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이었다.
테라스가 붙어 있으니 마주 칠려면 마주 칠수는 있다. 그런데 생각 못했다.
테라스 사이엔 그저 야트막한 벽과 화초 조금 뿐인데
그마저도 물 주는 걸 잊어 화초들은 죽은지 오래라 - .. 원래 옆집은 사무실이었다 보니 아무도 테라스를
쓰지 않아서 몰랐다. 이렇게 가까이 보일줄은
하임은 씻은 듯 머리가 촉촉히 젖어있다. 린넨 셔츠에다 짧은 반바지 차림.
새삼 느끼는 건데 린넨이 참 잘 어울린다.
지혁은 이따윗 생각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번잡스러워 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란거지?
자신에게 반문하며.. 한심해진다.
"대답도 안하네.. 뭐해요?"
지혁은 귀찮다는듯이 고개를 도리질 한다. 하루만에 참으로 친해졌군
비처럼 스미는거 같다. 이 여자는 마치..
어느새 젖었네 가 아니라- 어느새 번졌네 가 아니라
그냥 맞는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런 여자.
한여름 소낙비처럼
"머리 또 다 안 말렸군 감기에 걸리면 당신은 정말 그땐 내 변호사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하임은 찡그리며 말을 잇는다
"여름에 더운 드라이기 바람 너무 싫은걸요 뭐- 기껏 씻었는데 목에서 땀나고 등에서 땀나고-"
하임의 옆 머리가 젖어있다. 흰 얼굴에 살짝 붙어 바람에 나부끼는 갈빛머리-
조명 탓인가 아니면 달이 오늘은 환한 탓인가 얼굴이 하얗다 . 원래도 흰 편이지만..
지혁은 자신답지 않게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
"그래도 말려야지- 감기가 여름에 더 독한거... 모르나?"
"그래서 테라스 나왔잖아요- 말리려고- 그보다 그쪽은 이 시간에 커피를 마셔요?"
코도 밝은 여자인가 보다- 컵 안의 내용물은 안 보였을것 같은데
" 커피.. 를 좋아해서야-"
하임의 조그마한 입술에서 "흐음- " 하며 흥미 없단 듯한 말이 새어나오고
지혁은 일어나려 한다. 종일 볼 여자를 - 아니 종일 본 여자를 또 보고싶지는 않다.
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아니 그래야만 한다.
도망칠수 없다. 나는 고통에서 한 발자국도.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게요?"
"자야 해 시간이 늦었어-"
지혁의 기척이 창 너머로 사라지고
하임은 거실에서 조그마한 스툴을 꺼내 와 앉는다.
"여전하네 정말-"
조금은 가까워 졌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말을 걸지 말걸 그랬나보다.
단정한 옆선이 너무 아릿해서-
달에 비친 그의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왠지 슥 하고
모래처럼 날아가서 없어질것 같단-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말을 걸기전.. 그는 분명히 자연스럽게.. 비웃거나 평소에 내 뱉는 픽 하는 웃음이 아니라..
슬프지만 아련하게, 아련하지만 너무나도 , 다정하게..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웃음, 지을수 있는 사람이었으면서... 내게는 한번도 아직 보인 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래 우린 별 사이 아니지만.
그렇지만...
뒷 말이 없다는 게 이렇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니.
"후덥지근 하네.. 비나 확 쏟아져라-"
하임은 자리에서 휙 일어나 마지못해.. 알람을 맞춘다. 밝은 달빛에 비치던 그를-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면서.
-
하임은 다음날 - 알람에 맞춰 일어나서 열심히 조깅을 했다. 해 버릇 하니 꽤 견딜만 하달까?
예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도하가 자신을 만나러 오거나 하기 전까진 집에만 있었던 자신..
바보같은 인생을 살았다. 가장 좋은 시기를.. 가장.. 바보같이 보냈다. 꼼짝도 않고-
거지같은 연애-
그때는 그게 왜 반짝거린다고 생각했었을까
돌아보니 더 없이 깜깜한 암흑이었는데. 결말도 추론한다고 해서 도달할수 있는 이렇다한 결론조차도 없는 그런 암흑이었는데.
아침의 햇살이 쨍쨍하다. 오늘도 무지 더울것만 같다.
한참 뛰고 있는데 메세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 조금만 늦추지 오늘은 , 11시 까지 와
늦지말고- 더워도 머린 다 말리고 와
문 앞에 오면 노크해
작약이다
나를 보고있나? 두리번거려 보지만 주변에 작약은 없다.
씩 웃음이 난다. 팔짝팔짝 보라는듯 더 경쾌하게. 그렇게 뛴다-
마음에도 더 밝은 햇살이.. 이제야 드는거 같다.
-
지혁은 새벽에 일어나 약부터 먼저 먹었다. 가장 먼저- 종종 빼 먹곤 했던 약을
요 며칠은... 단 한번도 안 먹은 날이 없다.
그리고 과하게 먹어야 했다.
어제의 자신은 아침에 생각해도 , 창피했다. 이젠 빼 먹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준비를 해서 - 자신을 데리러 온 강비서의 차에 탔다. 약속된 대로 예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박사님을 만나기로.. 한 예약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 피하기 위해 접수도 개인적으로 하고.. 훨씬 이른 시간에 만나는 것
그건 김 박사님이 봐 준 편의였다.
운전하면서 강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여느때처럼 단정한 옷차림이었지만. 궁금증을 참을수가 없었으니까.. 어찌됬든 뭔가 정리된 사실이 있을꺼 아닌가-?
"어..어제 화해는 잘 하셨는지?"
...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답답한 공기가 싫어서
".... "
"계..계약은 그대로인..거죠?"
지혁은 그제야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말한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그래. 그대로야. 내가 잘못했는데.. 내가 정상이 아니었는데 내가 미안해 했지 뭐."
그 뒤로는 강비서도 지혁도 말없이 운전만을 해서 병원에 도착했다.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지혁은 말 없이 김 박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김박사는 이제 막 커피잔을 내려놓던 찰나였다.
"왔니? 지혁아 - 오랫만이구나..."
이 사람이 봐도 봐도 적응 안 되는건 사실 내가 필요한건 약일 뿐인데
올때마다 따뜻한 태도로 상담치료를 강행하는 이 사람의 성미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위해 일찍 나오고- 또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의사 노릇하는게
이유없는 친절로 느껴져서 더 그랬다.
아무리 부모님의 학창시절 친구라 해도 말이다.
"안녕 하셨어요-"
"앉으렴- 너 좋아하는 커피 막 내렸어-"
지혁은 마지못해 놓여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푹신했으나 맘은 돌 바닥에 앉은 듯 불편했다.
"좀 어떠니? 요즘도 잠 잘 못자니?-"
김박사의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태도가... 오히려 지혁은 신경이 쓰였다
지나칠정도로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그런 태도.
"그렇죠, 커피를 못 끊어서 그런지.. 잠 자는 시간이 따로 없어요 너무 피곤하면.. 좀 자둬야 겠다 그러는건데
도통 약 없인 잠을 못 들어서요-"
"..... 내 소견으론.. 커피 때문은 아닌거 같구나-"
김박사는 지혁의 얼굴을 빤히 보고는 마른 입술로 말을 덧 붙인다
"너는 정말 정옥이를 닮았구나.. 어째 아버지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어머니의 이름이다. 글쎄.. 이렇게 수척해진 내가 지금도 어머니를 닮았다고 할 수나 있을까.......
"그렇다면 요즘도 다리가 아프니? 니가 내가 오라고 한것도 아닌데 먼저 예약을 잡았으니.. 무슨 일이 있을꺼라
생각했지.."
눈치는 빠르다- 내가 먼저 예약을 잡은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치가 빠른것도 아닌가.
"저, 요즘들어 더 심해져서요- 최근까지만 해도 운전도 할 정도였는데.."
"그랬는데?"
"요즘들어 더 그래요- 물론 ptsd 증상이 다양한것도 알고-... 환영이나 환청도 들리는 일이 있다지만
실질적 통증이 다리에 느껴지는건.. 정말 다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김박사는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잇는다.
"안타깝게도 그런거라면 수술로 되겠지만.. 아니야- 니 다리는 다 나았어- 니가 원체 재활을 오래 열심히 했잖니..
그러니까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그러니까 ptsd소견을 내 놨던 건데... 요즘 더 심해졌다구?"
"네.."
"어떤거 말이니, 통증? 아니면.."
"통증도 심해졌구요-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폭이 커졌다고 해야 할까요
화가나서 앞뒤 안가리게 된다던지.. 악을 쓰게 된다던지...
그애.. 생각만 해도 그런건 아니에요- 주로 예전 기억들이 , 생각날때 그랬는데..
그애 웃었던 추억 그런건.. 스스로 떠올려도. 괜찮은데..
감정이 잘 조절이 안되요.. 그래서 심해져서 혹시 미친게 아닌가..하고.."
김박사는 지혁이 어렵게 꺼낸 말을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니가 생각할땐 , 미친게 뭐라고 생각하니?"
이런 질문 너무나 상투적인거 아닌가,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요즘 저 같은거요?"
"요즘 너 같은게 뭔데?"
"감정 조절 안되고 화내고- 흔들리고.. 조그만한 일에도 무너지는거요"
김박사는 명쾌하게 말했다.
"미친거- 아냐- 그게 정상적인 거지"
....
"네?"
"예전의 너는 울만한 일에도 울지 않았지. 악쓸 일에도 악도 안썼지. 그냥 텅 빈 아이였잖니-
그게 가장 위험한 거거든. 호수에 큰 돌을 던지면.. 보통은 물보라가 쾅쾅 일어야 되는데
넌 물보라는 커녕 공깃방울 하나 내 보내지 않았잖니. 그냥 가라앉았지 니 속으로
이제야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면.. 난 오히려 지금이 나아지고 있다고 보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야
뒤로 하고라도 말이다.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지혁은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이런 돌팔이를 봤나.. 내가 필요한건 이런 이야기가 아닌데.
"그럼 가장 불편한게 뭐니- 이제 감정을 드러내는것? 아니면 다리가 불편한것?"
지혁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둘 다죠- 둘 다. 저를 해롭게 하고 피곤하게 하거든요-"
김박사는 말없이 지혁을 응시하고- 지혁도 말 없이-... 그저 김박사를 응시했다.
한참뒤에야 김박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약은 원하는데로 처방해 주마- 대신.. 한달에 한번은 꼬박꼬박 내원해야 한다?
상담치료- 싫어하는 것도 알고 뻔하다고 우스워 하는것도..... 아는데-
조금은 드러내야 달라지는것이 단 하나라도 있지 않겠니-
다른 상황에 조금씩 놓여지는 연습을 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하다보면 달라지는 순간이
분명 올거야. 그럼 약속 지키리라 믿고- 약은 더 잘 처방할게-"
김박사는 여전히 미동없이 다시 굳은 지혁을 보고.. 그 어린날 정옥이를 그대로 닮은 선을 보며
아득한 회한에 젖는다. 정말, 이 아이는 정옥이의 성격마저도.. 그대로 닮았구나.
"그럼-"
지혁은 일어나 문을 나섰고.
손도 대지 않은 커피만이 싸늘하게 식어서 지혁의 자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