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이 하임의 집의 문을 밀어 닫은 즈음
지혁이 자신의 눈을 생각하고 있단걸 전혀 모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층인 창 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이미는 말 없이 배낭을 툭 내려놓았다.
부러- 배낭여행객처럼 하고 왔었나 보다. 어차피 이런 호텔에 묵을 거였으면
그렇다면... 옷도 좀 그에 맞게 입고 올걸 그랬나... 제이미는 혼자 생각했다.
그저 게스트 하우스에 묵을 생각이었다. 나라도 한바퀴 돌아 볼 겸..
출발은 그저 가벼운 맘에 한 거였는데.... 전화번호를 찾을때만 해도 그 생각까진 못했다. 당연하게도..
하민의 어머니는 거의 말미에 빌듯.. 여기에 묵으라고 내게 부탁하셨다.
너희 가족이 얼마나 하민이를 아껴줬는지 잘 알고 있다며... 보답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래도 그렇지 이 호텔에 방을 잡아주신건 과했다고 생각한다. 눈부신 야경은 좋지만..
제이미는 입이 썼다.
혼자 묵기엔 너무 좋은 방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오후에 만난 그 남잘 떠올린다.
...
하민이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라고 표현한 그 남자.
운명적 남자라..
편지에 적혀있던 동글동글하던 귀여운 글씨를 떠올린다. 결혼할 생각이라고
그녀는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바싹 마르고- 하민이보다도 더 하얗고-, 심지어 나보다도 하얀 남자였다.
뱀파이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민이의 말과는 완전히 달랐다. 밝고 장난기가 많은 남자라고
편지에는 적혀 있었다. 처음엔 날라리인줄 알았다고.... 그런데 재밌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반했다, 구구절절 적혀 있던 이유들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친구라고 했는데도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머리는 칠흑같이 짙고 눈안은 공허로 가득차있었다.
하민이를 잃고 얼마나 삭막했는지 짐작은 되었다.
얼굴엔 뜻밖의 취미라도 있는지 큰 멍이 들어 있었고..
창백. 그 단어가 그대로 , 얼굴에 붙어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그러나 오늘 만난 그 남자는 여차하면 날 치기라도 할 만큼 - 정색하고 있었다.
의외로 그 절망이 .... 몹시 짙었다.
하민이 일이 자신의 탓으로 느껴질 테니... 그럴수도 있을꺼라고 생각은 했다.
더군다나.. 그 남자가 하민이를, 하민이 만큼이나.. 지독하게.. 사랑했다는건 안봐도 알 수 있었다.
온 얼굴에 묻어있는 연민 미련 슬픔 지독한 외로움만 봐도 충분히.... 알수 있었으니까-
하민이가 못 일어날 거란 생각.... 나도 안해볼순 없었다.
하민이는, 내가 아는 가장 강인한 여자애였다. 처음 전학 온 학교에 우연찮게도
동양인은 하민이 뿐이었다. . 게다가 당시엔 언어가 능숙치 못해 하민이는 곧잘 쉬운 질문에도 답을
못해 웃음거리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하민이가 주눅든것도 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누워서 무표정으로 있는 하민이는 낮설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생기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믿기로 했다. 시간은 걸릴지 모른다. 그래도 하민이가 일어날거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언젠가 그랬던가... 하민이가 그랬다.
"제이미, 믿음이 가장 중요한거야- 믿어주기 때문에 할수 있는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때 그 반짝반짝하던 모습-
하민이는 존재 자체로 그저- 반짝거리는 애였는데..
제이미의 눈은 다시 공허하게도 창밖만을 향한다.
제이미는 반짝거리는 서울 거리의 모습이 삭막하게 느껴진다. 같은 글자다. 반짝임이라는 글자는....
그러나 의미는 참 많이 다르다. 이런게 한국말의 깊이인가.
제이미는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하민이의 이름을 어색하게, 한국말로 발음했다.
"하민.. 장 하민."
-
다음날 아침 하임은 머리가 아픔과 함께 숙취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깨지는 것만 같은 찌릿찌릿함이 쫙쫙 전해졌다.
망할.
하임은 상을 찡그렸다. 머리는 엉망 얼굴은 퍼석퍼석
머리는 찡하고 속은 쓰렸다. 많이 안 마셨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 앞이 핑글핑글해져 왔다.
그리고 왠지 잠은 여기서 안 들었던거 같은데.. 자신은 침대에 있었다.
하임은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뿌연 기억의 안개 사이로... 뭔가 ... 탄탄한... 등같은... 것이... 느껴지는........?
....
그렇다는 것은 그렇다는 고로...........
작약이 날 옮겼단 말야??????
하임은 절망에 젖었다. 이불킥킥킥킥을 해도 맘이 개운치가 않았다.
"으허허허허헉..... 흑흑흑흑 아 이런게 아니었다고 이런게 아니야!!!!!!!!!!"
하임은 베게에 얼굴을 묻고 절규의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대화의 끝에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났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었다.... 술도 못하면서
왜 술을 먹자 그랬지 내가.... 내가 왜 내가 왜.... 오 하나님.... 제가 술 다시 먹으면 성을 간다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어째 이런일이 또........
난 이제 장하임도 아니야 개하임이야 개하임
하임은 기억의 파편이 맞춰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약이 날 업었던거...같은데...
바싹 마른 등뼈가 닿았던거 같은데...... 그리고
하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왠지...
내 머리의 어귀에서 작약이 즐겨쓰는 향기가 났다.
내 얼굴에서도 은은하게 향이 풍겨왔다.
하임의 손이 공중에서 딱 멎었다.
누군가의 향기란건 이토록 설레는 거였던가
같이 있지 않은데.. 이 사람이 내게 스쳐서 남은 내 몸에 남은 그의 잔향은
왠지 더 설레고 센슈얼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임은 이런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또 술먹고 뻗어놓고 뭐 좋다고!!!!
추태다 추태..... 작약 얼굴을 어떻게 보나..
내가 설마...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겠지?
하임은 "내가 미쳐... 진짜.... "라는 말을 끝없이 되 뇌이며...
벌떡 일어나 씻으러 샤워실로 향했다.
-
지혁은 머릿속에 남은 알콜 잔여물들을 샤워로 깨끗이 씻어낸 참이었다.
그래도 - 맘은 조금은 개운했다. 어제도 결국 편한 숙면은 실패했지만..
그리고 어제 하임의 머리맡에서 늘어놓은 이야기를 하임이 기억하지 못하길 진심으로 바랬다.
술이 그렇게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을 늘 잘 조절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눈을 감고나니 맘이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고 말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동화를 읽을때마다 주책이라고 생각했건만.. 다 털어 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슴 속의 찌꺼기들을 깨끗히 없애 주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주책은 주책이었다. 바보같은 주책.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한 표정으로 자고 있던 장하임... 자신도 모르게 풀어지고 말았다.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린다. 제이미라는 남자,
하민이가 이야기 한적 있었다. 친구라고 더 없이 좋은 친구라고..
떠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내가 하민이를 믿는 것 보다... 지금은 이미 믿음을 슬슬 잃어가는 이 시점에
그의 눈은 단호했다. 확신하고 있었다.. 하민이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럴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감 없는 일일것이다. 내내 지켜본 나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느날 갑자기 목격한 그는... 믿음이 있는 그대로일 것이었다.
....
나는 ...
하민이 어머님의 부탁을 곰곰히 생각하며.. 다시 머리를 털어 닦았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머리를 길러볼까...
예전에 그랬듯이 ...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혁은 말 없이 아침의 햇살을 얼굴로 맡았다.
창 밖을 내다본다. 아무래도 오늘 장하임은 숙취 때문에 무단 으로 운동까지 건너뛸 모양인가 보다.
"빠져가지고..... "
퉁명스런 말과는 달리 지혁의 입술새에서 삐딱한 미소가 실실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장하임이 보였다. 한쪽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3걸음에 한번씩 멈춰 서서 ... "으아악.....!!" 을 외치는 장하임..
뭔가 쪽팔려 하는.... 표정이다... 저 녀석 설마 기억하는 건가?
사실 유무와 상관 없이 지혁은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임의 모습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웃음이 헤퍼졌다는 사실도 모른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