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어느 화창한 봄밤
[지리산 삼신봉 청학동]
건우가 서울의 화려한 네온싸인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무렵,
깊은 산골짝 어딘 가에서 두 주먹을 불끈 지며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무이, 쪼매만 더 고생하시소.
소녀 반드시 꿈을 이루고 금의환향할 것 잉께요.”
그녀의 이름은 황인.
많은 것들이 문명화되어 변해버린 청학동에서도
아직까지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도인촌의
가장 오래된 양반 가문인 황씨 가문의 둘째 여식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 전쟁 이후 쇠락해저만 가는
조선의 유교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이 마을에 숨어든 양반들의 우두머리 황 도전씨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의지가 굳건하다 하더라도
흘러가는 세월과 문명의 힘은 거스르기 힘들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마을이 강제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여러 미디어에 노출이 되었고,
전라도청의 수많은 경제적 지원아래 대다수의 양반들이
두루마기와 한복을 벗고 댕기를 잘라내며 현대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황 도전씨와 그의 자손들,
그리고 몇몇 인척 가문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혜택을 거절하고 오히려 더 깊은 숲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 청학동 내에서도 도인촌이라는
작은 촌락을 만들어 계속해서 전통을 고수해 나갔다.
올해 17살이 된 황인과 그녀의 어린 형제들은
하나 같이 댕기 머리에 한복을 입고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인 도인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낮에는 부모를 따라 산을 타며 약초를 캐고
밤에는 서당에 모여 한문과 한글, 그리고 성리학을 배워온 그녀와 어린 동생들은
호적에도 올려지지 않아 세상에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황인에게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미지의 세계였었다.
공부에 매진하는 큰 오빠나 아직 어린 동생들은
아직 마을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와 본 적이 없지만,
올해 초부터 부쩍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따라
약초를 팔러 일주일에 한번씩 하동 5일장에 나오게 된 황 인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별천지로 보였다.
그리고 정확히 팔 개월 전,
황인은 눈이 어둡고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따라
하동시장에 나가 약초를 팔던 중 희한한 광경에 매료되고 만 것이었다.
그 음율은 그간 간간히 들었던 구성지고 신명나는 트롯의 그것은 분명 아니었다.
“저것이 시방 뭐 시여?”
시장 상설 무대 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티비 속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등장했다.
왠 무당처럼 화려한 천대기를 온몸에 두르고
호방하게 미소 짓는 사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클로즈업되더니
단체로 솜사탕을 한트럭이라도 먹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래는 정말이지 그 미소만큼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보여주는 신명나는 몸 동작은
작은 그녀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무려 방탕 소년들이란다.
“을매나 방탕하게 살았시믄 이름이 방탕 소년들이랴?
그랴도 노래는 허벌나게 좋구먼…”
그때부터 였다.
황인이 방탕 소년들의 노래와 춤에 빠지게 된 것은.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시장에 올 때마다 그들의 노래를 몰래 외우고 받아 적었다.
심지어 감자며 고구마를 캘 때도 쉼 없이 흥얼거렸다.
그들의 춤사위도 그랬다.
어두운 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숲 속 공터로 가 몇 시간씩
달빛아래에서 그들의 노래를 부르며 동작을 따라해보곤 했다.
오늘도 눈이 어두운 할매가 단골인 도매상 상인들과 약초 값을 놓고
길고 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황인은 맘 놓고 그들이 나오는 티비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오늘은 새로운 동작을 몇 개 더 외워 갈 심산이었다.
그때였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한 남자가 그녀에게 슬그머니 접근했다.
“너도 아이돌 해보고 싶어?”
“야? 시방 뭐라꼬예?”
“아이구, 사내자식이 곱게도 생겼다. 머리가 치렁치렁 길어서 그런가?”
‘사내자….식?’
그렇다. 반가의 여식인 자신이 혹여 욕이라도 보일까
바깥 외출시마다 늘 사내 한복을 입히는
엄니 덕에 어딜가도 사람들은 그녀를 남자로 오해하곤 했다.
게다가 늘 산나물이며 약초만 먹고 자란 탓에 아직 더디기만 한 발육도
그녀를 남자애로 보이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우와, 옷 차림새 좀 봐. 너, 여기 어디서 행사 뛰냐?”
“야? 뭐라꼬예?”
“너 여기 어디 행사 뛰러 왔냐고? 인삼 도령, 뭐 그런거?”
황인이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남자를 보자,
남자가 우스꽝스러운 썬글라스를 벗어보이며 말했다.
“나야, 나. 이제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자신을 향해 능청스럽게 눈을 번갈아가며 감아대는
능글맞은 눈깔을 보니 절로 기분이 나빠진 황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예. 실례지만 저 아십니꺼?”
황인이 자신을 못알아보자 짐짓 기분이
나빠진 남자가 조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야, 너 팔도 노래 자랑 몰라? 내가 그 유명한 신 수민이잖아!”
“……………………………..”
정말 1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순진하게 눈만 껌뻑거리는 황인의 반응에
그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야, 내가 그놈의 스포츠 도박 때 매 인생이 폭망해서
이제 전국을 떠도는 신세지만,
왕년에는 앨범만 냈다 하면 1위는 따 논 당상이었어…
그니까 임마! 내가 바로 그 가수 신. 수. 민 !”
황인은 논어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이 갸여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아….아… 죄송혀요, 지가 눈이 당최 어두워서 한번에 몰라뵀어라.
아저씨 허벌라게 유맹한 사람 아잉교.”
황인이 능청스럽게 웃어보이자 기분이 조금 풀어진 수민이 말했다
.
“짜식이.. 이제야 알아보고…
너 눈 나쁘면 안경을 써. 렌즈를 끼던가, 임마”
“근디…..아저씨. 지한테 뭐 할 말 있어라?”
“와…너 사투리 진짜 쩐다. 경상도야? 아님 전라도야? “
“여는 지리산 하동 잉께, 두 개를 섞어 쓰지라.”
“진짜? 그럼 너 2개 국어 아니, 사투리 마스터 한 거네?
야, 이거 천재네, 천재. 개인기는 문제없겠는데?”
황인은 점점 실없이 농담 따먹기를 하는 이 늙은 아저씨가 귀찮아지고 있었다.
그와 쓸 때 없는 말을 섞느라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방탕 소년들의 영상도 끝나버린 터라
영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라믄, 지는 이제 갈라요, 안녕히….”
황인이 돌아서자 신수민이 황급히 그를 막아 서며 말했다.
“야, 너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냐? “
“예? 지가요?”
“그건 됐고, 너 아이돌 한번 안 해볼래?”
“야? 아이.. 아이 뭐요?"
“저기 티비에 나오는 그런 가수 말이야.”
“예에??? 저런 가수요?”
황인은 이 인간이 멀쩡하게 생겨서 맛이 갔구나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 서야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가수를 하라니.
자신이 노래가락을 한번 뽑길 했나 거나하게 한판 춤사리를 보여주길 했나?
살짝 맛이 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그녀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황급히 뒤돌아 섰다.
“보아하니 팬 인 거 같던데. 방탕 소년들. 만나게 해줄까?”
그의 한 마디는 황인의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시켰다.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선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되 내였다.
‘뭐라고? 시방 저 아제가 ‘방탕 소년들’을 안다고?’
신 수민이라는 가수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방탕 소년들은 아이돌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황인은 당최 아이돌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는 없었지만
괜히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알은 채를 했다.
그는 자신이 방탕 소년들을 키운 장본인이자
회사의 대표 가수이자 프로듀서였는데,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오해를 받아
지금은 이런 신세가 된 거라는 자질구레한 설명도 덧붙였다.
장황한 자기 자랑과 함께 (황인은 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지만)
수민은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내 주었다.
명함에는 ‘신세계 레코드 신수민 PD” 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겠지?”
황인은 다시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떡였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이거다! 하고 느낌이 딱 왔어.
너는 천상 아이돌상이거든.”
“예?”
“내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저 방탕 소년들도 다 내가 전국을 돌며 발굴했잖아.”
“아…예… 근디 지는 노래를 잘 할 줄 모르는…?”
“아, 이 자식이 내가 한 말을 똥꾸멍으로 들었나.”
“예? 똥꾸녕이요?”
“내가 누구냐? 전설의 프로듀서 신.수.민.
걱정마라. 누런 오리도 황금 백조로 만드는 게 바로 나니까.”
“그르니께, 슨상님이 싹~ 다 갈쳐 분다, 맞죠잉?”
“그래. 너는 무슨 얼굴은 뉴욕 거리에서 스타벅스만 존나 처먹다 온 애처럼 세련되게 생겨서
진짜 말투는 청국장 스럽다.”
“예? 뉴…스타…뭐요?”
“뭐, 이중적인 매력이라고 해주지.
걱정 마, 대한민국 최고 미남 배우 원반도 강원도 산골 출신인데 뭐.”
“그니께.. 저를 남자.. 가수로…맹글어 주신단…”
“그럼 니가 남자 가수지, 여자 가수냐?”
황인은 조용히 머리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서울 서 온 덜 떨어진 음악선생은
자신을 남자로 굳게 믿고 있음이 틀림이 없었다.
사실 아직 미성년자인데다,
어머니가 자신과 동생들을 아직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여자임을 증명할 기록은 없었다.
불현듯 이 것은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무대 속 화려한 그들처럼 솜사탕 같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남자라고 오해를 좀 받으면 어떠한가.
저런 멋진 노래와 춤을 맘 것 배워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별세계로 화려하게 날아보고 싶은 욕망이 황인의 마음속에 가득찼다.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냐?”
“지는…. 황….진이여라.”
“뭐? 황진이? 그 기생 황진이?”
“기생이라니요! 저는 대대로 양반 가문인 장수 황씨 가문의
맏 아들이랑께요?”
자신의 본 명인 황 인이 아닌,
큰 오빠 황 진의 이름을 대신 말하는 그녀의 가슴은
마치 천둥이라도 친 것 처럼 쿵닥쿵닥 뛰었다.
자신의 형제들 중 유일하게 호적에 신고된 사람은 2살 터울의
올해 막 19살이 된 진이 오라버니뿐이었다.
“아…그래? 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곱상한 니 얼굴하고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가명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겠어.”
“야? 야….”
그녀는 신수민이 자신의 콩닥대는 심장소리를 혹여 듣기라도 할 까봐
손으로 가슴께를 감싸며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이는 몇 살? 어려 보이는 데…
미성년자랑 계약을 하려면 일단 부모님부터 만나 뵈야 지?”
부모님을 만난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 황인이 손을 황급히 내저으며 말했다.
“지가..올해 열..아홉…인디.
올 해로 성인이 되었응께 부모님 허락 뭐 그런 거 아무 필요 없지라.”
“와.. 너 동안이구나? 아니.. 애 한테 동안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암튼, 잘 되었다. 그럼 나랑 지금 당장 서울 가자.”
“서울이요?!”
“그래. 여기서 인삼 도령 이런 거 하지 말고, 지금 당장 갈 곳이 있어.”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무대에서는
다시 방탕 소년들의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인은 마치 마법에라도 홀린 듯 단단히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선상님… 아침 7시꺼정 저 무대 앞으로 나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