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복도 끝- 낯선 가을의 빛이 드는게- 이미 계절이 바뀌었다.
세진은 그것을 막연히 바라본다- 엷은 갈빛의 눈을 빛내면서-
세진은 며칠 째, 복원 작업 때문에 다시 지하로 돌아와 있었다. 진정으로 해결 못한 일은 밖에만 있겄만- 일을 너무 잘해도 문제인지
복원화 일은 자신을 빼고는 컨트롤이 안됬다.
스트레스는 자신의 목을 점점 조이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끊었던 담배는 어느새 옛 친구처럼 자신의 앞주머니에 돌아와 있었다.
하임이 알면 싫어할텐데... 말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고 자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남자를 떠올린다. 그 하얀 얼굴의 남자를 떠올린다. 하임과 그 사람의 사이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다시 또 얼마나 가까워 져 있을까-
다시 밀도의 문제였다. 다시 밀도의 문제로 돌아와 있었다. 하임에게 그 남자가 어떤 의미인지 차라리 그냥 물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까..
나는 바보 멍청이 겁쟁이였다. 묻기가 겁이 났다. 그 아이의 눈만 봐도- 꽉 채워 적혀 있는것 같아서
이미 그 눈에 대답이 적혀 있는것만 같아서- 내가 물으면 , 그래서 또
그 아이의 입으로, 그 목소리로 사실을 들으면 난 또 도망치고 싶어 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세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느새 계절이 변해 있었다. 자신이 돌아갈 날을 되 씹어본다.
하임을 만날수 조차 없는데 - 자주 만날수조차 없는데, 하임을 난 어떻게 붙잡아야 할까-
내 자신이 꿈 꾼 고백의 순간은 이런게 아니었다. 오래 준비했지만 - 언제나 망설였다. 먼저
그냥 말이라도 해 버렸으면 좋았을까. 오랜세월 , 나는 같이 쌓아온 우정을 잃을까봐 난 너무나 두려웠다.
하임은 내게 말했다. 언제나 내가 그 자리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언제나 도움이 되서 정말 고맙다고
나는 그저 웃어 보였지만 그것은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내게 언제나.. 언제나 소중하고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녀가 내게 돌아올 때- 그녀가 돌아오는 순간은 내게도 의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직-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라는게
내게도 , 내가 사는 것을 지탱하게 하는 의미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랬다.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찾는데.. 돌아오기 전- 이탈리아에서 샀던 , 하임에게 주기로 했던 반지가 잡힌다- 세진은 그 반지가 뜨겁기라도 한듯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라이터를 찾을 생각도 다시 못한채 그저 멍하니.... 물고 있을 뿐이다- 그걸 본 함께 작업하는 친구가 불을 붙여준다-
사람좋은 미소가 , 하임이 여우같다며 늘 지적했던 미소가 얼굴을 스친다. 오랜 습관처럼-
그는 여기서 만난 사람이었다. 며칠째 동고 동락 하다보니 꽤 친해졌지만- 세진은 쉽게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는걸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건 어릴때 부터 그랬다.
그래서 자신은 나쁜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일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은 대개 솔직하고- 충고하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른다.
나는 우유부단했고 속내를 감추고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릴 해주는 걸로 말을 멈추었다.
하임은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결국엔 알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하임의 경우에는 남에게 너무나 요령없게 속내를 드러내는... 그 정도로
그 아이가 순수하다는 것이 날 매료시켰지만 말이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나는 그런걸 가지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사랑 할 수 밖에 없었다.
불을 붙여준 남자가 살짝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무슨 고민 있어요? 오늘 내내 정신이 다른곳에 있는것 같아-"
세진은 말 없이 웃는다- 웃다가 문득 묻는다-
"영진씨는 여자친구, 있죠?"
영진이라 불린 남자는 싱긋 웃는다-
"있는데... 글쎄- 여자친구의 인내가 슬슬 바닥을 드러내는것 같아요- 그도 그렇죠- 전화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자주 볼수 있는것도
아니고... 게다가 미술에 전혀 관심도 없거든요- 이해 못하겠데요-.. 왜 그렇게까지 매달려야 하는지.."
"자주 연락 해 줘야죠- 휴가 때 못 봤어요?"
"에이.. 쉬기 바빴죠... 다른 거 뭐 할 만큼 시간이나 넉넉히 있었나요 ..."
남자의 아쉬움 가득한 눈빛에 세진은 담배의 마지막 숨을 마시곤 바닥에 버리고 비벼 끈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일들이 꽉 막혔는지-"
"그래도 세진 씨는 이탈리아 말이 통하니까... 솔직히 저는 말도 못 알아 듣겠고.. 같이 진행하기가 너무 벅차네요-
하루종일 지하에 있으니 시간 감각도 없고-"
세진은 씩 웃는다
"그러니까요-"
세진의 시선이 땅을 향한다. 이런 싱거운 대화가 이젠, 정말, 싱겁달까-
아무런 맛도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
"고민이란거- 혹시.. 연애 상담이에요?"
뜬금없이 본론으로 돌아온 그 사람의 말에 세진이 잠시 멈칫한다-
조금 놀랐다. 그랬다.
"아.. 어떻게 알았어요?"
남자는 씩 웃는다
"내내 1층으로 돌아올 때 마다 전화 확인하고-... 부르면 한 템포씩 대답이 늦고-.. 그런거
누구 좋아할때 하는 행동 같아 보여서요- 심지어 핸드폰을 숙직실에 두고 가잖아요- 지하에 있으면
전화 안 들어올까봐-.. "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은 남자다 , 곰처럼 우직한 몸집에 처진 눈이 순해만 보여서 그런것까지 캐치할줄은 몰랐는데-
"... 눈치 빠르네요- 그보다.. 내가 그랬나요?"
세진은 다소 의아하게 반문한다... 그래 , 전활 기다렸다. 내가 안 찾아도 하임이가 나를 먼저 찾길 기다렸다-
그 남자한테 가서 무의미하게 부딫히는걸...
아니 그 부딫힘이 무의미 하단걸 이번엔 알아채길 바랬다-
전처럼 다시 화내는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감정 조절이 안되서- 아직 마음도 주지 않고는
왜 내맘을 몰라주냐고 화내는 ... 그런 철딱서니 없는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먼저 연락 해 주길 , 나는 꽤나.... 성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어요- 그보다 민아씨가 세진씨 좋아하는거 같던데-..."
세진은 그 이름에 픽 웃는다... 웃지만 그 이름에 얼굴이 순간적으론 매치도 안 될 만큼 세진은 그녀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고있다.
"잠시죠 잠시- 뭐 그런 얘기까지... 어차피 좋아하는 여자, 있는걸요-"
"역시 그랬군요-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구요?"
남자는 너스레를 떨며 물어온다- 세진은 망설이다 그답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요... 그래도 곧이었으면 좋겠네요-"
일층 복도에 가을의 빛이 약간은 서늘히 비치어 온다 세진은 맘을 굳힌다-
그래, 이번엔 도망가지 말자. 라고-
우리는 언제나 처럼 마주보고 웃을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음을 전하면- 그 이상이 될수도 있다. 잃을 걱정은 하지말자-
우리의 시간은 자라는 내내 함께였다.
내가 그런 마음을 품은걸 알았다고 해서 잃어질 시간이 아니다.
세진은 영진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작업실로 돌아간다.
이번엔 주머니 속의 반지를 손에 꽉 쥐고서-
-
하임은 돌아온 내내 두근대는 맘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래 그의 경고대로 이건 설레일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장난스레 덧붙인 세가지 소원- 그것은 너무나 설렜다.
그의 눈이 , 그게 뭐 때문이라고 해도 날 원하는 것 처럼 보이자 왜 그리도 두근대는건지...
가슴께에 닿은 손 밑의 심장이 온 얼굴로 피를 보내 볼이 발그레 해 진다. 옆에 있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하다-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만큼-
하지만 그 대목을 상상하자 심장이 아릿하다- 관심 없는 척-
그의 처음처럼 ,
우리는 그런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두렵다. 그의 처음- 이제는 알지만 그 내면에 어떤것이 있는지-.. 그가 얼마나 섬세한지 아니까-
달콤하고자 하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기에 더 두렵다. 내 심장이 , 지금 눈치없이 뛰고 있는 이 심장이
그런일을 견뎌 낼수 있을까- .. 첫 만남의 그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한 없이 차갑고, 무례하며
한없이... 나와 멀었던가,
하임은 책상 앞에 앉는다- 그래 마냥 좋기만 할 일은 아니다, 침착해야 하고 완벽해야 하고,
잘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다시 정말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자신이 사랑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새삼
또 깨달았지만 분명히 달라진 점은 있다.
자신 스스로에게- 하임 자신 스스로가 달라졌다.
전엔 날 끌어내고 회유하는 쪽은 언제나 상대였다. 도하도 그랬는데
지금은 반대다- 언제나 그를 끌어내고 회유 하는쪽은 내가 되어버렸다- 마치, 착실히 시험 공부하는 친구를 꾀어내어
같이 놀러가자고 하는 말썽꾸러기 친구처럼- 나는 끊임없이 그를 꾀어낸다. 순수하다고 하기엔 조금 미안한 감정을 품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서랍속의 제인에어를 꺼낸다- 가볍게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간다. 제인은 주인에게 정신없이 끌리고 있으면서도
주인에게 그런 감정을 가져선 안되노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다 잡는다- 주인은 너무나도 뻔하게 제인을 유혹하고도
금방 그 사실이 거짓말인 것 처럼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돌린다. 가엾은 제인은 그것을 질투할 명분조차 가지지 못했다.
아니.. 질투 한다고 해도 , 자신을 처지를 보며 그럴수 밖에 없다고 그저, 포기할 뿐이다.
가을의 바람이 창을 통해 든다- 온통 서울에 가득하다는 미세 먼지는 왠지 이 동네만 먼것 같은 느낌이다-
하늘은 끝 없이 높아보이고 하임은 제인의 이야기에 귀를 조용히 기울인다-
그녀의 얘기에 어김없이 , 감정을 쏟아 부으면서-
-
액정에 떠 있는 막내 아들이라는 이름에 나는 전화를 든다- 이른시간...
그리고 강비서를 만난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아이는 벌써 뭔갈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랬다. 뭔가 결정되지 않고서 아이가 내게 전화를 할 리가 없으니까
먼저 말을 걸자고 결심할 리가 없으니까-
"여보세요, 지혁이니?"
내 목소리는 생각한것 보다, 아니 내려고 했던 목소리보다 지나치게 애틋하다.
이럴때,
내가 이럴때 큰아이를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작은 상처가 모이면 큰 상처가 되는 법인데
나는 아무리 애 써도- 지혁이를 밀어내고 지견이를 끌어 안아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이진 못했다.
"네 어머니-"
아이의 목소리는 다소 화 난것 처럼 들린다. 아이는 변했다. 예전엔 화가 나면 곧잘 대들기도 하고
오히려 익살 스럽게 웃기도 하고- 틱틱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 뒤론 화가나면 더 깍듯해진다.
마치 내게 벌이라도 주려는 듯이- 마치 사업상 만난 사람을 대하듯, 부르는 이름은 어머니이나 어머니라는 단어와는
한없이 끝없이 먼 , 깍듯하고 먼 사이로 나를 대한다- 감정이라곤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어찌되었든지 큰 아이가 안 사실을 나도 알았으니까... 지혁이는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못견뎌 전화를 한 게 분명했다.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어차피 해야 만 하는 대화였다. 들을 줄 알고 있던.. 질책이라면 질책이었다.
"그래.. 강비서 통해 이야기는 들었니?"
"......."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잠시 생각이라도 하는 듯 머뭇거렸다. 나는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해 재촉하고 만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내 생각대로 하는게- .."
아이의 조용하디 조용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셔선 안됬어요 어머니, 물론.... 형 생각하고 뒷일을 생각해서 그러셨다지만-
그런식으로 강비서를 압박하신다면.... 강비서가 어떻게 할지 어머니는 알고 계셨잖아요-"
아이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부드러우나, 차갑다.
"....... 그래 알고 있었지-"
나는 한숨 섞인 대답을 한다.
"그 사람과 저는 그저..... "아이는 그 대목에서 굉장히 망설인다. 내 마음속의 호기심과 기대감에 부채질을 하듯이
나는 그 호기심과 기대감을 억지로 누른다. 애를 써서..
"그저 좋은 친구에요-.. 그래요 , 잘 지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강비서가 그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니.. 그 사람은 우리같질 않아서-"
"....."
"그 부탁을 들어 주겠데요 ......말리고자 말렸지만 .... 나를 도와 주겠다고 하네요- 내가 말할 것도 없었어요
내가 할수 있는건 사과와 변명이 다였어요.. 제가 그런 상황에 놓이는걸 굉장히 난처해 한다는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그러셨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단어가 의미하는 뜻 만큼의 날카로움은 묻어있지 않다. 그러나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릴때 부터
나는 양심이 아팠다. 그래 사실이었다. 강비서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강비서 또한 이 아이를 잘 아니까-
그리고 나보다 그 여자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내가 얘기하면 결국 먼저 털어 놓게 될것이란 것도- 그 사람이 적어도..
내 아이에게 호감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일이 정말 이렇게 풀릴거라고 완전히 기대하진 않았지만.
"너를 지켜야 해서 그랬어 지혁아-"
"누구한테서요, 형한테서요?"
아이는 날카롭게- 그러나 차갑게 반문한다. 여전히 어조는 부드러우나
채찍으로 내려 친듯 따끔거렸다.
".... 둘 다지 언제나 둘다야- 너와 형 둘다 지키기 위해서야 지혁아-"
"저는 저대로 그냥 이대로 사는 것에 만족해요 어머니- 아버지가 언제나 나와 부딫히는 부분이.
아버지는 시간을 그대로 보내는 걸 참을수 없어 하시기 떄문이에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시잖아요-
이대로라면 충분한데.... 저를 늘 괴롭게 하고 저를 늘 구석으로 몰고, 저를 참을수 없게 하는건"
아이의 대답을 나는 미리 마음속에서 들었다. 그 말은 정말 어쩔수 없이 상처였다.
"가족이에요 다른게 아니라요"
"........."
내 입은 열려있으나 말이라곤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아이가 한숨을 쉬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번엔 나서지 않을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간절해 하시긴 마찬가지이신거 같거든요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대로에요-... 모든걸 이루어야 한다면- 그러고 내가 물러나야만 한다면
부탁 드릴게 있어요-"
"........ 뭘 말이니? 그걸 내가 도울수 있다면..."
"아니, 아니에요.. 도와 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요- .. 혹시 그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는 이미 자신이 한때 속했었던.. 아니 그 곳에 있는걸 즐겼었던 예전의 자신,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미 자신과 상관하나 없는 그쪽이라 표현한다.
얼마나 멀어졌는지- 얼마나... 멀 만큼 멀어졌는지..
"저를 한동안은 나쁘게 이야기 하더라도.. 어머니가 막아 주실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당장은 기분 나쁘실 수도 있지만.. 어차피 , 하민이가 ... 못 일어나는 이상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어요
그 사람 데리고 나가도... 아니 내 멀쩡한 모습보면 .... 다들 그렇게들 말 하겠지요-"
아이의 담담함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 보다 슬프게 느껴져 나는 속으로 김박사를 원망한다.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잖아.. 넌 내게 나아졌다고 했잖아...
"한번은 겪기로 한 일이었으니까.. 어머니도 한동안은 좀 괴로우실지도 몰라요... 미리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는거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곧 잊지요 , 내가 거기서 떠나 있으면 또 잊을거에요- 눈에 안띄면 결국 모두가 잊을 테니까요-"
"............."
"형에게는 내가 데리고 올 여자를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저희가 친구라는 것만 알아도
형은 물어 뜯고 싶어할지도 몰라요.. 더 이상은 민폐 끼치기 싫어요 어머니.. 그냥 둘이 얼굴은 익숙하고 그래서
그냥 데리고 왔나 보다고- 그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별 스럴것도 없다는 식으로 -
형이 망상하는 거 만큼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 말 말고 충분히 기색만 하셔도 형은 오히려 더 알아챌거에요-
이건 ... 부탁이네요 어머니.. 도와 주세요-"
나는 애써 입을 뗀다
"노력하마"
아이의 입이 잠시 닫히고 우리는 또 말 없이 전화기를 든채 서로 망설인다.
그러다 아이가 다시 말문을 텄다.
"아버지가 그 전에 본가에 한번 왔으면 하시던데.. 지금 정말 일이 바빠서요-
.... 그냥 제가 나올거라고... 물론 강비서도 말 하겠지만.. 그저 어머니가 한번 설명드려 주세요-
형의 일은.. 덮어주세요- 아버지가 아시면 난리 날 테고.. 그럼 형은 또 나에게-"
나는 아이의 말을 조용히 가로 막는다.
"알아. 적당히.... 아셔도 되는 선 까지 ... 내가 잘 말씀드리마-..."
"..........."
"그 여자분에게... 고맙다고 내 대신 전해주렴"
"네.. 어머니, 곧 뵐께요...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게 울린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고 아이는 또 한마디를 한다
"죄송해요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는 끊기고 ,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황망함을 느낀다-
이것이 이 집안 안주인의 무게였다.
남들의 , 여느 가족과는 조금은 다른- 차갑고.. 혹독한.....
두 아이를 지키고- 남편의 탐욕을 막고-
가족을 잠시라도 평화롭게 하는... 그런 댓가라고 생각하니
더욱 자신이 답답해졌다.
그리곤 한참을 골몰하다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다시,
지혁의 어머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차례였다.
러시안 룰렛처럼 누가 터질지 누가 피해를 입을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누구 한사람이 결국 떨어질거란 것만 빼고
여전히 모두는 위태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