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성공리에 끝나자, 시종장이 날 찾았다. 난 의친왕이 날 찾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의친왕 말고는, 현재 시점에서 내게 연락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종장, 의친왕 전하의 전갈입니까?"
"아니요, 전하께서 보낸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구지? 내게 초대장을 보낼 만한 사람이 있나?
빳빳하고 두꺼운 흰 종이로 만들어진 초대장이었다. 한지 말고 이런 서양식 고급 종이는 꽤 귀할 때인데, 대체 누구지?
게다가 초대장은 얼마나 꼼꼼하게 봉했는지, 옛날 유럽에서나 쓰던 밀랍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밀랍 봉인을 뜯고 초대장을 꺼내 읽어보려고 할 때, 의친왕이 도착했다.
"세현, 회의는 잘 끝났나?"
"예, 전하.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것이 순탄히 논의되었습니다."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게 아마 회의 관련 메모인 모양이군. 어차피 나중에 정식 보고서를 보게 되겠지만, 지금 그 메모를 봐도 되겠나?"
"전하, 이건 제가 쓴 메모가 아닙니다. 누가 제게 쓴 편지인데, 저도 마침 읽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편지라고? 그런 식의 종이에 편지를 쓰는 사람은 아마 이 나라에서....."
의친왕은 말을 끊었다.
"아, 아닐세. 설마 황지선은 아니겠지. 황지선이 그 초대장을 자네에게 보낼 리는 없을 테니까. 황지선을 흉내내는 다름 사람인 모양일세.
황지선의 고급스러운 초대장을 부러워하거나 동경하는 사람도 꽤 많다고 들었으니 말일세. 만드는 데 워낙 돈이 많이 들어서, 웬만한 사람은 흉내낼 엄두도 못 내지만 말일세."
하지만 그 설마였다. 내게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황지선이었다.
자신의 본가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뭐지, 이거? 도대체 어떤 의도인 거야?
"전하, 전하 말씀대로 황지선이 보낸 게 맞습니다. 절 본가에 초대하고 싶다는데요."
"정말 황지선이라고? 그것도 그 본가 건물에 초대했다는 말인가? 정말 의외로군. 자네 얼굴을 다시 보기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초대까지 하다니."
"사람을 초대하는 게 그렇게 이색적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공식적 신분도, 호적도 없는 제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면 모르겠습니다만."
"황지선은 자신의 본가에 초대하는 것 자체를, 상대에게 큰 특혜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네. 고급 수입 종이로 서양 귀족 방식대로 초대하고, 아주 친밀한 몇몇 사람만을 본가에 초대하는 것이지. 보통은 본가 말고, 별장에 사람을 초대한다네."
"그런데 그 초대장을 제게 보냈다는 거군요."
적어도 황지선 본인은, 내게 특별대우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 셈이지. 갑자기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니, 오히려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군."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거절할 명분도 없잖습니까. 호의를 함부로 거절하는 것도 결례가 될 수 있는 일이고요.
설마하니 회의에서 지적 좀 했다고, 앙심을 품지도 않을 테니, 무슨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습니까."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야 않겠지.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겠네. 이유 없이 지나친 호의를 베푸는 것에는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지 않나. 속좁기로 정평난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상대에게 그리 행동할 때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전하,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인가, 세현?"
황지선의 초대장에는 초대장의 필수요소 중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황지선의 본가가 어디입니까? 초대장에는 본가에 초대한다고만 되어 있지, 그 본가이 어디인지는 안 쓰여 있어서요."
1919년 즈음에는, 편지에 일일이 공식 주소를 쓰는 문화가 별로 없을 때이기는 했다. 편지 주소를 쓰면서, 마을 이름과 우물 옆 초가집 정도로만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애초에 현대적 의미의 주소도, 구한말 시기에나 도입된 것이었고, 일상에서는 주소를 의식할 일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황지선의 초대장은 한 술 더 떴다. 마을 이름 정도도 안 쓰고, 그냥 본가라고만 쓰여 있는 것이다.
"황지선의 본가라면 이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
그래서 패기 넘치게도, 초대장에 초대장소를 본가라고만 덜렁 쓴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일개 부잣집의 위치가 전국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가?
"엄밀히 말하면, 현재 본가라고 해야겠지만 말일세. 바로 얼마 전에 사들인 집이니까."
그러니까, 어디냐고.
"자네도 들어본 적 정도는 있겠지. 이 나라에서 가장 호화로운 개인 저택이니 말일세. 아마도 왕궁이나 사찰 다음으로, 웅장한 건물일 걸세."
그러고보니, 의친왕이 황지선에 대해 소개할 때, 이 나라에서 왕궁을 제외하면 가장 비싼 집을 사들인 부잣집 출신이라고 했었다. 그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집이 어디냐고. 좀 빨리 말해 달라고.
"그 유명한 벽수산장일세."
벽수산장은 실재했던 건물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기록에 대해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35년을 통틀어 개인 저택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2층집도 드물던 시절, 프랑스풍으로 지은 고층 저택에 널찍한 서양식 정원까지 갖춘 집이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의 벽수산장의 주인은 분명히, 그 사람 아니었던가?
"전하, 벽수산장의 주인은 윤덕영 아니었습니까?"
"그래, 역시 자네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호화로운 프랑스식 저택으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이 시대의 건물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곳이지요.
그런데 황지선 집안에서 그 벽수산장을 샀다는 겁니까?"
윤덕영은 순종의 둘째 부인이자, 현재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친정 큰아버지다. 순정효황후 아버지인 윤택영의 형이다.
윤택영은 매우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국의 황후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빚쟁이를 피해 외국으로 도피해 생활해야 했던 사람이다.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빚을 잔뜩 내어 돈의 힘을 동원했고, 그 목표는 달성했지만, 빚을 갚지 못해 빚쟁이 신세가 되었다. 순종에게 빚을 갚아달라고 손을 벌리기도 했지만, 빚의 규모가 순종이 갚아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윤택영은 빚쟁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윤택영의 형이라는 윤덕영은 황실 관계자 중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손꼽힌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 문서에 옥새를 찍을 때, 순정효황후가 한일강제합방을 막기 위해 옥새를 감추자, 조카이자 황후를 협박해서 옥새를 빼앗았다는 일화로 유명한 그 사람이다.
얼마나 친일행위에 앞섯는지, 일본제국에서 윤덕영에게 자작이라는 조선귀족 신분을 내렸을 정도였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후 자기들 입장에서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귀족작위라고 한다. 그러니까 일제시대 적극적 부역자에게 치하한다는 표시나 마찬가지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친일파의 대표적인 표상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가족보다 돈을 훨씬 중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도 엄청난 부자면서 윤택영이 빚쟁이에게 쫓길 때 도와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기야 나라를 판 대가로 많은 돈을 받고, 그 돈을 흥청망청 쓴 사람이니, 딱히 이상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 윤택영이 일본에게서 받은 조선귀족 은사금으로 지은 자택이 바로 벽수산장으로, 당대 기준으로는 엄청난 초호화판이었다. 그런데 그 윤택영의 저택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단 말이야? 도대체 이 세계에서는 그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거지?
"그러게나 말일세. 다른 건물은 몰라도, 그 벽수산장만은 워낙 비싼 집이라서, 사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이 많았었지. 하지만 이 나라 최고 갑부라는 황씨 부잣집은 명불허전이더군. 그 비싼 집을 덜컥 사고도, 별달리 부담이 되지도 않았다고 하더군."
난 그 황씨 부잣집에서 어떻게 벽수산장을 샀는지가 아니라, 어쩌다가 그 집이 매물로 팔리게 된 건지가 궁금한 건데....
난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 갖가지 외국 문물에는 능통해도, 최근 국제 정세나 근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으니, 이 정도는 몰라도 별 탈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 벽수산장이 어쩌다가 매물로 나오게 된 겁니까?"
"일본이 패전하면서, 이 나라의 조선귀족들이 모두 그 작위를 박탈당하고, 재산은 몰수당한 것은 자네도 알 걸세. 그리고 그 재산은 국유화되거나, 민간에 팔린 뒤 그 판매대금은 국고에 귀속되기로 했지.
땅은 대부분 나라 소유가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땅일 경우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기로 했지. 하지만 건물의 경우, 사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팔기로 결정되었다네. 벽수산장도 그 과정에서, 매물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지.
어쩌다가 벽수산장이 매물로 나오게 되었냐고 묻는 것을 보니, 자네는 그 집이 황후 폐하에게 하사될지도 모른다는 그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군. 아무리 유명한 친일파여도, 어쨌든 황후 폐하의 친정 쪽 재산이니, 그렇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거부하셔서, 다른 몰수 재산과 함께 민간에 팔리게 되었다네.
그리고 너무 비싸서 살 사람이 없을 거라던 그 벽수산장이, 친일파 환수 재산 중 가장 먼저 새 주인을 찾은 집이 되었네. 이 나라 제일의 부자로 유명한 황씨 부잣집이 곧바로 사들인 것이지. 황씨 부잣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네."
난 그 기세등등한 윤덕영이 어쩌다가 벽수산장을 팔게 되었는지 정도만 궁금했는데, 훨씬 스케일이 크면서도 통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실제 역사를 보면, 누구나가 꿈꾸었을 법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제가 그 벽수산장에 초대장을 받게 된 것이군요."
"그렇다네. 황지선이 어떤 의도로, 굳이 그 곳에 초대했는지, 난 도저히 모르겠군. 황지선이 그 벽수산장에 정식 초대장과 함께 초대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네에게는 엄청난 경력처럼 될 것일세. 그런데 황지선이 그런 식으로 자네에게 득 되는 일을, 이유 없이 할 것 같지가 않단 말일세."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직접 가면, 알게 되겠지요."
"세현?"
"호랑이를 탐색하려면 호랑이굴로 가야겠지요."
"만약 자네가 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초대를 거절할 명분을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네. 자네에게 다른 지역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도, 적당히 맡기면 될 것이네."
"전하께서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일부러 피할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도대체 황지선이 무슨 꿍꿍이로 내게 그런 초대장을 보낸 것인지, 궁금해서라도 알아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