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을 나오면서 재하는 마음을 좀 가라앉혀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들고 있던 교복을 다시 보자 눈이 확 뒤집혔다.
추가 촬영.
‘추가 촬영하고 싶은 것 아니면 오늘은 제대로 하고 나와요!’
송PD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다.
어쩌지?
기껏 세탁까지 해서 교복을 건넸는데 이 꼴로 기어나가면 죽이려고 할 거야!
그리고 재하는 추가 촬영 보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더 싫었다. 송PD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성의를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방법은 하나다. 교복을 구해야 한다.
재하는 뛰기 시작했다.
“문현빈!”
재하는 남자애들 텐트로 뛰어가 문현빈을 찾았다.
“문현빈은 왜?”
텐트에서 나오던 정은성이 물었다.
“문현빈 여기 있어?”
재하는 정은성의 물음에 대답도 안하고 자기 말만 했다.
“아니, 씻으러 갔어."
그러고 보니 텐트가 휑했다.
“우서진은?”
“걔는 이승호랑 아침밥 한다고 그러던데?”
“아!”
있는 놈이 없네.
재하는 초조하게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너!”
정은성이 재하가 들고 있던 교복을 빼앗듯이 가져가 펼쳐들었다.
“교복 왜 이래?”
크림색 블라우스가 구겨지고 여기저기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베이지색 카디건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니 교복이 테러 당한 줄 알겠다.”
재하는 또 자기 일처럼 흥분하는 정은성의 손에서 교복을 거둬와 반으로 접어서 둘둘 말았다.
“누가 그랬어? 여자애들이 그런 거야?”
정은성의 말에 재하는 한 숨을 쉬었다.
“왜 여자애들이 그랬다고 생각해?”
“밟힌 자국이! 남자애 발자국 치고는 작잖아.”
“오!”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자 정은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이렇게 담담해?”
“전혀! 완전 깊이 빡쳐있으니까 신경 꺼!”
재하의 험한 말투에 정은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또 내리꽂은 건 아니지?”
정은성이 오른쪽 무릎을 접어 올렸다가 땅바닥을 발로 차는 시늉을 하자 재하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정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근데 너한테 왜 이러지? 넌 견제 대상도 아닐 텐데.”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짜 순수하게 이해가 안 가서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아니까 더 짜증났다. 하지만 정은성의 의견에 재하도 동의하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여학생 출연자 6명 중에 재하가 더 나은 점이 없었다.
슬프지만 현실을 직시해야지!
일단 외모는 6등, 그것도 그냥 6등이 아니라 5등과의 격차가 꽤 큰 6등이야.
재하의 주관적 기준으로는 김희윤과 강나연이 가장 예뻤다. 근소한 차이로 차해인과 이규진이 뒤를 잇고, 마지막이 이은주였다.
그 다음, 성격을 보면 현재로선 5등 쯤 될 것 같았다. 나쁘거나 이상할 정도는 아니지만 공격당한다 싶으면 바로 되갚는 것이 문제였다. 재하는 최지민을 뒤에서 발로 찬 것과 이은주를 몰아세워 협박했던 것을 떠올리며 5등이란 결론을 내렸다.
또 뭐가 있지?
지력? 경제력? 체력?
어제 마친 중간고사 점수를 기준으로 지력을 평가한다면 재하는 기권하는 게 가장 나았다. 경제력도 변변찮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도 피곤한 걸 보면 저질 체력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후하게 계산해도 평균 5등 이상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의 결심대로 이번에 탈락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재하는 다시 한숨이 나왔다.
괜히 남자애 한 명 때문에 충동적으로 이럴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은주가 한 짓에 화가 나고 무섭기도 했다. 정은성 말대로 자신은 견제할 대상도 아닌데 이러는 걸 보면 앞으로 더 심한 짓을 당 할지도 모른다.
“설마 너한테 뭔가 있다는 것을 애들이 눈치 챈 건가?”
재하는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정은성을 쳐다봤다.
“딱히 예쁘지도 않고, 사람 답답하게 고집만 세고.”
재하는 정은성이 느물느물 웃으며 말하는 꼴이 불쾌했다.
“그리고 사납기도 하고.”
더 듣기도 싫어서 재하는 휙 돌아섰다. 하지만 정은성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고 그래. 무시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질 않아.”
재하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정은성이 재하 앞으로 걸어가 섰다.
“권재하!”
재하는 귀찮다는 티를 내며 정은성을 올려다봤다.
초등학교 때 정은성 별명은 사막여우였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살짝 치켜 올라 간 것이 사막여우랑 몹시 닮았기 때문이다. 키만 더 커졌지 여전히 사막여우를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사막여우가 재하에게 물었다.
“나랑 사귈래?”
재하는 어이가 없었다.
재하는 지금 미션을 할지 말지도 정하지 못했고, 미션을 하고 싶어도 시간 내에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정은성은 보란 듯이 눈앞에서 너무 쉽게 미션을 해버렸다.
이게 날 호구로 아나?
어제 저녁에 몇 마디 오고 갔다고 미션까지 해도 되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
아직도 날 그 때 그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알아. 넌 내가 싫은 거.”
‘나는 니가 싫어.’
바로 어제 재하가 했던 말이었다.
“그래. 맞아.”
기억하면서 왜 그래?
“그러니까 아무리 급해도 이렇게 미션 하지 마.”
재하의 말에 정은성이 묘한 얼굴을 했다.
왜 서글프게 웃고 난리지?
카메라 찍히는 각도야?
재하는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찾았다. 설치된 카메라는 정은성 뒤 쪽에 있었다. 이 위치에선 정은성 얼굴은 나오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2시간 넘게 남았으니까 생각해 보고 대답해줘. 기다릴게.”
정은성이 말을 마치고 강당 쪽으로 사라지자 재하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냥 정은성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다음 라운드로 갈 수 있다. 다음 주에도 김산과 촬영을 하고 웃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쉽고 편한 길이 재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은성이라고!
재하는 그 한 마디에 정신이 돌아왔다.
정은성은 재하에게 폭설과 같았다. 하얗고 예뻐 보이지만 사실은 재앙이었던 존재였다. 지금도 자신을 정신없이 휘저어 놓았다. 아무리 방송 촬영이라지만 그런 정은성과 커플이 되는 것은 영혼을 파는 일처럼 느껴졌다.
혹시 마왕인가?
재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악마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어!
재하는 침착해지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권재하!”
윽!
김산의 목소리였다.
기다리는 우서진과 문현빈은 안 오고 하필 김산이 왔다.
재하는 김산의 목소리만으로 가슴 속 허파가 빵빵해진 느낌이 들었다.
“응?”
재하는 김산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김산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표정은?”
“왜?”
어리둥절해 하는 재하에게 김산이 방금 재하의 표정을 흉내 냈다.
눈과 코를 찡그리고 입술을 오므린 것이 억지로 숨을 참는 얼굴 같았다.
재하도 웃고 말았다.
“너도 웃기지?”
김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다시 드러난 건지, 김산 때문인지 주변이 밝아졌다.
“재하 너랑 있으니까 촬영이 덜 힘들고,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
“에이! 무슨.”
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계속 같이 촬영하면 좋겠어.”
“뭐?”
“안 들려? 계속 같이 촬영하고 싶다잖아! 나도 들리는구만.”
이승호가 재하 뒤에서 김산이 한 말을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깜짝 놀란 재하가 서둘러 뒤돌아보니 이승호와 우서진이 서있었다.
이승호와 우서진이 카레라이스가 담긴 접시를 6개씩 쟁반에 받쳐서 들고 있었다.
“우와! 이거 너희가 한 거야?”
김산이 놀라서 물었다.
“응! 햇반이랑 3분 카레! 숙직실 전자레인지에 돌려 왔다!”
우서진이 대답했다.
“뭐야? 아침밥?”
씻으러 갔던 애들이 우르르 돌아와 감탄을 했다.
“그냥 즉석식품 데워 온 거야!”
이승호의 말에 아이들이 그게 어디냐면서 추켜세웠다.
“설거지는 각자 하기다!”
우서진이 단호하게 이야기 하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결국은 미션을 해야만 하는 건가?
‘계속 같이 촬영하면 좋겠어.'
다음 라운드에서도 계속 너를 보려면 다른 애한테 고백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너를 보기 위해서 다른 애한테 마음에도 없는 고백을 하는 게 나는 완전 양아치 같아.
나중에 니가 이런 나를 알게 되도 지금처럼 웃어줄까?
하지만 다들 그러니까.
다들 진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살아남으려고 고백하잖아!
어차피 이건 그런 방송이야!
재하는 그래서 이 방송이 싫었던 거면서 지금은 그런 방송을 핑계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리고 서둘러 문현빈에게 갔다.
문현빈은 자신을 찾아 온 재하를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 필요해?”
재하의 대답을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에 묘한 흥분감이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