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이글스파
원천저수지 가장자리 물위에 나무다리로 산책로를 만들고, 그 난간의 직사각형 보호 가림 판에 보라색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물 위에 은은하게 투영된 그림자를 보며 벤치에 앉은 삼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야~ 저 둘레길 산책로에 조명을 저렇게 울타리처럼 쭉 달아놓으니까, 호수에 비쳐 아래위로 두 배 높이가 돼서 정말 환상적이네요! 그죠, 선배님?”
“응, 정말 멋있다! 이야~호!”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한 손을 오토바이 점퍼 주머니에 넣은 문도가 멎진 야경에 심취한 사람처럼 목을 좌우로 꺾으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삼봉아, 앞만 보고 내 말 들어. 뒤쪽에 두 놈이 다가온다. 칼 들었어. 장갑 준비하고, 내가 다섯 세면 일어나.”
“예. 알겠습니다.”
삼봉도 입술을 오므려 조용히 대답하며 준비자세를 취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두 사람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며 각각 좌우로 흩어졌다.
“이 새~끼들 뭐야?”
“뭐야, 이 새끼!”
잽싸게 가죽장갑 끼면서 방어자세를 취한 문도와 삼봉이 벤치 뒤에 바짝 다가온 두 놈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잭나이프를 수직으로 잡고 목을 찌르러 달려들던 두 녀석은 깜짝 놀라, 벤치 등받이를 한 손으로 붙잡으며 엉거주춤하고 멈춰 섰다.
“어? 너 이 새끼, 해삼 아니야?”
문도가 마주 선 덩치 큰 놈을 보고 토끼 눈을 떴다.
“해삼이요? 선배님 아는 사람입니까?”
삼봉이, 앞에 선 깍두기 머리에 시선을 집중한 채 문도에게 다급히 물었다.
“이 새끼들 신림동 이글스파다. 혁대 조심해라! 끝에 칼 달렸다.”
“예? 혁대 끝에 칼이요? 이런, 치사한 새끼들!”
“흐흐, 웬수! 외나무다리에서 또 만났네. 킥킥.”
덩치 큰 해삼이 들켜서 겸연쩍은지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사실은 문도가 아까 장안 공원에서 화성 성벽을 구경하면서 뒤를 미행하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북문파 오야붕 대행인 중간보스 장훈교를 만나고 룸살롱을 나올 때, 경계심 많은 문도는 뒤를 밟는 두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확인하려고 일부러 삼봉에게 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고, 원천저수지에 와서 조금 전에 카페에 들러 빙수도 먹었다.
불빛이 환한 가게 앞을 고개 돌린 채 모른 척 지나가는 두 놈을 발견하고 미행자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주차장에 머물지 않고 끝까지 따라오는 것으로 미루어 단순한 미행이 아니고 기회를 봐서 뭔가 해코지 할 놈들로 판단하고, 일부러 벤치에 앉아 쉬었다 가자며 공격할 찬스를 만들어 줬던 것이다.
그러나 문도도 이 놈이 해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해삼이란 놈은 한 달 전에 시흥시 ‘원주민이주단지’에서 문도와 맞붙은 적이 있다.
유도 유단자인 덩치 큰 해삼이 다리가 긴 태권도 유단자 문도에게 마빡을 가격당하고 코너에 몰리자, 혁대를 풀고 끝에 달린 예리한 칼날을 드러내어 버클을 잡은 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휘두르는 타이밍에 맞춰 접근한 문도의 손가락에, 쇄골 아래 웅중혈이라는 급소를 찔려 팔이 마비되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해삼은 신림동 폭력조직 이글스파에서 조직을 배신했거나 용도가 폐기된 조직원을 처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맡고 있는 놈이다.
시흥시 원주민이주단지를 장악하고 있는 조선족 ‘원주민파’ 두목인 채일권은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에서 내려 보낸 남파 간첩이었다.
채일권은 대전 지하공동구를 폭파하기 위해 지하공동구 무전기 중계기를 제조하고 설치하는 시흥 반월공단 소재 우주통신의 조선족 마해송 반장을 반강제로 포섭했다.
문도가 부산 다녀오는 길에 우주통신에 다니는 친구 최근상 대리를 만나러 대전에 갔다가, 채일권에게 납치된 최근상을 발견하여 일격에 처치하고 대전 둔산지구대에 넘겼었다.
마해송은 회사 차량인 카니발을 몰고 도주했고, 다음날 오후에 문도와 최근상은 혹시나 해서 이주민단지에 있는 마해송의 숙소에 가봤던 것이다.
그런데, 마해송의 숙소에 들른 문도와 근상은 문이 열린 방 안에서 이미 누군가 황급히 다녀간 숱한 발자국만 볼 수 있었다.
원주민파의 우군인 서울 신림동 이글스파에서, 채일권이 사전에 자기 유고시 이글스파의 도움을 받으라는 지시대로 찾아온 원주민파 조직원의 요청을 받고, 해삼을 시흥시에 내려 보내 마해송 반장을 납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끌려가던 마해송이 마침 자기 집을 찾아온 최근상을 보았고, 마해송이 오줌 마렵다며 차에서 내려 근상에게 도망치는 바람에, 뒤쫓던 해삼이 최근상과 함께 있던 문도와 맞닥뜨리게 되어 당한 것이다.
그때 마침 대전경찰서의 요청으로 마해송의 집에 출동했던 시흥경찰서 형사들이 길에서 결투하는 문도와 해삼 일당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형사들은 일단 해삼 일당을 마해송 납치범으로 현장 체포해서 데려갔고, 문도와 근상은 경찰서에 가서 조서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역시 문도가 예상했던 대로 해삼은 무혐의로 풀려난 것 같고, 어찌된 사연인지 제 말 마따나 원수인 문도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야, 해삼! 용케도 풀려났구나. 그런데, 서울 신림동 이글스파가 수원에는 또 무슨 볼일로 내려와서 잭나이프 치켜들고 설치는 거냐?”
“흐, 자슥! 네까짓 게 전국구를 알아? 우리 이글스는 전국구야 임마! 킥킥.”
손에 잭나이프를 든 해삼이 맨손인 문도에게 이번에는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
“전국구? 하하, 너네 오야붕 국회의원 출마하냐? 비례대표 끝 번에 신청했으면, 돈봉투 돌리고 표를 구걸해야지 왜 칼을 들고 설쳐? 큭큭.”
“그 주둥이 오늘 회 쳐서 먹으려고 그런다, 왜? 킥킥.”
“회? 그래 맞다. 삼봉아, 우리 여기 회 먹으러 왔잖아? 저 덩치 큰 해삼 잡아서 실컷 회 쳐 먹고 몸보신 좀 해보자. 큭큭.”
대결은 기 싸움이다. 상대방을 최대한 약 올려서 평상심을 잃게 해야 유리하다.
“그런데, 해삼! 너 내가 저번에 신림동 산다고 분명히 말해 줬는데, 수원에 있는 줄은 어찌 알고 따라온 거냐?”
“내가 우리는 전국구라고 금방 말해줬는데 까먹었어?”
“아, 맞다. 깜박 했네. 근데, 저 지난주에 부산에 갔을 때는 안 보이데? 나와바리가 중부권이야? 나는 진짜 전국군데! 큭큭.”
“뭐? 부산? 부산은 새꺄, 우리 우군 서면파가 꽉 잡고 있는데 네까짓 게 무슨 볼일이 있어 부산을 들먹여. 부산이 고향이냐? 설 쇠러 다녀온 겨? 킥킥.”
“서면파? 놀고 있네! 차라리 유태파나, 신20세기파를 들먹이면 내가 좀 그런가 보다 생각해주지. 큭큭.”
“어쭈! 이게 부산 출신이 맞는가 보네. 어디서 주워듣고 잘도 씨부렁거리고 자빠졌네. 야, 헛소리 그만하고 한판 제대로 붙자. 오늘은 혁대 안 끄를게. 킥킥.”
“그래, 고맙다. 고맙기는 한데, 신림동에서부터 날 따라온 건 아닐 테고, 수원엔 어쩐 일로 왔는지 알려주고 붙으면 안되겠냐? 왜, 또 터질까 봐 자신 없어?”
“거, 새끼 참 말도 많네. 여기 북문파가 우리 이글스하고 형제 먹은 것도 모르고 전국구라고 까부냐? 너는 대체 소속이 어디야? 아까 보니까 북문파 오야붕 대행하고 만나는 것 같던데?”
약발 받은 해삼이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해삼은 이글스파 오야붕의 지시로 암암리에 북문파 오야붕 권한 대행인 서열 3위 중간보스 장훈교의 뒤를 밟고 있는 중이다.
구속된 북문파 오야붕이 자기 중간보스들 세 명도 함께 들어가게 되자, 조직의 자금도 관리하는 장훈교를 대행으로 지정은 했지만 그냥 두고 관망하지는 않는 것이다.
은밀히 자기 우군인 이글스파 오야붕에게 밀지를 보내서 대행인 장훈교가 제대로 하는지 살피게 한 것이다.
특히 두 놈을 보내 장안농장을 급습해서 자기들 북문파의 비행을 캐낸 배후 조직이 어딘지 알아봐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서울 서남부 최대조직으로 손꼽히는 신림동 이글스파는 토착형 폭력조직으로 50대초반 윤OO가 오야붕이다.
1978년 고등학교 불량서클에서 시작된 이글스파는 신림동 일대 중, 고교 폭력서클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일진’들과 접촉하며,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하면 조직의 회원으로 가입시켜 조직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글스파는 자기들 이글스파와 상도동파, 시흥동 산이슬파 등이 연합하여 1999년 신 이글스파로 재탄생하며 세력을 키웠고, 관악구와 동작구를 근거지로 하며 조직원은 추종세력 65명을 포함해 총 100여명이 활동 중인 ‘족보 있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소규모 유흥업소와 보도방 업주, 여성 도우미 등 40여명으로부터 수억 원을 갈취하고 있으며, 주상복합아파트 재건축 시행사 대표를 협박해 6억원을 갈취한 적도 있다.
이글스파는 악랄한 범행수법으로 유명한데, 업주들이 상납을 거부하면 비가 쏟아지는 대로변에 무릎을 꿇리고 폭행하는가 하면, 옷을 찢어 알몸으로 만든 뒤 맥주병으로 머리를 수 차례 때려 피투성이로 만드는 등, 신림사거리의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뭐? 너네 이글스파가 북문파하고 형제 먹었다고?”
이런 무시무시한 폭력조직인 이글스파가 구속된 북문파 오야붕의 사주를 받고 있는 줄 모르고, 북문파 권한 대행과 만나서 밀담 나누는 장면을 들켜버린 문도가 지금 이글스파 해결사인 해삼과 일전을 벌이려고 마주보고 입씨름을 하다가 그 비밀을 알아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