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즉흥적이었고, 다소 뜬금없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의친왕이 나더러 그 괴문서라는 것을 한 번 보겠냐고 제의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내가 인간 인터넷 능력, 모든 언어 자동변환 능력이라는, 말 그대로 유리한 치트 요소를 고루고루 갖추고 이 세계에 있다는 것과, 그걸 거대한 스케일로 활용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도 말이다.
괴문서를 보겠느냐는 제의 자체부터 기회였다. 밑져야 본전이다.
만약 그 괴문서라는 것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손해볼 것은 없다. 내가 불이익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의친왕도 내가 그 문서에 대해 정말로 알아낼 거라고 진지하게 기대하는 건 아마 아닐 것이다. 상황을 보니 의친왕이 그 문서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던 모양인데,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의친왕이 그런 곳에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라면, 이 세계에서는 엄청난 엘리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엘리트들도 못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엘리트들도 못 알아낸 것을, 갑자기 나타난 웬 청년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딱히 실망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만약 1919년 이래 근 백여년 동안 새롭게 밝혀진 것에 관한 문서라면, 내가 정체를 알 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의 나는, 내가 있던 세계에서 지난 백여년 동안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까 말했던 대로다. 의친왕이 괴상한 문서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동원한 엘리트 인력도 풀어내지 못했던 비밀을, 내가 풀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입지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요소였다. 실패해도 본전이고, 성공하면 엄청난 이득이며, 성공할 확률이 상당히 높은 도전이었다.
설사 내가 그 문서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해도, 아마 글자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 같은 글자가 적혀 있다고 했었고, 난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어떤 상황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앞으로 백여년 동안 펼쳐졌을 모든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외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그러니 난 그 괴문서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거나, 적어도 문서를 해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이번 괴문서라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이럴 것이다. 성공하지 못해도 평타요, 성공할 확률이 남들보다 월등히 높은 상황 말이다.
게다가 난 의친왕이 손님으로 대우하며 옆에 두겠다고 말했으니, 의친왕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활용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아아, 난 지금- 어떤 미래로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단 말인가!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머지, 아무 말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의친왕의 목소리가 들린 후였다.
"아아, 역시 너무 뜬금없고 무리한 제안이었나? 하기야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겠군."
"아, 아닙니다, 전하. 다만- 제가 과연 그런 정체모를 것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가 염려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절 믿어주신 전하의 믿음을 배반하게 되는 격은 아닐는지...."
"하하, 자네는 정말 겸손하면서 윗사람을 위하는군. 하지만 난 남들이 모르는 것을 누구 한 명이 모른다고, 그 사람을 타박하지는 않을 거라네. 그래, 그 괴문서를 한 번 보겠는가?"
"예, 전하. 하지만 방금 초대받은 신사분께 보여드린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동궁에서는 처음 오는 사람을 환영할 때에도 이런저런 절차를 밟게 되어 있지. 그 절차를 밟는 데에만 30분 정도는 걸리게 되어 있네.
그리고 환영 절차가 끝난 뒤에야, 감정해달라는 문서를 보게 되어 있지. 그러니까, 30분 동안은 그 문서를 우리가 봐도 무방하네."
"그렇다면, 그 괴문서를 볼 수 있게 허가해 주십시오, 전하."
"허가하네. 백 번이라도 허가하고 말고!"
의친왕은 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 정중앙에는 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꺼내더니, 의친왕은 흑백사진 두 장을 꺼냈다.
"이게 바로 아까 말한 그 괴문서일세. 아무도 정체가 짐작 가는 바가 없다고 하더군. 문서의 모습을 보면 옛날 문서 같기는 한데, 웬 무기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는 것일세. 이때까지 이렇게 생긴 무기가 실제로 만들어진 적은 없는데, 그래서 더 수상하네."
난 그 괴문서 사진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첫번째 사진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맙소사.“
보자마자 어떤 문서인지 알았다. 이게 아까 말한 '원뿔을 엎어 놓고 주변에 막대기가 잔뜩 달려 있고, 원뿔 안에는 무슨 톱니바퀴 같은 게 가득 차 있는 그림'인 모양이었다. 설마 두 번째 사진도 이런 건가?
설마했더니 역시나였다.
아까 말한 '희한한 장치가 달린 풀무와 수레'라는 게 이 그림인 모양이었다.
이거 가지고 괴문서니, 비밀 무기 설계도니 그 난리를 피운 거였다고? 괴상한 문서나 무기 설계도라는 게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일본의 비밀 무기 설계도일지도 모른다고 그토록 경계했다니, 허탈한 기분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걸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전하, 이 문서들은"
내가 입을 열어서 말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새로운 무기를 고안하기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던 무기들이었다. 현대에서는 탱크, 머신건 등으로 불린다. 첫번째 그림의 핵심 발상은 탱크 자체이고, 머신건이라 불리는 설계도는 10여 정의 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다. 당연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살았던 1500년 즈음에 고안된 것들이다. 그 시대에 이런 걸, 그것도 예술가가 어떻게 생각해낸 건지, 정말이지 다재다능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가 대답한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의친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0여초 정도가 지나서야 의친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정말로 비밀 무기 설계도란 말인가?"
내 대답에서 중요한 건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이었는데, 의친왕은 무기라는 단어에만 주목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럴 만도 했다. 무기 설계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문서가 정말 무기 설계도라고 확인된 격이겠구나. 그렇다면 이것부터 설명해야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입니다, 전하. 500여년 전- 아, 아니, 400여년 전에 살던 사람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에 태어나 1519년에 죽었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500여년 전 사람이지만, 그 시점에서 백여년 전인 1919년 시점에서는 400년 전 사람이다. 나는 엄청난 실수를 할 뻔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연도 계산을 할 때, 지금이 1919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서 손꼽히는 화가입니다. 모나리자를 그렸지요."
"모나리자?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1911년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당했다가, 2년 후 되찾은 그림입니다. 배경에는 풍경이 그려져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두 손으로 모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아아, 그 때쯤 프랑스에서 무슨 그림이 도난당했다고 한참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 그 그림을 그새 되찾았던 모양이군. 그래, 그 그림을 그린 화가였단 말인가"
의친왕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경술국치 다음 해였군.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서양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어. 그림 하나가 도둑맞은 것에만 신경을 썼지.
서양 외교의 세계에서 이 나라란 그 정도의 비중인 모양일세. 나라 하나가 식민지가 될지 안 될지는, 자기네들에게는 그림 한 점만도 관심 없는 것이지. 그걸 뼈저리게 느꼈었다네."
이야기가 왜 그 쪽으로 흐르는 겁니까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의친왕은 모나리자 도난 사건 때문에 프랑스에서 난리법석이 난 것이, 프랑스가 대한제국에는 관심이 없다는 상징적 사건쯤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 나라는 그림 한 점보다도 가치없는 나라라는 식으로 말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것 같기도 했다. 프랑스 입장에서야 귀중한 문화재를 찾는 것을 먼 외국에 대한 관심보다 우선해서 그런 것이지, 대한제국을 무시하려고 일부러 그러지야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에서도 외면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약소국에 식민지라는 신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도둑맞은 그림은 몇백년은 된 그림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전하. 400여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요."
"그럼 이 무기 설계도도 400년 전 작품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400년 전에 이런 무기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네. 기계 쪽 최고 전문가를 불러서 이 문서를 보여줬을 때에도, 이런 무기를 만들려면 최신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네. 그래서 괴문서라고 부른 것이야. 최신 철강 기술이 있어야만 가능한 무기라고 했으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이런저런 발명품을 구상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은 당시 기술보다 너무 앞서나갔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동력원은 사람이요 재료는 사실상 나무와 돌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무기를 실제로 만들 수가 없었던 겁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이 18세기, 이런 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한 철강 기술이 갖추어진 건 빨라도 19세기였으니까요."
"너무 놀라운 이야기라서 믿을 수가 없네. 그런 물건을 400여년 전에 고안했다고?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한 사람이었군. 그리고....."
의친왕은 날 정면으로 살펴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나머지는 날 따라오면, 마저 말하도록 하겠네."
그 다음 순간, 의친왕은 사진을 들고 방을 나서더니 나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의친왕을 따라갔더니, 큰 응접실 같은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피에르라고 불렸던 그 신사, 내가 안내했던 그 신사,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의친왕은 아까까지만 해도 괴문서라고 불렸던 사진 두 장을 건네면서 말했다.
["이게 일전에 말한 그 정체 모를 문서일세.]"
내가 안내했던 그 신사는 그 사진을 한참 보더니, 말을 이었다.
"[언어는 라틴어와 비슷하긴 한데 라틴어는 아니고, 그림 쪽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유럽에 존재한 적 없는 물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던 무기 그림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진품인지 알고 싶군.]"
"[예?]"
의친왕은 아까 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 설명한 것을 거의 그대로 줄줄이 읊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안내했던 신사가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라틴어와 비슷하지만 라틴어가 아닌 이 글씨는 이탈리아어겠군요. 제가 이탈리아어를 읽을 수 있다면 즉시 감정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어떻게 평가하고 싶은가?]"
"[전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많은 발명품을 고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 스케치를 본 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만약 그 말씀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무기 스케치라면, 제가 감히 말하건대-]"
응접실 같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말을 마저 이었다.
"[그것을 알아낸 사람은 서양 문화에 엄청난 조예를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귀중한 자료를 접했을 만큼, 풍부한 경험도 갖추고 있겠지요. 만약 제가 옆에 둘 수 있다면, 당장 모셔오고 싶은 인재입니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나오는 것이었는데, 이런 거창한 평을 듣다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의친왕의 말에, 난 입을 떡 벌리고 말이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정말 대단한 인재더군. 그래서 난 그 인재를 내 아들의 스승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네.
지금 시대에 황족으로 활동하려면 서양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한데, 그 자리에 가장 알맞은 적임자라고 생각한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