었다.
“에...? 그럼?”
“시간이야. 만들면 되는 거야.
하나에 시간을 쓰면, 다른 곳들에서 시간을 분배하면 되는 거라고.
그래. 맨날 트레이드 되는 네 아침밥처럼.”
“내 아침밥...?”
한 귀에 쏙 들어오는 시원이의 비유에 잠시 멍해졌던 하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 하나의 이마를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짚은 시원은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밀어보였다.
“내 꿈은 반드시 이룰 거야. 그러니까 너도 반드시 네 꿈을 이루란 말이야. 이 민폐쟁이야.”
“...”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무언가에 반걸음 뒤로 물러난 하나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왠진 모르겠는데, 눈앞의 초점이 일렁거리고 흐려지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어제 너희가 말한 루트대로 뛸 거니까. 잘 따라와.
휴식은 중턱에 있는 냇가에서 할 거고, 혹시나 멧돼지랑 마주치면 절대 뛰지 말고 소리 지르지 말기. 이의 없지?”
이슬에 젖어가는 하나의 눈망울에서 시선을 피한 시원이 나무들 사이에 난 작은 산길 쪽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오오~!”
그런 시원의 기합에 돌아온 송이의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
서둘러 눈물을 감추고 있는 하나는 소리 없이 손만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 근데 여기 멧돼지는 안 나올 걸? 곰도 안 나오고.
벌레는 엄청 많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멋지게 손을 들었던 송이가 뒤늦게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여기 이 근방에선 사람 발길이 제일 많이 닿은 등산로 중 한 군데였다.
경사도 완만해서 산이라기보단 동산에 가까웠고.
다른 좋은 곳들 놔두고 그 친구들이 과연 여기까지 놀러올까?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농담이었다고. 농담. 그냥 가볍게 받아 넘기라고.”
“오오...”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는 시원의 대답에 송이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체육복 소매에 얼룩무늬를 그린 하나는 다시금 시원이를 보고 있었다.
“그럼 처음이니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빨리 뛰는 것보다, 꾸준히 뛰는 거랑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정 힘들면 걸어도 되니까.”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턴 시원은 완만하게 이어진 경사로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민폐는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의미를 담기 마련이었다.
설사 악의가 없는 민폐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화가 나고 짜증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화가 나지도,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여기 있는 건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나 자신의 의지였다.
그러니 이건 더 이상 민폐가 아니었다.
‘송이가 그랬었지. 하나한텐 잡아당겨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친구 한 사람도 끌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의 꿈을 끌어 줄 수 있겠어? 안 그래?’
이게 내 꿈을 위한 최선은 아닐지도 몰랐다.
한 시간이라도 더 공부하고, 한 시간이라도 더 자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보고 싶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냇물처럼.
물의 줄기는 더 얇아지고, 행군은 더 고달파질 것이다.
바다는 고사하고 강물조차 만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단 100배 더 나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