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사랑에 모여 앉은 세 사람은 아랫목에 정좌한 소녀가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몸은 우의정 황창성 대감의 향촌인 홍산에 김초시집의 세 여식 중에 가장 막내라오.”
세 사람은 말없이 소녀가주 김씨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몸이 나이가 열일곱인데 이미 오십을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노인과 어찌 혼인을 하게 되었겠소?”
빤히 아는 대답이지만 아무도 대답 안했다.
“홍산에는 군인인 나씨 아저씨가 있어, 우리 집안과 친했는데 이 나씨 아저씨가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온 황창성 대감에게 딸만 셋 있는 우리 집안 얘기를 한 것이오.”
“아마도 좋은 혼처를 주선해 달라는 마음에서였겠죠.”
수빈이 슬그머니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런데 김씨가 갑자기 눈물을 그렁거렸다.
항현과 준모가 놀라 수빈을 쳐다보자 수빈은 미안함과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앞 사람들의 당황은 아랑곳없이 김씨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마 그랬겠지. 아마 그랬겠죠...... 근데 이 늙은 대감이 우리 집 딸 셋을 보더니 우리 아버지에게 한양의 정처가 아들을 못 낳아 그러니 아들을 나을 첩실을 하나 달라고......”
항현과 준모는 실소가 나왔다.
노욕이 지나쳐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위의 언니들은 이미 혼처가 정하여져있어 결국 내가 가는 수밖에 없었지요.”
“재혼을 하신다들었습니다만......”
준모가 눈치없이 쓸데없는 것을 깊게 물어보았다. 항현이 눈을 찌푸렸다.
“내가 칼을 들고 난리를 쳤지요. 내 나이, 스물도 안 넘은 처녀가 남의 집 첩실로는 못 들어 간다고, 정실부인은 아들이 없다니, 칠거지악의 무자고(아들을 못낳는 죄)이니, 그 여자를 내쫓고 나를 정실로 앉히라고, 안 그럼 칼로 당신 찌르고 나도 죽겠노라고 지금의 우상대감을 모신 그 밤에 난리를 쳤지요”
“잘하셨습니다.”
‘정말 눈치 너무 없네!’
항현이 김씨의 말에 추임을 넣는 준모가 못마땅했다.
잘한 거 누가 모를까봐 한마디를 넣는단 말인가?
퉁을 한마디 해, 쥐어 박을까하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
“근데 서울로 올라오는 날 나씨 아저씨가 축하한다고 노비를 둘 딸려줍디다. 축하한다고 줍디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소......”
“일이 뜻하지 않게 전개되어 사과하시는 의미로 그리하신 거겠지요.”
“아마도...... 아마도...... 그리 하신 거겠지요.”
말에 설움이 끼어 있어서 그러는지 길게길게 호흡을 가져가며 말을 끌었다.
“그런데 그 때 내 마음이 그러했겠소. 아비의 친구로 살다가 집안에 갑자기 우환을 들인 철천지원수로만 여겨졌지. 그래서......”
“......”
셋은 말을 섞지 않고 그저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내 우상대감에게 가살을 떨었지요. 노비가 허약하다, 실하지 못한 노비를 준 것은 지 집 밥이나 아끼자는 것이지, 대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들 낳으러 가는 내게 저런 노비를 선물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조롱하는 것이다, 베갯머리에서 계속 찔러댔지요.”
셋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을 계속 들었다.
“난 야단이나 치던지 태형이나 칠 줄 알았지, 이 우의정 놈이 그리 흉폭하게 굴 줄 몰랐소. 자기 집 노비들로 술자리에 시비질을 하여 그날로 대로에서 싸움박질로 때려죽이게 합디다.”
“.......”
“그리고 그 집에 아이들이 어려 죽어서 자기들 선산에 감나무와 소나무를 심은 것이 있는데 그것도 모조리 베어 버리더군요. 내가 너무 놀랐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소.”
김씨의 눈에 그렁거리던 눈물이 한줄기로 흘렀다.
항현과 준모는 우는 소녀를 다그치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수빈은 말을 본론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지금 이 집에 밤에 찾아온 것은 나씨의 원혼이었습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밤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아주 작고 음침한 목소리가 ”대감, 황창성 대감“하며 찾는데 문을 열면 아무도 없었소. 문 두드리는 소리는 아주 크게 나는 데 사람은 없어 집안의 사람들이 겁을 내던 차에 집 뒤의 감나무에 저런 변고가 생긴 것이요.”
“우상대감께선 알고 계시는 지요.”
“예~ 귀신이 나온다니 이 집에는 발길을 끊고 얼씬도 않으십디다.”
준모가 피식 웃었고 항현은 보이지 않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수빈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김씨에게 다시 물었다.
“우상대감께서 이 집에 아니 계신데 귀신이 우상대감을 이 집으로 찾아 오신다구요?”
“......예......”
김씨가 작게 대답하자 수빈은 질문을 다시 이어갔다.
“혹시 회임하셨습니까?”
김씨가 수빈과 눈을 맞추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동침을 하였으나 임신까지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들을 쳐다봤다.
항현은 남자들이 함부로 묻기 힘든 부분을 수빈이 해결해 주는 것이 정말 고마웠다.
하도 관련자들이 입을 닫고 있어서 밝혀지지 않았던 많은 부분들이 이제야 그 윤곽이 크게 그려졌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작은 자세한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사건의 해결까지는 요원했다.
“마님, 혹, 저희가 이 집에 묵는다면 폐가 되겠는지요?”
“...... 아니 그렇게 까지야, 객이 몇몇 묵는다고 집에 해가 갈만큼 없는 살림은 아니오......”
“그렇다면 저희 오늘 이 집에 좀 묵겠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수빈이 다른 두 사람의 거처도 정해버렸다.
김씨가 수빈에게 연유를 물었다.
“헌데 왜죠? 집에 계셔야 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직 때가 된 건지 안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뒤의 감나무는 귀신의 통로가 될 공산이 있습니다.”
“네!”
수빈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김씨는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수빈은 김씨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며 항현과 준모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지금부터 싸움의 준비를 좀 하려고 합니다.”
“아...... 예, 옛!”
“예~”
수빈이 솜씨 좋게 두 사람을 이끌자 항현과 준모는 저도 모르게 수빈을 따라 나섰다.
수빈은 일단 감나무 주변에 까마귀가 덤비지 않는 범위에 준비해온 오동나무 말뚝을 박고 금줄을 둘렀다. 그리고 홰목황지에 견명주사로 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언문주입니까?”
“예, 저 마님을 나모가비의 눈에서 감춰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림자가 그림주의 발에서 떨어졌다.
눈이 따라 가려나 따라 가지 못하누나.
손 뻗어 만지려 하나 만지지 못하누나.
있으나 보지 못해 있으나 잡지 못해, 물러가도다.”
예순 네 자의 글자가 정방형 황지에 정방형 여덟 자씩 가로세로로 도열되도록 써 넣었다.
그것을 준모가 눈여겨보더니 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언문주로 군요.”
“예, 은신의 부에요. 마님을 원혼의 눈에서 감춰줄 거예요.”
“언문으로 부적을 만들 수 있다니...... 처음 봅니다.”
준모의 경탄에 수빈이 방긋 웃어주며 부적을 들고 김 씨에게 갔다.
“마님, 오늘 밤 마님이 방에 들어가시면 이 부적을 방문에 붙혀 마님을 원혼의 눈에서 감출 것이옵니다. 그래도 되겠는지요.”
“......”
김씨가 수빈과 부적을 마뜩찮게 보더니 한 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합시다. 저간의 사정을 다 털어 놓은 마당에 무엇을 못 하리요......”
김씨의 허락으로 밤에 안방에 들어가면 방문을 부적으로 봉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수빈은 항현과 준모에게 각자 뒤뜰과 대문을 하나씩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양쪽을 다요?”
“예, 저는 바로 이 뒤뜰 문과 대문을 연결하는 중간에는 제가 있을 거예요. 어느 한쪽에 별사(특이한 일)가 생기면 제가 바로 도울 것입니다.”
항현도 준모도 다른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축귀행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세 사람은 집사에게 밖에 놓을 수 있는 앉을 것을 청해 자리를 만든 후 같이 앉아 두런두런 저녁을 먹고는 각자의 자리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