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 방송 어땠어요? 재밌었어요?”
그 흔한 조명 하나.
마이크 하나 놓여 있지 않은 컴퓨터 앞.
모니터 위에 고정되어 있는 PC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하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녀의 PC 화면에는 스트리밍을 위한 몇 가지 프로그램들이 실행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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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엄청 재밌었어요. 처음 해보는 게임도 해보고! 퀴즈도 풀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그래! 컵라면도 먹었었죠?! 히힛! 그럼 내일 또 이 시간에 킬 테니까...”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나가던 히나는 조용히 마우스를 움직여 스트리밍 서비스를 종료시켰다.
창밖에서 부서지는 아름다운 달빛은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하나가 마이크 겸 스피커로 쓰고 있던 이어폰은 쓸쓸히 책상 위를 수놓고 있었다.
손 때 묻은 카메라 한 대와 함께.
...
...
...
“내일은 한 분이라도 들어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안녕!”
- - -
“하나야! 일어나! 이러다 학교 늦겠어!”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른거리는 햇살이 거주하던 평화로운 공간.
덜컥 열린 문과 함께 깨져버린 평화에 하나는 본능적으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5분만요. 아침밥 먹을 시간 여기 투자할게요.”
“넌 무슨 아침밥을 하루에 3번씩 투자하니?! 응?! 저녁까지 굶을거야?”
“흐아아~”
따끔한 잔소리와 함께 자신을 덮고 있던 따스함을 강탈당한 하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늦게까지 방송을 했던 탓인지.
오늘따라 더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제 밤에 먹은 컵라면 때문일지도?
“엄마랑 아빠는 빨리 나가봐야 하니까. 혼자 준비하고 학교 가. 다시 이불에 기어들어가면... 알지?”
“아...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엄마의 물음에 하나는 뺨을 긁적였다.
엄마 손에 들린 이불이.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와 베게가 노스텔지아의 손수건처럼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알지? 우리 딸? 엄마는 우리 예쁜 딸이 다시 안 누울 거라고 믿어요?♡”
“아하하... 그럼요. 그럼요. 알고말고요. 제가 누구 딸인데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엄마를 피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난 하나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저 웃음이 의미하는 게 ‘최후통첩’이란 사실을.
그 후에 기다리는 게 산 사람이 울부짖는 생지옥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현관에서 큰 소리로 외친 하나는 도어락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샤워는 진작 포기하고, 머리만 감았는데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버렸다.
단발이라 머리 긴 애들에 비하면 드라이 시간도 긴 편이 아니었는데.
머리 긴 애들은 대체 얼마나 부지런한거람?
“7시 35분. 오늘도 아슬아슬하겠네? 누구누구씨 덕분에 말이야.”
도어락에서 흘러나오던 잠금 알람 소리가 끝나자 익숙한 목소리가 하나를 반겼다.
하나네 집 앞에서 스마트폰 액정을 보고 있는 이 소녀의 이름은 ‘시원’
뭐라도 마려운 사람처럼 발을 구르고 있던 시원은 당장이라도 하나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아하하... 헤헷?!”
“늦은 주제에 그렇게 상큼한 표정 짓지 말아줄래?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지니까.”
머리 위로 별님이라도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나의 머리를 쥐어박은 시원은 하나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으아~ 갑자기 왜 뛰는 거야? 그리고 때려주고 싶다고 말하고 때리는 건 반칙이라고~”
“다 네가 늦어서 그런 거 아니야! 지각하면 오늘 니 돈가스 내가 먹을거니까 그렇게 알아!”
“에에?! 오늘 점심 돈가스야? 아아~ 벌써 배고프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거기로 새는건데?! 아니! 그보다 뛰라고! 좀!!”
등교는 벌써 잊었는지 점심생각을 하며 늘어지는 하나의 볼을 콱 꼬집은 지원은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았다.
바람에 불어온 흙에 반쯤 파묻힌 인도를 달리는 두 소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회색의 도시가 아닌 푸르른 산과 밭.
그리고 멀리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낡은 마을버스 한 대였다.
“하핫! 두 사람 다 야구해도 되겠어. 언제나처럼 멋진 도루였다고!”
정차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정류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 아저씨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을 맞이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먼저 버스에 오른 시원은 그런 기사님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계단 아래 보이는 하나의 모습은 해파리마냥 늘어져 있었다.
“으아~ 숨 차! 난 사무직 채질이라 이런 데 약하다고~”
간신히 버스에 오른 하나가 비틀거리며 뒷좌석으로 다가가며 이야기했다.
하나보다 먼저 버스에 오른 시원은 함께 앉을 수 있는 2인승 의자에 벌써 앉아있었다.
창가자리를 비워둔 채 말이다.
“나는 뭐 사무직 채질이 아니라 뛴 줄 알아?”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을 지나 창가자리에 앉는 하나에게 잔소리를 선물해준 시원은 다시 한 번 스마트폰 시간을 확인했다.
북적거리는 도시와 완전 다른 세상인 이곳엔 도시엔 없는 몇 가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버스 시간을 알려주는 앱이고.
다른 하나는 교통체증이었다.
“난 저녁형 인간이란 말이야. 야행성이라고! 야행성 동물이 아침에 힘든 건 당연한 거란 말이야.”
책가방에서 꺼낸 클리어 파일로 임시 부채를 삼은 하나가 창문을 있는 힘껏 열었다.
기름칠 안 된 창에서 나는 “끼이익!”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아~ 그래? 그래서? 밤 새 뭐했는데?
닭살 돋은 팔등을 열심히 문지른 시원이 하나를 보며 물었다.
“아...음... 비밀!”
“비밀? 왜? 뭐 야한 거라도 찾아 본거야?”
언제나처럼의 질문에 돌아온 언제나처럼의 대답에 시원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아...음... 비밀!”
그리고 거기 돌아온 건 음정도 억양도 완전히 동일한 재방송이었다.
“♪♬♪”
따스한 아침 햇살이 비치는 고내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종소리.
누군가에겐 정겨움과 그리움의 대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공포의 대상인 종이 끝나기 바로 직전 2학년1반이라고 적힌 펫말이 걸려있는 교실의 문이 아주 격하게 진동했다.
“어서와~ 오늘 아침도 알차게 쓰고 왔나보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나와 시원을 바라본 ‘송이’가 손가락으로 파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집에서 출발했을 때 까지만 해도 단정했을 두 사람의 머리는 바람에 날려 완전 부스스하게 변해있었다.
“누구누구씨 덕분이지.”
송이의 옆을 지나 자리에 앉은 시원은 서둘러 책가방을 정리했다.
하나하나 책상 서랍으로 들어가는 교과서들의 수를 보아하니, 그날그날의 수업 교과서를 전부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런 소리해도 매일매일 기다리잖아. 실은 즐기고 있는 거 아니야?”
잘 빠진 시원의 옆구리를 콕 찌른 송이가 눈썹을 들썩였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터치에 흠칫 놀란 시원은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갔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그저 얘네 부모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뿐이라고.”
필통과 파일, 그리고 포스트잇을 차례대로 꺼낸 시원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하는 걸 즐기고 있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으음~ 부모님하고 연락하는 사이? 그 정도면 이제 하나네집 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혹시 도어락 비밀번호도 알고 있는 건?”
“도어락 번호야 당연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슬쩍 찔러보는 송이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한 시원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어락 번호야 알고 있었지만, 그걸 자기 입으로 시인했다가는 2절 3절 계속될 게 분명했다.
“흐음~? 수상한데,”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 그보다! 옆구리 좀 그만 찌를래?! 아프거든?!”
차분한 말투를 이어가던 시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당히 조용조용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합판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찔러대는 송이의 손길은 불편함과 부끄러움의 영역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흐음~ 뭐 아무튼!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한까지 모아다 쓰는 거 아니야? 그러다 연예인들 가슴처럼 되는 수가 있다고.”
옆길로 셌던 주제를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온 송이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2절까지 했다간 이마가 반으로 쪼개질 거란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연예인 가슴처럼 되는 게 뭔데?”
기상천외한 송이의 비유에 주춤거린 시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여자들끼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큰 소리로 그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없는 걸 있는 거처럼 영혼까지 끌어 모으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려. 예민해져 버린다구~”
“...”
어딘가 야리꾸리하게 느껴지는 송이의 이야기에 얼굴을 붉힌 시원은 고개를 도리도리저었다.
여기서 자칫 잘못 반응하면, 나만 음란마귀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었다.
“아~ 나 죽어. 더 이상은 무리야~”
홍조를 띤 시원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뇌하던 그 때.
흐느적거리며 시원의 옆자리에 앉은 하나가 책상에 길게 엎어졌다.
그녀와 함께 축 늘어진 하나의 책가방은 몇날며칠을 굶은 것처럼 홀쭉하니 짝이 없었다.
“에헷~ 하나하나 책가방은 오늘도 다이어트 중이네. 오늘도 필통, 노트, 파일 삼위일체?”
당장이라도 링겔을 맞아야 할 것 같은 하나의 책가방을 콕콕 찔러본 송이가 이번엔 하나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시원과 달리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하나의 옆구리를 한 두 차례 더 찔러 본 송이는 앞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시원이는 매끈매끈, 하나는 푹신푹신. 난 이 감촉이 너무 좋더라. 삑삑이랑 만득이를 번갈아 만지는 기분이랄까?”
“삑삑이...”
“푹신푹신 만득이라니... 그거 칭찬 아니지?”
격하게 저항하는 시원과 달리 찐빵처럼 얼굴만 밍기적거린 하나가 뒤늦게 책가방을 정리했다.
송이의 예상대로 하나의 홀쭉한 가방에서 나온 건 파일 하나와 필통 하나 그리고 공책 한 권이 전부였다.
“야! 너! 왜 수학책만 가져왔어?! 문학책은?”
뭔가 두께가 얇아 보이는 하나의 교과서를 바라본 시원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1교시는 분명 문학이였다.
근데 왜 사물함에서 수학책을 꺼내오느냔 말이다.
“아...! 문학이었어? 수학 아니고? 에헤헷...!”
뒤늦게 시간표를 확인하고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인 하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튼...”
허둥거리며 사물함을 향하는 하나의 모습을 확인한 시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두 사람의 티키타카를 흐믓하게 지켜보던 송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전조에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우...우와악!”
그와 동시에 좁은 교실 안에 울려 퍼지는 우당탕거리는 소리.
20명 남짓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곳에는...
사물함 원정대를 떠났던 하나가 자기 다리에 걸려 요란하게 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