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어느 화창한 봄날.
서울 강남구 한빛 고등학교.
"한빛의 학우 여러분 오늘은 햇살이 따사로운 4월의 첫 째 날입니다.
교정 가득 향기로운 벚꽃향이 가득한데요,
그래서 오늘의 첫 곡은 이 곡으로 선곡해 보았습니다.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모두들 행복한 봄날 되세요~"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몇일전부터 심한 미세먼지 때문에 기관지에 염증이 생긴 탓에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다녔었는데,
하늘에 흩날리는 벚꽃들을 보며 건우는 용기를 내어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답답했던 마음을 뻥 뚤어줄 것 처럼 선선한 공기가
가슴으로 한가득 들어왔다.
"휴우.."
그 때였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 커지고 사람들의 숨죽인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마스크에 가려져 좀 처럼 보기 힘들었던 건우의 작고 하얀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와...진짜 잘생겼다..'
'저 뒤에 후광 보여? 장난 아니지..?'
'나 어제 보영이가 sns에 건우 과학실에서 잠든 사진 찍은거 올린거 봤는데, 진짜 예술이더라.'
'저 콧날 좀 봐....'
'그냥 비현실적이다..."
건우의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건우가 바로 마스크를 다시 쓰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걸걸하고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지긋지긋한 기집애들아! 사진 그만 좀 찍어!"
건우도 마스크도 벗고 숨도 좀 쉬어 보자!
하여간 극성들은...."
건우의 가장 친한 친구 남국이었다.
남국은 학교 선도부장으로 언제나 건우의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그가 눈을 뱁새처럼 찢으며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쏘아보자
여자얘들이 마지못해 핸드폰을 내렸다.
남국이 건우의 묵직한 가방을 뺏으며 말했다.
"또 바로 연습 가냐?"
"아니, 오늘은 안가. 나 어제 기계체조 하다가 손목을 좀 다쳤거든."
"또?"
남국은 건우의 붕대를 두껍게 감은 왼쪽 손목을 보며 한 숨을 쉬었다.
"진짜 힘들겠다. 아이돌이 뭔지, 아주 사람을 잡네, 잡어."
그러자 건우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춤에는 영 소질이 없나봐, 열심히 하긴 하는데, 몸이 잘 따라주질 않아.
그나저나, 너 저번에 화학 노트필기한 거 나 좀 보여주라,
나 저번에 화보 찍는다고 중간에 수업째서 이해가 잘 안가."
"새끼, 아이돌 한다면서 공부는 왜 또 그렇게 죽어라 하는데?"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데뷔조에 든다는 확신도 아직 없고...
만일 데뷔 못하면 대학이라도 가야 취직을 할 것 아냐."
그러자 남국이 어의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같이 잘 생긴 놈이 데뷔를 못하면 이 대한민국에 아이돌 할 수 있는 놈 아무도 없겠다.
뭐, 헤이븐 사장 아들 정도되야 가능할까? 그 정도는 되야 네 라이벌 아니겠냐?"
그러나 건우는 남국의 말에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니가 현실을 모르는 구나.. 나처럼 생긴 애들은 대한민국에 쎄고 쌨어.
됐고, 있다가 야자 끝나고 우리 오랜만에 거기 가자."
남국이 또 시작이다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건우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용기가 필요하거든."
한빛고등학교 2-3반은 '배건우 보유반' 으로 전교에서 가장 유명했다.
그 만큼 쉬는 시간만 되면 건우를 보러 오는 학생들로 늘 인산인해였다.
건우는 한빛고 입학 첫날 부터 유명했는 데,
그 이유는 당연히 그의 잘생기다 못해 비현실적인 외모 덕분이었다.
절대로 동양인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여러가지 조합이 적절히 섞인
그의 눈,코,입은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외국인이라는 루머도 돌았으나,
건우의 강한 부인으로 일단락 되었었다.
건우의 뛰어난 외모는 몇몇 동급생 여자에들의 SNS로 인해 더욱 유명해져
지금은 한빛고 주변에 있는 여학교 학생들도 건우를 보기 위해
교문앞에 서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건우가 당연히 연예인으로 길을 가리라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입소문 듣고 건우를 찾아오는 여러 기획사의 매니져들 때문에
학교 수위 아저씨가 노이로제에 걸린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한빛고는 다른 일반고가 아닌 자사고로
대한민국 성적 상위 10프로 안에 드는 학생들만 오는
명문고등학교였기때문에, 몇몇 아이들은 건우가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남아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우는 한빛고의 영재들 중에서도 100%
수학 장학금을 받고 있는 최고 수준의 학생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17년 8월 2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된 어느 날,
대한민국의 가장 큰 기획사인 헤이븐의 김영웅 사장이 새파란 밴틀리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들의 깨알같던 희망은 저 멀리 훨훨 날아가 버린 것이다.
헤이븐 사장의 삼고초려 끝에 배건우는 연습생이 되었다.
몇 번이나 거절을 하던 건우가 왜 돌연 마음을 바꾸었는지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헤이븐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획사에 그 흔한 오디션 한번 없이 무임승차하게 된
건우의 결정은 누가 보기에도 당연했다.
헤이븐의 소속 연습생이 된 이후부터 건우는 각종 패션 매거진의 화보 모델로 등장했다.
아직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한국 모델로 발탁이 되어
강남역 한 복판 대형 광고판에 얼굴이 실렸을 때는 온 학교가 들썩였다.
그의 대형 광고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것이 교내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런 건우가 데뷔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지구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작 건우 자신 외에는.
건우와 남국이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곤 하는 남산은 오늘 저녁도 데이트하는 커플들로 가득했다.
건우는 익숙한 듯 주변을 쓰윽 둘러보더니 남산 도서관 뒷편의 개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먼저 던저진 가방에 먼지를 털고 있는데, 뒤 따라 낑낑대며 개구멍을 통과한 남국이 말했다.
"왜? 무슨 고민인데?"
건우는 남국의 말에 대답도 않고 거친 산길을 올라갔다.
15분 가량 말없이 산을 타고 올라가자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두 명이 겨우 낑겨 앉을 만한 장소가 보였다.
먼저 자리에 앉은 건우는 말 없이 서울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남국이 숨을 헐떡대며 도착했다.
"야, 좀 같이 가지. 싸가지..."
남국은 조용히 웃는 건우를 보며 짓궂게 웃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이거나 마셔!"
"뭔데?"
받아들고 보니 맥주캔이었다.
"미친 놈."
"역시, 난 완벽해. 이거 봐봐 안주도 가져왔어 "
남국은 가방에서 부시럭대며 소세지, 핫바, 오징어등을 꺼내들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안주의 행렬을 보며 건우가 헛웃음을 짓자, 남국이 말했다.
"내가 딴 건 몰라도, 네 배는 절대 안비게 해줄께."
"참 눈물 겨운 우정이다."
밝게 빛나는 서울 야경을 보며 둘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남국이 말했다.
"오늘은 무슨 용기가 필요한데?"
"아, 그거..."
건우는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꽉 쥐고 큰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일전에 왜 아이돌 하려고 하는 지 말 했었지?"
"그래. 네 친 엄마를 찾아야 한다고?"
"응... 서우가 나으려면 그 여자가 꼭 필요해.
그러려면 유명해져야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놈의 데뷔가 자꾸 늦어지네."
"너무 성급하게 마음먹지 마라.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최선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뭘 어떻게 더 해보려고 그래?"
"너... 서바이벌 아이돌 배틀이라고 들어봤어?"
"아, 그 mbs 방송국에서 한다는 그 대형 오디션 프로?"
"응."
"당연히 들어봤지..
난다긴다 하는 아이돌 연습생들이 총 출동한다고 떠들석 하잖아.
너 혹시... 거기에 나가 보려고?!"
"그래,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릴 수 만은 없어.
데뷔의 기회가 나한테 오지 않으면 내가 잡으러 가야지."
"야, 너 배건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련히..."
"조금만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래. 서우가 시간이 얼마 없다고! "
"하지만 헤이븐 같은 대형 기획사가 그런 오디션 프로에 널 내보내 줄리가 없잖아!"
"상관없어. 먼저 약속을 어긴건 그쪽이니까.
그리고 그 여자.
이 나라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적어도 티비는 보겠지, 안그래?"
"그래... mbs면 한국 최대 방송사니까.."
남국은 건우의 지친 어깨를 말없이 보다가 그가 응시하는 밤 하늘을 함께 올려다 보았다.
사실 건우는 그가 4살이던 시절 그와 쌍둥이 여동생 서우를 매몰차게 버리고 떠나간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 딸로 태어난 그녀는 철 없던 20살 시절, 이태원 클럽에서 만난 주한 미군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3개월여의 불꽃같은 연애 후 덜컥 임신을 하게 된 그녀가
사실을 채 알리기도 전에 남자는 미국으로 잠적해 버렸다.
결국 절망감에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그녀는 미혼모가 되어야만 했다.
다니던 대학에서도 임신 사실을 들켜 퇴학당하고 집안의 수치가 되어 골방에 갇혀지내던 그녀는
결국, 쌍둥이인 건우와 서우를 낳고는 3년을 내리 앓아 누웠다고 한다.
결국, 누구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했던 아이들이 가여웠던 그녀의 5살 터울 언니가 둘을 입양했고,
건우와 서우는 이모와 이모부를 엄마 아빠라 부르며 자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모가 몇 년 뒤, 고생 끝에 낳은 아들인 재훈이 태어나고부터 둘은 다시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눈에 보이는 이모부의 차별과 냉대 속에 쌍둥이들은 서로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빨리 성인이 되어 이 집안에서의 독립을 꿈꾸던 쌍둥이는 열심히 공부해 강남 최고의 명문고인 한빛고에 나란히
입학허가를 받았었다.
둘 다 100프로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되었다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12월 크리스마스가 지날 무렵부터 잦은 코피를 쏟던 서우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온 갖 항암치료를 견뎌내고는 있지만, 서우의 유일한 희망은 골수이식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건우는 8가지 DNA 중 하나가 맞지 않아 이식 대상자에서 탈락되었고,
이름 모를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으니 남은 희망은 14년전 그들을 버리고 사라진 엄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을 길은 건우가 유명해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mbs 서바이벌 아이돌 배틀'
건우는 그 곳에 나가 데뷔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유명해지는 길은 최정상 인기의 아이돌 그룹 멤버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최대한 빨리 유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녀를 찾아 불쌍한 동생의 목숨을 살려야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