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은 그 말에 당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진의 물음은 ,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기에
더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뻔한 거짓말은 싫었다.
그런 거짓말 해봤자- 실망만 할 테니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속에선 약간 화가 났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치는 않았기에-
입술만 잘근 잘근 깨물 뿐이었다. 세진이는 그런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그러곤 덧붙였다.
"그래.. 됐어- 대답 듣자고 그런거 아니니까-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나의 착각이었을까-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노기를 띄고 있는거 같았다. 나는 더 변명할 말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들어가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었다. 다시 나오자 세진은 차를 끓여 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많이 길어진 머리, 자연스레 묶은 모습-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데
이 아이는 볼때마다 자라는 느낌이다. 부드러운 눈- 어쩌면 이렇게 까지 걱정해 주는 것도
세진이 뿐일 것이다.
세진이는 눈치 챘을 텐데도- 내 거짓말 따위는 금방 간파하면서도-
작약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작약에 대해 이제껏은 적어도 추궁하지 않았다.
나를 일으켜 세워 준 것만으로도 그정도 대답은 들을 만 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어색하게 다가가 앉았다.
"고마워, 이런거 있는 줄도 몰랐네-..."
잔에 퍼지는 향기가 낯설다. 홍차같은데- 묘한 향기가 흐른다.
세진이는 나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내가 사 왔어- 지난번에 보니까 하나도 없길래-"
"그랬어?"
"설탕?"
세진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젓는다.
"단거 좋아하면서- 이상하네-"
세진이도 자리에 앉는다. 가지 않고 앉는 다는 것은 ...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일까?
그는 한참만에 , 어색하게 운을 떼었다.
자기가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는 듯한 태도였다.
".... 나한테 할 말 , 없어?"
세진이는 돌려 묻지 않았다- 그냥 넘어갔던 일들을 다시 끄집어 내려고 하는 듯 했다.
나는 우물쭈물 잔만 손에 들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세진이가 먼저 이야길 털어 놓았다.
"... 나는 저 사람이 좋은 사람 같지 않아,.... 너는 직전에도 김도하 때문에 힘들었잖아-
이젠 조금 정착하고 , 편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항변할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 김도하 같은 사람이랑 비교하지마..."
세진이는 그 말에 내가 기분이 상할만큼 살짝, 웃었다.
".....? 그래, 김도하는 논외로 빼고 이야기 하자고- 그래도 저 사람은 아니야-..... 모험은 어렸을 때는 좋아-
사랑 자체가 모험이고 거기에 어려움이 더해지면 스릴이 있을때도 있으니까... "
"......."
"니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잘 알고 있어- 너는 늘 그랬어 사랑 받기보다 사랑을 주고 싶어하지- 편한 길 보다- 그 길이 좀 아프고
불편하더라도 의미가 있는 길을 좋아하는거... 잘 알고 있어- "
세진이의 눈은 나를 보고 있었으나- 눈빛은 내 너머의 지나온 시간들을 보는 것 처럼 눈빛이 모호했다.
그러더니 찰싹 내리치는 것 처럼- 그답지 않게 매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이젠 아니야. 그러기엔 이제 아니라고.....
전에는 이 길이 아니구나, 혹은 이 사람이 아니구나 싶으면 돌아 나올 시간이 있었단 말이야-
근데 이제는 없어- 옳은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라구-"
"......"
세진이의 눈빛은 냉정했다. 나는 혼나는 듯한 불편한 기분을 계속 느꼈다.
야단치고 있는것 같은 기분-
단 한번도- .. 하다못해 도하때도 세진이는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지저분해 지는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는데...
"그리고, 난 니가 생각하는 것 보다 저 사람이랑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술에 취했던 그날, 너 대신
내가 테라스에 나가 있었거든"
나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눈치 챘을 뿐만 아니라- 내게 그 사실을 작약도 - 세진이 자신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도
이상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 즈음 작약이 머물머물 날 밀어 냈었던게 생각이 날듯 말듯 하고
그 일이 세진이 때문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충격이 드러난 내 눈을 무심히 쳐다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 마주 앉아 보니까... 니가 끌릴수 밖에 없겠다 싶었어-,
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집약체 처럼 보이더라- 상처도 많고, 그러면서도 단단하고- 자존심도 세고-
내가 말릴 정도더라고-
말로는 질 일 없다 생각하고 달라 든 거였는데 말이야-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는걸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나한테 그럴 권리가 있냐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그리고
당당하더군, 어이 없을 정도로-"
세진이의 눈은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런걸 감추는 아이였는데-
그런 겉치례를 걷어낸 눈은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 보다 낯설었다.
".....?"
무슨 이야길 했다는 걸까-
나는 더 초조해졌다.
" 저 남잘 만나고 나니까 내가 더 망설일 시간이 없겠더라고... 너는 오래 지내면서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너는 정말 나를 하나도 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도, 적어도 변명하자면- 이건 내 계획이 아니야- 나도 몰랐으니까 저런 사람이 나타 날 줄은...
조금씩 힌트를 주면 니가 스스로 알아 챌 줄 알았어- 그래서 여지껏 쌓아 온 걸 무너뜨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의 내 생각이 틀렸어-
애초에 뭔가를 세우려면 다 무너뜨려야만 해 , 쌓아온 게 무엇이든 간에 말야-"
담담하게 말하는 세진이의 눈빛- 나는 낯설음에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처럼 눈매는 부드러웠다 내가 의지 해 온 그처럼- 하나도 변치 않았는데..
"이까지 이야기 해도 모르겠어?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감히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내가 널 좋아해 왔다고 하임아-...."
이 말을 조용히 뱉은 세진이의 눈빛은 아팠다. 내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지독히도 아팠다. 나는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입이 말을 듣질 않았다.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심장이 뜨거웠다.
"아주 오래 전 부터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부터야... 혼자만 삭여왔다고...
니가 기겁하고 도망갈까봐서- 너랑 가진 친구로써의 추억까지 놓칠 까봐서- 난 언제나 두려웠어
그러면서도 니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 두려웠어- 언제나 두렵기만 했어,
그래서 멀리 가서 널 잊어보려고 애썼어-......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난 니가 김도하랑 결혼이라도 할줄 알았거든-
니 곁에서 좋은 친구로 남으려면 떠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떠났었지- 그런데 넌 내게 돌아왔어-
그 먼곳까지 말이야..그렇게 마주하고서야 알았어..
혼자인 그 동안에도 나는 너를 하나도 잊지 못했다는 걸... 사실 내심 바랬는지도 몰라"
그는 수치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며 읊조렸다.
"너랑 김도하가 틀어지기를... 내가 바랬었는지도 몰라- "
세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길 난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그의 긴 머리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기 때문이었다.
"믿기지 않겠지- 알고 싶지 않았겠지... 아니.... 이제 나는 출발점을 지났으니 너를 다신 못볼지도 몰라-
내가 믿을 수 있는건 우리가 보낸 시간, 그 딱 하나 뿐이야....
너무나 위험하지만.... 말을 꺼낸 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 망설이다가 또 너를 놓칠 순 없어-
망설이다가 너를 또 상처주는 사람에게 보낼순 없어- 그래서 또 무너진 너를 보고, 또 나까지 가슴 아플순 없어
하임아-"
내 이름을 부르는 , 알수 없을 만큼 낯선 세진이의 목소리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면
내가 그럴 수 있는 문제라면 도와주고 싶을 만큼 세진이의 눈에는 고통과 연민, 그리고 슬픔
어쩔수 없는 듯한 표정이 가득했다.
천하의 세진이가...., 어느 순간부터는 쩔쩔 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앞에서도 그런 적 없는 세진이가...
"너를 많이 좋아해.... 진심이야....
내 평생이- 오직 너였어, 기다린 사람은 너 뿐이었어-"
"........"
내 눈은 튀어 나올듯 크게 뜨여 있었다.
소리라도 낼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니가 어떤 모험을 해도-..... 난 니 뒤에 있을거야- 그렇지만 나도 호락호락하게 널 포기할 생각따윈 없어-
그러기엔 내가 아주 오랜시간을 너만을 바라봤거든-"
"...."
"너를 많이 좋아하니까-"
세진이는 내가 눈치 챌 걸 뻔히 알면서 가짜중의 가짜같은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가 슬펐다. 나는 어리둥절함과 이해 할수 없는 엷은 배신감과 따끔거리는 가슴께의 통증과
눈에 서렸을 충격에 마음이 뒤틀렸다.
세진이는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또 연락할께-"
이 말과 함께-... 대답을 듣겠다는 그런 말 조차도 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와서 내 이마께에 , 피할 시간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던 내게
입을 맞췄다. 세진이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나는 밀쳐 낼 생각도 못했다.
이게 내가 아는, 내 어린시절 내 연애 시절 내 모든걸 속속들이 다 아는 ,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큰
의지, 언제나 나를 기다려주는 내 편.... 그 유세진이 맞나 싶어서
나는 그저 얼었다-
그는 가벼운 동작으로 문을 열고 집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그때까지 숨 쉬는 걸 잊었던 듯 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숨을 내 쉬어서 빼 내도 공기가. 폐 끝까지
폐가 터질만큼 꽉 차서- 나오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그 말이 무슨말인지 모르지 않았는데...... 그래- 조금만 더 눈치 채 려면 그럴 수도 있었는데
내내 무심하고 내내 그 감정을 눈치 못채고 방치한 내 자신이 한심해서도 눈물이 났다.
마치 마음이 냉장고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서 곰팡이가 가득 핀 음식을 찾아 낸 것 처럼
그 소중한 마음을 상해서 못 쓸때 까지 방치해놓은 내 자신이 싫었고-
기분이 비렸다. 기분이 상했다.
그 애틋하고 헌신적인 마음을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하는 내 자신도 싫었다.
세진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받고도 맘 구석에 어디 넣어뒀는지도 몰랐던
자신- 그런 자신이 싫고 미워서 하임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돌아서면 생기는 문제들이 - 놓고 돌아보기만 해도 생기는 한숨들이
하임은 이제 버거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하임 앞에 놓인 차가 싸늘히 식어가는데도
하임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
하임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서 , 조금은 멀어진 후에야 - 자신은 걸음을 멈추었다,
세진은 의자를 찾아 쓰러지듯 앉았다.
자신이 지금 뭘 저지른 건지를 되 짚어 보면서- 무슨 이야길 한건지
자신이 구축해온 어떤 세상을 바닥에 패대기 쳤는지를 곰곰히-
마음은 미친듯 동요했지만- 스스로는 아니라고 끊임없이 소용없는 말을 되뇌이면서-...
처음 말한 것들은 사실이었다.
오랫만에 집에 갔더니 하임이의 어머님이 와 계셨다. 인사하고 하는 중에 하임이 와서 봤냐고 물으시기에
생각보다 자주 봤다고- 웃으며 싹싹하게 굴었다. 그랬더니 온 김에 부탁 좀 하자셨고-
자신은 별 다른 생각없이-.. 돌이켜 보면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하임이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당시엔 별 다른 생각없이- 그저 간단하게 들어갔다.
하임의 집엔 , 단지 하임이가 없단 이유로 서늘함이 감돌았다. 부탁 받은 것들을 넣고선
나는 집을 돌아 보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와 향기-... 내가 민감한 것일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하임이의 시간을 품고 있는 집- 그래선 안되었으나 난 호기심을 품었고
나도 모르게 곳곳을 눈 여겨 보았다. 그때였다.
창에 열린 틈으로 그와 하임이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운전은 하임이가 한 모양이었다.
내가 결정적으로 화가 났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충동질 한것은- 내가 사실을 털어놓고
착하디 착한-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데 지독히도 서투른 , 하임이에게 브레이크를 걸게 된건
의외로 사소한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 하임이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길-
그리고 그 남자가 하임을 바라보는, 눈길- 눈빛 ...
나는 보고 말았다. 의심만 해오던- 마음을 바짝바짝 마르게 하던 그 순간을 두 눈 으로 보았다.
그러기를 넋놓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들리는 기척에 빠르게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한참이나 후에야.. 하임이의 소리가 , 기척이 들렸다...
사랑에 들뜬 숨소리를 -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의 의미를...
혼자 잠시 헤아렸다... 마음이 얼마간 아프고
난 말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적어도 내 마음을 말하고- 적어도......... 내가 말이라도 해 보고-
그리고.... 내가 처음 봤던 그 남자의 차가움이 하임이를 밀어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임이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굳이 힘들고 아픈 그 길을 억지로 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 해 주고 싶었다.
말을 듣는 내내 하임이의 눈이 영문을 몰라하는 게-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싫었다.
적어도 , 다른 사랑은 그럴 수 있어도 내 마음은 더 순수하다고 그렇게 믿어 왔는데.....
나도 결국 똑같았다.
하임이가 받는 충격이- 뭐 때문인지조차 나는 확신할수 없었다. 나 혼자 떠드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지만
나는 끝까지- 온 힘을 다해.. 나라는 놈 안에 있는 용기를 짜낼수 있는 만큼 다 짜내서 말을
마쳤다. 하임가 느낄 혼란을 하임이가 감당할수 있길 기대하면서-
내가 한 말 그대로였다..
무언가를 세우려고 하면.. 쌓아 왔던 것이 어떤 것이던... 그것은 아무리 아쉽고 아까워도....
무너져야만 했다.
내 눈빛이 지나치게 내가 품어 온 마음을 들어낸 것에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녀의
이마에 늘 생각만 하던 일을 벌인-.. 미묘한 감정-
가슴이 찌릿 한다. 이런게 사랑이 아니라면- 이런게..... 내가 품어 온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어떤게 사랑이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매달릴수 있다니- 멍청하게도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하임이를 맘에 품고도
자만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 사이의 시간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 베이스 자체가 친구였을 뿐인
어떠한 것인데-
내가 출발선을 끊으면서 무너뜨려야만 하는 어떤 것인데... 나는 그 시간들을 내심 믿고
내가 마음 먹고 그녀를 가지겠다고 행동하면- 그녀를 돌릴수 있다고...
내심 자만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난 대답을 듣기 전에- 하임이가 입을 열기 전에
내 감정만 쏟아내고.... 그게 하임이가 향하는 사람에게 , 다가가는데 브레이크가 되길 그저 바라면서
나는 도망쳤다.
그녀의 이어질 대답이 무서워서.....
모질게 나를 밀어내지도 못할 테지만... 오히려 미안해 할 그녀의 감정이 두려워서...
미안하다는 것은...
정말 최악의 실연이니까...... 그 말 만은 듣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세진은 자리에서 그대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곤 하임을 다시... 생각한다. 그녀가 받았을 마음의 충격을 걱정하고
잠 못이룰...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다시 물어오지도 못할 그녀의 약하디 약한 감성을
안타까이 여긴다.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무의식적으로 집었지만 담배 곽 안은 비어 있었다.
그 속을 보면서 세진은 한숨을 짙게 내 쉬었다.
-
"... 잠 , 잘 못잤나?"
작약의 건조한 물음- 그 물음이 귓가에 닿고서야 하임은 고갤 들었다. 그렇게나 티가 날까-
작약의 표정이 그저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님을.. 그의 표정을 보고 알수 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다-
우리 사이가 가까워 졌단걸 스스로도 느낀다. 그리고 그 가까워짐이 너무나 반가운데도...
어제 하임은 내내-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처음엔 슬픔이었고 후엔 분노로 변모했으며- 배신감이었다가- 다시 슬픔으로 변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동이 떠오를 때 까지- ..... 자신도 확신 할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작약이 커피 잔을 밀어준다- 하임은 잔을 손에 끌어당겨 잡고는 무의미한 말을 중얼거린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버텼어요?"
작약의 표정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 불면증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
작약은 새삼스럽단 듯이 웃는다.
늘 그렇듯 웃음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 그런 일을 벌여놓고서-... 글 써서 먹고 사는 소설가가- 잠을 태평스럽게 푹 자는게.... 더 이상한거 아닌가?"
"....."
"남들 잠드는 시간에- 꼭 잠들지 않아도 된다고-.. 사소한 강박이랄까- 법칙을 버리면... 괜찮은 편이야-
원래도 깊게 잠드는 법이 없었거든- 사고 후엔 더 그랬지-"
"그렇군요...."
작약의 표정이 어둡고 걱정의 빛을 띈다-
"설마... 내일 있을 일이 걱정되서 잠을 못 잔건가?....."
"....아니.."
"...... 미안하군-..... 그런거라면...."
"아니에요 그런거-"
작약에게 세진 이야길 하고 싶진 않다. 그건 작약을 배려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세진이를 위한 어떤것일지도 모른다-
세진이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은 김도하 때 이전부터였다.
세진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제 '옳은 선택' 을 해야 할 때라고 .. 세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세진이는 스스로.... 내가 자신을 고르는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랑의 감정이... 여기서 자라야지- 여기서 길러야지 하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자라는 것이란 말일까?
내 사랑은 적어도 그런것이 아니었다. 여지껏은... 들불처럼 번져서- 내 자신을 태우더라도
내가 방향을 정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뭐야... 말해봐-... 그 전까진 당신 귀에 무슨 이야길 해도.. 안 닿을것 같은데-"
작약이 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나는 순간적으로 맘에 치기가 들었다.
둘이 대화 했단 걸- 세진이 뿐만 아니라 작약도 이야길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 쯔음 작약이 이상하게 경계심을 드러냈고- 나는 그를 , 처음으로 안아 줬었다.
그런 말을 하게 한 게 너무나 미안해서- 마음이 아파서-
그러나.. 세진이 때문에 나를 더 밀어내게 된 일인지는 몰랐었으니까-.. 세진이 보다
그 맘을- 능히 알아챘을 작약이 말 안해 준것이 더 속상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을 꺼내기로 했다.
".... 왜 말 안했어요?"
작약은 나를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며 되 물었다.
"뭘 말인가?"
"세진이랑- ... 대화 했었다면서요?"
그 말에 작약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순간이었다. 한참만에 이뤄낸 따뜻한 빛이 걷히는 데는
몇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말하던가?"
그의 목소리에 다소 주눅이 들었지만 , 이왕 꺼낸 이야기 이기에 하임은 밀어붙였다.
"네..... 그랬어요-.. 어제 집에 왔었어요-.....
그리고 당신과 이야기를 했다고....."
조금 거칠게 내 말을 자른다.
"그럼 알았겠군-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작약의 말에 나는 심장이 떨어진 듯 놀랐다. 작약까지 알았는데-
감정까지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다고?
".... 그..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작약의 눈은 차가웠다. 감정이란걸 배제한 눈이었다.
애써 그러고 있는지 아니면 애초에 기분이 상하는 이야기이기에 맘 먹고 그러고 있는지는 난 알수 없었다.
".... 모르는게 이상하지 않나? 당신을 많이 걱정하더군- 나를 몹시 싫어하고 있고- ... 그게 내 인상 만이 아니라-
당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걸 몰랐다는게 더 이상하군-... 물론 자기의 감정을 잘 감추더군- 그러니 오랜시간
그래왔다면 눈치 채는게 쉽지는 않을수도, 있겠지만...."
"......."
"그래도 예민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았을 거야- "
나는 억울했다. 나는 스스로가 그렇게 무딘 사람이라곤 생각치 않았으니까-
한 사람이 품고있던 감정을 열었을때 이렇게 슬퍼지는건
그리고 이렇게 속상한건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 어떻게 당신 탓만 하겠나?.... 그 사람은 당신을 잃을까봐 겁을 내고 있었을 꺼야-...
내가 비겁했던 것도, 사실이지... 눈치는 벌써 채고 있었어- 원래도 난 그런 눈치야 빠른 편이니까...
그래도 말하고 싶지 않았어- 그쪽도 그렇게 부탁하더군 대화 한 사실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랬었으니까......"
"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나는 그 많은 말중에 그것을 먼저 궁금해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날카롭게 죄책감을 느꼈다.
내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은혜 조차도 모르는 것일까?
그런 것은.... 세진이를 생각하면 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그 말에 지혁이 의외라는 듯이.... 또 내가 자신에게 잘 대할때 늘 그러듯이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워 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 당신이 , 달아날까봐서 그랬어...
이기적이지만, 나도 이제 당신이 필요해서..... 그래서 그랬어-"
말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입에서 마치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것 마냥 딱했다.
나는 또 한번 말이 멈추었다.
우리는 아침 빛 속에서 잠시의 정적을... 말 없이-
서로의 눈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