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보고 싶었어, 누나
살랑 살랑 기분 좋게 부는 바람. 봄을 준비하면서 땅에서 내보내는 특유의 냄새. 어스름한 저녁 밤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 세 개. 마침 이어폰에서는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곧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설렘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하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기분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가 집으로 가고 싶은데, 세관을 통과하자마자 기자들에게 에워싸일 것이다. 보고 싶은 엄마와 인영을 눈앞에 두고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인터뷰를 해야겠지. 최대한 짧게 인터뷰하고 얼른 엄마와 인영을 만나 집으로 가리라. 중국에서 영화촬영을 하느라 가족들을 제대로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형. 기자들 많이 왔을까?"
"말이라고 해? 너 중국에서 영화 촬영 끝내고 공식적으로는 처음 들어오는 건데."
매니저 성진의 대답에 하진이 한숨을 쉬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엄마랑 누나 공항에 나온다고 했거든. 많이 기다릴까봐."
"인영 씨도 나온대? 평일인데? 빨리 퇴근했나 보네."
성진은 혼자 묻고 대답하더니 먼지가 묻지도 않은 하진의 상의를 털어주랴, 얼굴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피랴 부산을 떨었다.
"밖에 팬들 많아서 혹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기자들도 많이 오고 인터뷰도 길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인영 씨한테 전화해 놓을까?"
"아냐. 늦을 거라고 얘기해놓긴 했어. 나가자, 형."
하진은 심호흡을 한 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입국장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팬들의 환호가 하진을 감쌌다. 예상대로 평소보다 많은 기자들, 많은 팬들이 하진을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하자 한숨이 나오려했지만 한류스타답게 완벽한 미소와 세련된 제스처로 팬들의 환영에 답해주었다.
인영은 저 멀리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하진을 보며 엄마미소를 지었다. 대견하다, 대견해. 한류를 이끌고 있는 내 동생 차하진. 다리미판으로 써도 될 것 같은 넓은 어깨,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잔 근육과 힘줄이 가득한 팔뚝, 바지를 입었음에도 느껴지는 탄탄한 허벅지까지. 거기에 얼굴은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외모에 실력까지 갖춘 한류스타에게 이런 뜨거운 취재 열기는 절대 과한 것이 아니다. 그럼, 당연하고말고. 오구오구 이쁜 내 동생,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진심으로 대견해 마음이 벅차오른다.
"이모, 좀 전에 하진이 나올 때 얼굴 보셨어요? 하진이 인물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중국 물이 잘 맞나 봐. 근데 어떻게 이모 뱃속에서 저렇게 생긴 애가 나왔지?"
인영이 대기 의자에 앉아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발에 열이 많아 어디에서나 신발을 벗는 것은 인영의 오랜 버릇 -이모가 질색하는- 이다.
"어머~ 얘는. 내 뱃속에서 나왔으니까 저런 얼굴이 태어나지. 너 하진이가 나 어릴 적이랑 똑같이 생긴 거 모르는구나? 내가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어디 가서 절대 빠지는 얼굴 아니다? 그리고 너! 내가 아무데서나 그렇게 신발 벗지 말랬지."
"이모는~ 웃자고 한 소리에 센스 없게 정색하고 그래요. 이모 예쁜 거야 내가 알고 하늘이 알고 온 세상이 알지."
구두에 슬쩍 엄지발가락만 걸친 채 인영이 배시시 웃었다.
"너 은근슬쩍 발가락만 걸칠래?"
"발에 땀이 차서 그래요. 그래도 많이 고쳤는데. 다른 데선 잘 안이래요. 지금은 이모 앞이니까 벗은 거구요."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봐. 어쩜 버릇까지 닮았나 몰라."
그래, 엄마도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곤 했었다. 문득 엄마의 발이, 유난히 발볼이 좁고 발가락이 길어 칼발도 이런 칼발이 없다고 놀리던 날이 떠올랐다. 이씨, 엄마 보고 싶어. 아까 원장님 방에서 원무팀장이 부모님 얘기를 한 이후로 순간순간 엄마와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인영은 엄마의 발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얼른 자신의 발을 구두 속으로 감추었다. 여기서 엄마 생각을 더 했다간 이모 앞에서 울지도 몰라. 인영은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모, 오늘따라 인터뷰가 긴 거 같죠?"
"그러게 오늘은 무슨 인터뷰가 이렇게 길고 난리래? 우리 아들 얼굴 빨리 보고 싶은데."
인영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화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 같아. 입술을 내밀고 아들을 기다리는 화진의 모습에 하진의 얼굴이 겹쳐졌다. 하진도 입술을 내밀면 꼭 저런 얼굴이 되지. 혈연이란 이렇게 본인들이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레 연결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모도 나를 보고 엄마를 떠올리겠지. 엄마를 떠올려주는 이모가 곁에 있음이, 그런 이모의 아들인 하진과 친형제 이상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음이 새삼스레 감사하다. 고마워요 이모. 인영은 화진의 어깨에 기대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십 분은 족히 더 기다린 끝에야, 드디어 인터뷰를 끝낸 하진이 소속사 직원들과 함께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인영은 벌떡 일어나 저만치 도망가 있는 구두 -아무래도 구두에 발이 달린 것 같다!- 를 꿰어 신고는 핸드폰 액정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하진이 지나치게 잘 생긴 덕분에 생긴 버릇이다. 적어도 한류스타 하진이 옆에서 오징어처럼은 보이기 싫건만, 몇 번이나 하진과 있는 사진이 팬카페에 올라왔었다. 혹시 주차장에서 사진이 찍힐 수도 있으니 틴트도 한번 덧발라주었다.
이제 하진이가 직원들과 헤어져 이모 차로 올 것이다. 인영은 화진의 팔짱을 낀 채 주차장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동안 너무 오래 못 봤다. 실컷 얼굴 보면서 힐링해야지. 얼른 보자, 내 동생 차하진.
"엄마! 나인영!"
하진에게 문자로 보내놓은 주차장 3C 구역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얗고 고른 치아 20개를 드러낸 -활짝 웃으면 늘 20개의 치아가 보인다. 이건 팬들이 인증한 사실이다!- 하진이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게 보인다. 뛰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오랜만의 모자 상봉을 위해 인영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성큼성큼 다가온 하진이 화진을 안은 채로 인영을 보며 웃었고, 인영은 ‘우유빛깔 차하진’ 이라는 글씨가 번쩍번쩍 흐르는 스마트폰을 장난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진이 상쾌하게 웃으며, 엄마를 안은 채로, 한 팔을 뻗어 인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들갑 떨지 않아도, 심지어는 말로 하지 않아도, 그저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애가 마음으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별일 없었지? 아프진 않았구? 나 드디어 촬영 끝냈어. 보고 싶었어,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