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는 며칠째 뒤숭숭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것은 자신이 왜 뒤숭숭한지도 모른다는데
포인트가 있었다. 괜히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것들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제이미 데이비스-
그는 그의 말대로 정말 일을 잘 했다. 붙임성이 몹시도 좋아 김 간호사와 금방 친해졌다. 격의없이 말을 잘 걸고-
또 깔끔해서 일 처리가 정말 꼼꼼했다. 입원한 동물들의 입원 일수까지 줄어들게 했다.
그의 말 그대로
동물들은 하나같이 그를 따랐다. 오히려 의사인 자신에게도 이를 드러내던 강아지들도 그가 치료하는 내내 붙들고 있으면
꽤 참을성 있게 치료를 참는것 같았다. 고객들도 처음엔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친해지고는- 부러 인사를 하러 들르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원체 붙임성이 좋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 거는 것도- 또 생글생글 웃어대는 것도.........
현호의 아버지는 외과의였다. 늘 바쁘셨다는 것 밖에 아버지에 대해선 더 할말이 없었다. 개인병원 개업 후 큰형도 작은 형도
둘다 의사가 되었다.
막내이기에 늘 특색없이 살다 마지막으로 한 반항아닌 반항이 그를 수의학의 길로 이끌었다.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다... 순수한 , 그 욕심없는 눈망울들을...
물론 아버지는 실망하셨고- 어머니도 실망하셨다. 그렇다고 일이 바쁘단 이유로 동물 병원 위의 옥탑방에서 자면서
며칠을 집을 기피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좀 슬펐다.
부모님이 자신을 썩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시는건 알았지만 말이다.
쓸쓸한 감정 속에 옥탑 위 평상에 앉아 있으려니 제이미와 마주쳤다.
그를 고용하고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건 이틀 만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집에 가신 줄 알았네요-"
그는 옥탑방 옆의 작은 보관창고에서 청소용 펄프지를 꺼내러 온 듯했다. 쾌활하게 건내는 인사에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 어쩌다 보니까요- 간혹 여기서 지내곤 하거든요-"
"이제 추울 텐데요-"
간단한 말인데도 억양이 아주 정확했다. 그러곤 바로 옆에 앉았다.
현호는 머쓱하여 괜한 이야길 꺼냈다.
"정말 일 잘 하시던데요? 병원이 깨끗해진게 티가 나요-"
칭찬을 건내자 제이미는 생긋 웃었다. 정말 기쁘다는 듯이-
"고맙습니다-"
현호는 막연한 호기심이 일었다. 제이미가 여기까지 흘러온 경로에 대해서- 그러나 실례일것 같아서 묻질 못했다.
그의 눈에는 정말 알수 없는 힘이 있었다. 괜한 걸 털어놓고 싶게 하는- 그리고 그런 그를 궁금하게 하는 어떤 것-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이미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현호로는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우울하신가 보군요-"
"......"
현호가 이렇다할 수긍을 하지 않자- 제이미는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이 때문에 쉽게 우울해하죠- 하지만 그건 지나가고 나면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랍니다.
그야 말로' 다른'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저 스스로한테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해요-
'내'가 지금 저 사람때문에 불쾌하지만- 저 사람도 자신만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우선은 이해하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면 곧 그 사람을 잊게 된답니다-.... 모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게 있죠-
그리고 지나고 보면 누구나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는사람을 싫어하더군요-"
제이미의 말은 묘하고- 구심점이 없이 상황을 에두르는 말에 불과했으나 마음이 편해졌다. 왠지 그랬다.
" 그래서 저는 , 다른 사람에게서 그걸 배웠죠- 우울하고 , 힘들고- 불행할때일수록
상쾌한 얼굴을 하기로요-... 그런 얼굴을 하면 보통 불행은 도망가기 마련이거든요- 그것이 어떤 불행이던 말이에요-"
외국인이- 이런 말을 어색함 없이 , 입으로 술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 문법도 정확했으며 억양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놀랍도록- 그리고 목소리엔 맑은 힘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맑은-
현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해요?"
제이미는 질문을 듣자 소리내어 웃었다. 가지런한 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해사한 웃음이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한국인이었어요- 그 아이때문에 배웠죠-... 그 아이의 혼잣말들을 들었던 기억으로 억양을 익혔죠-
열심히 배웠어요- 그리고 언어 습득 기술이 생각보다 , 빠른지 이렇게 하게 되었죠-"
사랑하는 친구...?
점점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친구가 있어요 ? 한국에?"
제이미는 또 웃었다. 그러곤 대답했다.
"와서 사귄 친구가 더 많죠- 절 한국에 오게 한 친구는 지금 아프거든요-"
"........."
의외의 대답이었다. 쾌활하기만 해서 그런 일은 전혀 없을 줄 알았기에....
제이미와 대활 더 나누고 싶단 생각을 은연중에 자신도 모르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생각을 하자마자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자지만 정말 예쁘게- 정말 예쁘게 웃으면서
아주 생긋-
"그럼 전 내려가 볼게요-... 제 말 한번 들어보세요-
우울할수록 상쾌한 척, 웃어보세요-
정말 상쾌해 질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갔다. 그에게서 풍기던 묘한 향내만 현호의 주변을 감돌 뿐이었다.
바람이 선선하다 못해 쌀쌀하게 불어왔다.
혼자남은 현호는 아주 어색하게... 살짝 웃었다. 제이미의 말처럼 최대한 상쾌하게-웃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때부터였다.
잘 정돈되 있다고 생각했던 현호의 내부에서 왠지 균열이 일어난것 처럼 느껴졌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 부스럭 부스럭 마음에서 뭔가 떨어지는 기분...... 그 기분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현호는 그 뒤 내내.... 그저 뒤숭숭했다.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알아채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것 같았지만 말이다.
-
우린 생각보다 재밌게 오후의 데이트를 보내고 있었다. 실없는 질문을 실컷 하고나서- 그가 생전 다시 먹을 일 없을줄 알았다던
중국요리를 시켰다. 그는 그 결정에 투덜투덜 거렸지만.... 싫어할줄 알았어, 라고 중얼거리자 그는 더 이상은 왈가 왈부하지 않았다.
나는 배달 오기전에 집에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그가 부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편해 보여- 원래대로 하고 있어도 이쁘니까- 편한 옷 입고 와-"
일부러 꾸몄던 거였기에 좀 김이 새는 건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도 읽었는지 내게 덧붙였다.
"어떻게 하고 있어도 예뻐- 지금도 이쁜데- 원래도 예뻤어- 그러니까 , 갈아 입고 와-" 라고....
부끄러운 칭찬을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 칭찬을 칭찬 아닌듯 건내면서.....
편한 옷을 입고 돌아오자 그는 정말로 반가운듯 반색을 했다. 나는 그 사실이 머쓱했고- , 그 일때문에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하는 곧잘 면박을 주었다. '그래도 데이튼데- 옷이라도 좀 갈아 입고 있지' 라면서- 늘 편한 차림이라며 선머슴 같다며-
그러다가도 그래, 털털하네- 라면서 칭찬의 탈을 쓴 면박을 줬었기 때문이었는데.... 작약은 오히려 이 차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것 같아 보였다.
"린넨이네-"
그가 웃으며 묻기에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린넨이죠-"
그때쯔음 음식이 오고 그는 몹시 정갈한 손길로 젓가락질을 했다. 놀란건 놀랍도록 올곧게 젓가락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엉망인데... 그래도 명색이 내가 손 쓰는 사람인데 나는 내키는 대로 배웠기에 엉망이었다- 그는 내게 한마딜 툭 던졌다
"젓가락질이 엉망이네-"
나는 약간 새침해져서 대답했다.
"그런 노래 몰라요?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은 잘 먹는다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에도 근사한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 것 만으로 가슴이 콱 하고 설레인다.
그는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문명에서 떨어져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노래정돈 알아... 너무 무시한다-"
그의 가는 손가락에 감겨있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일회용 젓가락- 그는 단 한방울도 안 흘린다.
튀지도 않는다... 먹고 있다는 걸 씹고 있다는 걸 보고 있는데도..... 좀 현실과 괴리가 있다 그래야 할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듯한 , 빨갛고 오만해 보이는 입술-
나는 당연한 사실을 결국 묻는다
"먹고는.... 있죠? 진짜 얌전하게 먹어...... 그것도 따로 배운 거에요?"
그는 그 말을 듣고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그런 면에선 어머님이 좀 엄하셨거든- 어릴때도 그랬어.... 그러다 보니 습관이 붙은거지-"
정갈한 손길에 자꾸만 눈이 가자 그는 내가 웃으면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맛있게 먹는게- 좋아보이는 습관인거야.. 지나보니 알겠더군-"
나는 무연히 젓가락질을 했고- 그는 서툰 내 젓가락질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다정하게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작가부터- 그림에 대한 이야기, 아주 사소한 것도 말하고 재밌어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해 왔던 것 보다도... 내가 푹 빠져 있던 것 보다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니- '더 좋은 사람' 이었다.
믿을수가 없지만 말이다-
내가 빠진 그 순간부터 그가 어떤사람이던 내겐 '좋은 사람' 이었지만
한꺼풀 벗겨내고 보니
정말 '좋은사람 이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배려가 넘치고-
더 조심스럽고-
더 , 바보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동안 그토록 망설이고- 어두운 곳에 있었던게 안타까울 만큼이었다.
그는 말 하는 중간 문득문득-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모른척 했다. 그리고 그의 한 손만 잡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한쪽' 손 뿐이야.
잊지 않도록, 내가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그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까지.....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사랑에 대책없이 설레여 하는 , 성난 말 같은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감정은 극도로 예민해서- 작은것에도 쉽게 기뻤으며 작은 일에도 쉽게 질투의 감정을 품었다.
그런 감정을 감추는 게 - 생각한 만큼 쉽진 않았다.
위안은 단 하나였다. 그의 맑은 눈에 가득 찬 사람은- 그의 손을 잡은 사람 중 온기가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다소 비열한 위안이었다.
적어도- 생기는 내가 더 강할꺼라는- 실낱같은 믿음이었다.
"진짜 영화 안봐도 괜찮겠어?"
작약은 걱정스런듯 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쓴다-
"보고 싶은거 있었던거.... 아니야?"
되 묻는다 조심스럽게- 나는 도리질을 하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니요... 그냥 다들 그러니까... 그래야 하나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이랑 이야기 하는게 더 좋은데요 뭘...."
그 말에 작약이 뭔가 거슬리는 듯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그리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당신이란 말 대신-다르게 불러 주면 안돼?"
그의 말에 난 갸웃거렸다. 내내 당신 당신 했는데- 당신이 더 좋지 않나? 정감가고..
"당신이란 말이... 싫어요?"
작약은 재밌단 듯이 웃으며 덧붙인다-
"... 무슨 의미로 그러는진 알겠는데-... 그쪽- 이라고 보통 말할때 부를 말 딱히 없으면 그쪽 그쪽 그러잖아... 그런거 같아서-
이름 부르기가 어색한가.. 아니면 "
그가 좀 망설인다-
"내가 한살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 오빠라 그러기가 어색한가 해서.........."
그의 얼굴이, 빨갛다- 귀까지.... 난 처음엔 이게 무슨.....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다시 보니 심한 부끄러움인거 같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부빈다- 그러더니 다시 이야기 한다.
"이름, 이름도 괜찮아-"
그는 급하게 정정한다- 나는 그걸 보고 웃는다- 내 웃는 얼굴에 그는 살짝 화가 난 듯 눈매를 사납게 뜬다
예전과 다른건 그 얼굴이 귀여워 보이지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는 거다.
"웃지마-"
"아니... 우스워서 웃은게 아니라요-... 부르라면 부를 순 있는데.. 생전 오빠가 없었어서- 입에 딱 처음부터 붙진 않을거에요-
어쨌든....."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내 그런 태도에 그는 그런 요청을 한 자신의 혀를 씹어버리고 싶어하는 표정이다-
"....됐다구- ... 그냥 당신이라 그래-"
나는 심술궃게 히죽 웃으면서 덧붙였다.
실컷 당황해 보라고..
"아니에요- 지혁오빠-"
"아.. 진짜...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장난치고 싶게 자꾸만 당황하니까- , 반응이 재밌으니 멈출수가 없다..
모르는 척 갸웃 거리면서 또 말해본다
"아니면.. 지혁아?"
그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뜬다.
"됐다구- 그리고 지혁아라니... 내가 니 친구냐?"
그 말에 내가 웃는다.. "처음엔 친구하자고 내가 그랬잖아요- 그럼 친구지..."
그는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는지 괜히 머리나 긁적인다.... 요령없긴-
"그럼 , 오빠? 이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거에요-???"
내가 자꾸만 놀리자- 그는 빨간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 살짝 정색하면서- 내가 바짝 다가와서 대답한다-
"그래- 뭐라 그래도 듣긴 좋네- ... 오빠라 그럴거야 이제?"
......바싹 닿아있는 얼굴- 나는 눈을 살짝 감고 말았다.
한참만에 눈을 뜨자 그는 내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개구진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서
"왜 눈은 감는데?"
그는 심술궃게 물었다.
흠흠....
나는 겨우 얼굴색을 다잡고 대답했다.
"...... 바짝 다가오지 마요-...."
내가 할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
장하임이 빙글빙글 자꾸만 날 놀리기에 바싹 다가서서 장난을 좀 쳤더니..
곧 얌전해지고 만다. 난 살짝- 떨어졌다. 그녀는 좀 새치름해지고 말았다.
"장난이야- 화났어?"
내가 묻자 그녀는 아니라면서- 괜히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친다-
나는 그 행동에서 어쩔수 없이 하민이를 떠올린다. 하민이가 곧잘 하던 행동이다-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차는 행동-
오늘 온종일 웃었는데... 잠시라도 잊어야지 했는데.....
방심할 때마다- 심장을 안 막고 심장이 비어 있을 때이면 때마다-
여지없이 피가 쫙 새는 것 처럼 심장에 비릿하고 아릿한 기운이 번지는 기분이다.
'잊지 말라' 는 경고처럼-
그때마다 표정이 이상해질 테고- 그럴 때 마다 하임은 내 얼굴을 살핀다. 아픈가 싶어서 걱정이 되는 듯이 나를 살핀다-
강비서가 뭔가 잘못 전한거거나... 아니면 내가 그 만큼 자주 아팠거나 둘중에 하나겠지만 둘다 반갑진 않았다.
나약하다는게 좋은건 아니니까-
나는 애써 , 통증을 무시하면서 그녀의 옆에 붙어 앉는다- 그녀는 아까 내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해서-
큰 오버사이즈의 린넨 셔츠에다 안에 흰 티셔츠를 받쳐 입은- 자주 보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정말 더 예뻤다.
자연스럽고-.... 그녀에게는 그 차림이 진심으로 잘 어울렸으니까-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머리-
"우리 다음에 여행가자-... 사람들 잘 안 오는곳이 있거든-"
내가 전혀 다른 이야길 꺼내자 ,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되 묻는다-
"그런데를... 알아요?"
"나한테 외삼촌이 여러분 계셨거든- 어머니 집안도 , 형제가 많은데다 경영권 다툼이 살벌해서-...
막내삼촌은 애초에 다른 직업군으로 가셨어-
무의미한 다툼이 싫어서라고 하셨지만- , 재능이 있으셨거든.... 조각가셨어-"
장하임의 얼굴이 감탄으로 빛나다가 조금 어두워진다. 어떤 기억을 떠올린건지- 차마 묻진 못하지만...
장하임도 내가 저런 얼굴일때마다 이런 감정일까.. 묻고 싶지만 알기에 묻지 못하는..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진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생각중인걸까.... 우리가 이렇게 되었지만 ... 어쨌든 대답은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괘념치 않은 척 말을 잇는다.
"결혼도 안하시고 , 혼자 사시다가 , 일찍 돌아가셨어....... 그런데 그 삼촌이 나를 예뻐하셔서-
경주 외곽에- 있는 소유 별장을 내 앞으로 남기셨어-..
다른 가족들도 거긴 안와- 어차피 나한테 있는거니까-"
내 말에 그녀는 놀란 듯 했다... 아... 이런 말은 자기 자랑 같을래나-
"삼촌이 정말 나를 예뻐하셔서-..나한테 주고 돌아가셨어... 그리고 거기엔 아틀리에도 딸렸거든- ... 당신이 좋아할것 같아"
"당신에게... 주셨어요? 그냥?"
나는 조금 머쓱했다. 그러곤 변명처럼 대답했다.
"따로... 자식도 없으셨으니까-"
삼촌은 정말 나를 예뻐하셨다. 늘 말씀하셨다. 너희 엄마랑 왜 이렇게 닮았느냐고-
삼촌은 어머니를 유달리 예뻐한 막내 오빠였다.
어머니도 막내 삼촌만은 진심으로 따르셨다. 그런 삼촌이 아프셨을때... 난 철없는 놈이었고- 제때에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할수 있는 모든 의사를 찾았지만 ,그리고 치료받자고 삼촌을 설득하셨지만...
정작 삼촌은 올게 왔다는 듯한 태도셨다. 어머니는 그 점이 야속하신것 같았다.
자주 다투셨다. 조금이라도 치료해서 살수 있으면 살아야 한다고 , 나한테 진정한 가족은 이제 오빠 하나라고....... 어머니는 매달리셨지만
삼촌은 천하 태평하셨다... 아마도 눈치보는 형제들 사이에서 지독히도 외로우셨을 것이다. 나는 내가 자라고- 이 상황까지 오고 나서야
삼촌을 비로소 조금 이해할수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거 떠나고 싶단 그 맘을...
물론 당시엔 잘 몰랐고 난 삼촌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내지 못했다.
삼촌은 그런 내게 늘 따뜻하셨다. 그야말로- ... 따뜻한 사람이셨으니까..
삼촌이 내게 별장을 남겨주셨단건....
어머니도 대충 눈치만 채 셨을뿐 나와 삼촌사이의 비밀 비슷한 것이었다.
내가 한참뒤에 그 별장을 찾았을때- 거긴 생각보다 청소가 잘 되어 있었다.
전문적으로 관리하시는 분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다녀가신 덕분이었다.
삼촌은 아프시던 그 와중에도 내게 물려 줬다는 말까지 하셨는지- 유달리 조용하신 그 분들은 날 이미 알고 계셨다.
내게 목례만 간단히 하고 자릴 다시 비우셨다.
삼촌의 아틀리에에는 빛이 가득 들었다.
손 조각들이 창가를 따라 놓여 있었는데- 그 중엔... 누가 봐도 어머니의 손인 조각도 있었다.
삼촌의 존재를 절실히 느꼈다.
왜 소중한 존재들은 이리도.... 금새 떠나고 말까.... 나는 그 빛이 드는 창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뒤, 아주 가끔이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때 거길 가곤 했다.
하민이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나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돌아보니 미안한 일이었다.
하민이에겐 자신만의 공간이란 없었으니까.. 언제나 '우리'의 공간만 있었지......
"정말 조용한 곳이야-...
거창한 곳은 아니지만- 경주 근처에 바닷가 있잖아- 거기도 조금만 나가면 있고-......
가끔 생각하고 싶을떄 갔었어....."
장하임은 내가 삼촌을 생각하는 내내 , 좀 슬퍼보였는지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는다.
아무리 자연스런척 해도 조금은 아직 ... 어색한듯-
"한참 전 일이야.... 삼촌은 나름대로 , 행복한 인생을 사셨던것 같아-.... 아프셨던건 굉장히 슬픈 일 이었지만-
오히려 내게.. 아버지 같이 자상하셨어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시고- 말해주시고... 그러셨었지.."
벌써 해 질녁이다 , 조명이 살짝 어두워진것 같다. 우린 오늘 하루종일 서로에 대해 이야길 했다... 사소한 얘기부터 좀 더 깊은 이야기 까지-
그래도 아직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이 가깝다는건 이래서 안 좋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라도 , 맘만 들면 돌아갈수 있으니까-
같은 공간에- 일정시간 이상 있으려면 , 핑계가 필요하니까....
우리 사인 아직 핑계가 많이 필요한 사이였다.
어찌하던 명분이 필요한 사이....
"경주쪽에 그런게 있을줄은 , 몰랐어요-"
그녀는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하긴 나도 그랬다. 형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 보통은 경기도쪽에 그런걸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어차피 그쪽것은 쓸 일이 없었다.
근처에 가기만 가면 다들 거기 눌러 앉을까봐 전활 해대서 , 쉬긴커녕 더 힘들어 졌으니까-
하민이 때문이었다. 모두가 내가 경기도 이야기만 꺼내도 다들 깜짝 놀라곤 했으니까..
그대로 거기 눌러 앉아서 하민이를 떠나지 않을까봐서 성가시게 전활 해댔다.. 징하게도-
"응 ..나도 처음엔 좀 놀랐어- 거기가 당시엔 아마 좀 비쌌을거야.. 삼촌이 조각가로써 성공하신 편이긴 하셨지만... 그정도 돈은 아마...
..... 원래의 삼촌 몫에서 좀 나온것도 있을거야.. "
다른 외삼촌들이 뺏고 빼앗겼어도... 아마 조금정돈 삼촌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흐음.."
그녀는 뭔가 골똘한 표정이다. 나는 그녀의 그런 표정이 좀 겁난다. 예전의 여자들에겐... 이런 말을 해주는게 , 솔직하게 말하면 즐거웠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재력이나 그런걸 슬쩍만 과시해도 날 좋아한다는 티를 대놓고 내는 여자들이 꽤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여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혹시라도 그런걸 자랑이라고 생각하거나.... 복잡하게 맘 먹고 이 여자가 도리어 물러날까봐서 였다.
"경주 가본적.. 있지?"
내가 기다리다 초조해 성마르게 묻자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수학여행?... 그것 말곤 가본적 없네요- 늘 가보고 싶긴 했었어요 근데 왠지 시간이 안됐달까.. 그랬네요-"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가보면 되지... 당장에 못 가는건 좀 미안하지만 말야-"
그녀는 픽 하고 웃더니 대답한다-
눈을 아래로 내리 깔면서 마치 부끄럽다는 듯이.....
".......여행가려면..... 좀 더 가까워져야 되지 않겠어요?"
조심스럽지만 , 가벼이 들리게 조절하는 목소리
왜일까,
그 말에 난 되려 놀란다
무슨 이야길 , 하는건지- 지금 우리는 서로 충분히 가까운거 같은데....
나는 약간 웃음기 섞인- 그러나 나답지 않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리.... 지금 충분히 가깝지 않아?........ 나에 대해, 그래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중에 한명은... 아마 지금... 당신일텐데"
머쓱해 하면서-
내 의도하지 않은 고백에 그녀는 당황했다는 듯 그녀도 살짝 웃었다.
그 말을 하고선 난 내 스스로가 좀 싫어졌다. 마치 나는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여기고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이미.... 내 손을 잡았단 이유로 우리의 사이를
내 감정의 깊이로만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고려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제쳐두고 말이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묶어뒀던 감정들은 풀려나자- , 오래도록 매여 있었던 말처럼- 모두가 뛰어나가, 하나도 잡을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댔다. 그것이 심장인지 감정인지.. 혹은 잊고 있었던 행복감인진 알수 없었지만..
"... 글쎄요- 당신이 생각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 제가 발 맞출 시간도 주셔야죠-"
장하임은 부끄럽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내가 했던 생각을 다 털어놓을순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발 맞출 시간이 그녀에게는 진정으로 필요했을테니까
"그래 미안해- 내가 성급했네-...."
내 얼굴에 그녀는 영문 모르게 살짝 서운해 하는 듯 하더니 곧 표정을 쾌활하게 바꾸었다.
그러더니 모양 좋은 입술을 살짝 올려 미소지었다.
"당신은 ,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어떤 문턱을 넘은 사람처럼, 아니 어떤 벽을 뛰어 넘은 사람처럼 보여요-
예전의 당신이 나한테... 어땠는지- 기억나요?"
그녀는 씩 웃었다.
"기억나지 왜 안나-.... 내가.... 그랬지..."
문턱.... 벽..... 그녀의 목소리로 들은 내가 갖혀있던 어떤것들은 , 더욱 새삼스럽게 들렸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랬다. 이 따뜻함이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데도 마음속의 소릴 죽어라 무시해야 했다.
김박사를 찾아갔던건- 말의 답보다도- 내가 출발해도 좋다고, 가야 한다면 가도 좋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김박사는 분명 내게 가라고 말해줄 사람임을 알고서 간 것이기도 했기에 정직하진 않았다.
그래도 필요했다 그녀에게 갈 이유가
내가 그녀를 가질만한 이유가...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녀에게는 그 남자가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라면 ... 나는 좋은놈이 아니고.. 또 완전히 그녀를 잡아줄수도
어떤 미래를 약속해줄수도-...그녀만 위해줄수도 없지만 , 그 남자는 그럴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남자의 눈에서
나는 많은것을 읽었다. 이 남자가 오래 기다렸다는 것도- 친구이기 때문에 고백을 참고 있다는 것도
장하임이 좋아 죽겠다는 것도- 그런데도 잃을까봐서 말 못하고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장하임을 몹시 위하고 있다는 것도........ 무엇이든 해 줄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이기심을 부려본건 그만큼 이 여자가.. 눈 앞의 이 여자가 탐났기 때문이었다.
지혁은 가볍게 그녀의 볼을 쓸었다. 둘의 눈이 맞닿았다. 그녀의 수줍은듯한 볼이 사랑스러웠다.
가기로 한 이상 , 더 이상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지혁은 살짝 눈을 감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눈을 떴다.
또 다시 살짝 눈을 감고있는 그녀의 얼굴이 마음속에 소리없이 새겨졌다.
기뻤다.
기쁘고도 행복했다. 이대로도.... 충분히-
-
세진은 혼자 술을 마셔도 어색하지 않은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혼자이고 싶었다. 누구랑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하임이 아니라면..
작업은 아직 한창이었지만
오프를 내고 , 혼자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업에 집중할수... 당연히 없었다.
지옥이었다. 하루 하루가...
숨이 막혔다. 참을수 없이.....
기다림은 심장을 꽉 쥐는듯 조여왔다.
10분... 아니 5분에 한번씩 핸드폰을 확인했다. 쉴새없이 핸드폰에 손을 가져갔다.
실망감만이 있을 뿐인데도...... 아니... 적어도 전화는 해 줄거라 생각했다. 내가 충격을 줬다고 해도-
그녀에게 또 다른....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지금쯤은... 적어도- 지금쯤은.....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 아무런 말도-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지금 자신은 몹시도 불행했다.
스스로가.. 딱하도록 지독히도 불행했다.
자신이 침착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백하는게 아니었다. 준비한 대로 - 좋은 곳에서 찬찬히.... 그런데
그 남자와 있는 하임을 보자 자신은 냉정을 완전히 잃었다.
벌써 하임은 그에게 마음을 다 준 사람처럼, 웃고 - 그녀의 애틋한 시선은 줄곤 그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걸 알곤 있었다. 그걸 내심 눈치 챘음에도 외면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눈으로 목격하고 나자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말해버렸다. 우리의 시간을 신뢰했기에 절대로- 단칼에 거절당하거나
할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세진은 술을 또 다시 머금으며 그 쓴 맛에 맘까지도 써서 술이 잔뜩 섞인 숨을 뱉었다..
내 입술에 닿던 그녀의 따뜻한 이마-... 그리고 내 작은 소파에서
이별의 상처를 안은채 잠든 하임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녀가 너덜너덜해져 있는걸 알면서
내 감정을 그곳에서 강요해야 했을까....
그렇게 긴 시간을..... 그녀를 기다렸기에 - 그때는 내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에 난 기다릴수 있다고
아주 잠시니까... 조금만이라도 더... 라고 생각했다.
그러고서 나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이제는 옳은 선택을 해야한다고- 내가 내 입으로 말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게 옳은 선택이 될 자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내 가슴으로 그녀를 위해서 모든걸 다 해줄 자신이 있었다.
뻔뻔하다고 해도 , 분명한 자신이 있었다. 아주 분명한 자신이......
그녀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줄수 있는 그녀를 잘 아는 ..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자신할수 있었다...
나도 연애를 한번도 안 하고 살아온건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잔인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하임의 자리에 잠시 있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언제나 마음속엔 한 사람 , 단 한사람
하임 뿐이었는데-
독한 술이 입술을 스쳤다. 속이 따가웠지만 마음보다 따가울것 같진 않았다. 세진은 연락없는 전화기를 쳐다보는
끊임없이 확인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전화기를 꺼 버렸다. 더 이상은 쳐다보지 않도록-
술이 자꾸만 더 고팠다. 그녀 생각을 잠시라도 멈출수 있다면 얼마나 마셔도 상관 없었다.
세진은 냉정한 편이었다.
언제나 자신은 냉정했는데- 말도 안되게 술잔에 술을 채우는 자신의 눈 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에
눈을 훔치자- 어이없게도 물기가 묻어나왔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 대답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녀를 포기할수 있을까?..... 아니....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할수도 없다.......
그러고 싶지가 않아,
그녀의 눈부시게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그 밤의 다리에서 그녀에게 구두를 신겨주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가로등 빛에 비치어 오던 그녀의 물기어린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녀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아는 그녀- 하임은 그렇게 많은 색깔을 지닌 ... 그런 사람이었다.
그 신발을 신고 내게 오기를 바랬다. 꼭 내게 오길-
세진은 그 순간의 눈부시던 하임을 떠올리고 마음속에 차오르는 서러움을 억누른다.
그리고 애써 또 술잔을 비운다.
아주 잠시라도 , 아주 잠시라도 그녀를 잊고 생각없이 있을수 있길 기도하면서-
그러나 반대로 술잔을 비우면 비울수록.....
하임의 얼굴만 , 그 웃는 얼굴은 마치 사진처럼 더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