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우정이라는 심연(深淵)Ⅱ
나는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차례로 쳐다봤다.
짧은 순간 스에마쓰 아야코의 눈가가 떨렸다.
왜 그러지 내가 잘못 말했나?...
그때는 잘못했다.
뒤에 알았지만 ‘사요나라 황제별’은 아야코가 그린 웹소설과 웹툰이고 ‘열일곱 수상
히라테 시리즈’는 이시하라 유우가 그린 웹소설과 웹툰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두 작품이었다. 웬칸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라 안 본 사람은 있을지라도 한번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였고, 광적인 팬덤이 형성될 정도로 대 히트를 쳤던 웹소설과 웹툰이었고 책으로 판매되어 수천만 부가 팔렸던 작품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게 뭐가 대단한 만화라고 고등학생들이 만화에 빠져 사족을 못 쓰냐?
비틀즈 한정판도 아니고, 만화광 일본인들은 역시 다르네, 문화가 달라서 그런가, 민족이 달라서 그런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아야코와 유우의 유명세를 알릴 없었기에... 나도 만화방에서 컵라면과 오징어 뒷다리를 뜯어 먹으면서 만화 보는 거 좋아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슨 의식(儀式) 치르듯 경건하게 접근할지 몰랐다. 우리는 시간때우기용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심심풀이 땅콩 먹듯이 만화를 보는데 이놈의 민족들은 만화에 빠지면 사생결단이었다. 시리즈별로 구매하여 가보(家寶) 모시듯 보관하고 그중 하나가 빠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채워 넣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꼴에 없으면 또 찍으면 되지였는데 아뿔싸 의도적으로 절판(絶版)까지 해버린단다. 그러다가 대중이 달아오르면 특별고(特別稿)니, 기념 한정판이니 하면서 정해진 부수를 찍어냈다. 수천만 부를 찍어냈는데도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구하려고 해도 어려우니 말이다. 무슨 고도의 상술도 아니고...
근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냐, 한국에 있었는데... 만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벽창호인 내가 열일곱 수상 히라테가 더 재밌다고 찬물을 끼얹었으니
경악할 수밖에...
- 아냐, 사요나라 황제별이 더 재밌어...
- 그래, 훨씬 재밌지...
- 두말하면 잔소리.
- 몽이 읽어보면 알겠지.
쥰페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리나와 미나미가 거들었다. 다이히토는
내 어깨까지 치며 측은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래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 바보같은 놈, 띨빵한 인간아, 구제 불능...
애들은 내가 눈치를 못 채자 당황했다.
그깐 일로 당황 식이나...
아야코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서려는 순간,
- 지구는 황제별, 그거는 재밌더라...
- 정말?
내 말에 아야코가 만면에 화색이 돌며 물었다.
- 응, 동생이 신주 모시듯 해서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대충 보다가 재미가 나서 정독했지...
- 그럼, 그 작가가 결혼하자면?
아야코가 뜬금없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 음... 니한테 물어보고, 됐냐? 이 엉뚱아...
아야코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헤, 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긴장해 있던 친구들도 그제야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 약속해...
- 네, 4차원 공주마마... 지구는 황제별과 사요나라 황제별 작가가 같은 인물이지?
아야코 말에 대답하고 더 짓궂은 말이 나올 거 같아 얼른 내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 그럼, 몰랐어?
유리나가 배구선수처럼 시간차공격(時間差攻擊)하듯 재빨리 대답했다.
- 나야 모르지, 만화를 보지를 안 했는데, 아야코가 주면 봐야지,
분명 지구는 황제별 작가는 미인일 거야... 읍...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담지 못해 아야코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여친 앞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안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처분만 바라는 양심수(良心囚)처럼...
그런데 아야코가 빙긋이 웃었다.
휴...
이건 분명 반전이다.
내가 왜 이리 경망을 떠느냐 하면 아야코의 그 큰 눈에 눈물이라도 맺히면
가슴이 너무 아플 거 같아서였다. 저 큰 눈에 눈물을 맺히게 한다는 건
도저히 용서가 용납되지 않을 만큼의 잘못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 웹툰의 선이나 색을 보니까 왠지 미인이 그린 거 같더라...
- 잘 봤네, 만화 좀 보네, 몽, 우하하!
쥰페이가 과도하게 웃자 애들도 크게 웃었다.
나도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아야코가 내 팔을 꼈다.
나를 삼켜버릴 듯 쳐다보는 그 큰 눈에 나는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소름이 돋았고 만 볼트에 감전된 듯 전율(戰慄)이 내 몸을 훑고 내려갔다.
쳐다보지 말아야 하는 건데, 나는 아야코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을 거 같아서...
- 배고파...
- 가자, 내가 산다!
내가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다.
아야코를 자전거 뒤에 태웠다. 허리를 잡고 안아서 태웠다.
그러면 아야코는 자연스럽게 나를 안았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자꾸 하니까
자연스러워졌다.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해줄 때까지 아야코는 기다렸다.
처음엔 왜 안 타지 했는데, 안아서 태워달라고 했다.
바람을 가르고 자전거 페달을 세게 밟았다.
아야코가 자연스럽게 아니 늘 그렇게 했다는 듯이
내 허리를 꽉 잡고 내 체온(體溫)을 느끼듯 뺨을 내 등에 갖다 댔다.
쥰페이와 유리나도 우릴 따라 했다.
- 눈물 나...
나는 놀라 브레이크를 살짝 잡아 세웠다.
- 왜?
- 그냥 가, 하품했어...
놀래라, 니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우쳐줘서 고맙다. 나는 잠시 아야코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었던 건 아닐까...
- 큭...
- 킥킥...
나는 큭했고 아야코는 킥킥했다.
킥킥 웃으며 아야코가 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나는 간지럽다고 일부러 자전거를 비틀댔다.
어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에 섰다. 애들도 뒤따라왔다.
이탈리아 고급 음식만 나오는 곳이었다. 세계 최고 미슐랭 음식점에서
요리사로 있었던 셰프가 요리하는 곳인데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 여긴 돈이 있어도 못 먹는 곳인데...
쥰페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 예약해야 되는데...
유리나가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했다.
- 걱정도 팔자다... 여기 카드...
내가 카드를 손으로 들어 보여줬다.
- 딸도 예약 안 하면 얄짤 없어...
쥰페이가 턱짓으로 미나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나미가 거절이 뻔하지만, 미나미 아빠한테 몽니라도 부릴까 해서 핸드폰을 들었다.
내가 미나미 핸드폰을 막으며 말했다.
- 어허이, 미나미... 나를 어떻게 보고, 얘들이 진짜, 우리 숙모를 뭘로 보는 거야,
우리 숙모가 내 손에 카드를 쥐 준 건 이유가 다 있지 않겠어?
- 예약했구나?
유리나가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 당근이지...
- 퇴원 기념?
- 응...
- 나보다 낫군...
- 왜 그래...
아야코가 자책하자 내가 그러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내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게 아야코를 불쑥 들어서
내 왼쪽 어깨에 태웠다.
아야코는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랬다.
애들도 놀랬다.
아야코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내 기분 좋아했다.
애들은 아야코가 얼굴을 붉힌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했다.
나는 이렇게 전혀 예상 못 한 일이면 놀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애들은
아야코가 이런 일에 놀랄 거라고 전혀 예상 못 했다.
- 나도 놀랠 킬 수 있지, 헤헤...
- 장난꾸러기, 몽~
조금 무거웠지만, 아야코 엉덩이가 바람이 빵빵하게 든 프리미어 리그 축구공 같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엉덩이라 그런지 단단하면서도 옹골차고
탄력적이라 기분이 좋았다. 찐하게 말하면 농염했다. 이성(異性) 간에 몸이 닿으면
말초의 뉴런(neuron)이 작동을 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1도 본능적인 엑스터시
(extasy)가 살아나지 않았다. 무슨 경건한 성체(聖體)를 어깨에 올린 것 같았다.
쥰페이도 질세라 냅다 유리나를 오른쪽 어깨에 태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나는
리듬체조요정처럼 다리에 반동을 줘 쥰페이 어깨에 가뿐하게 올랐다.
- 이야호오~
유리나는 좋아서 날아갈 듯이 환호성(歡呼聲)을 질렀다. 리듬체조로 아시아를 제패하고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일본 리듬체조요정의 성대결절성(聲帶結節性) 환호성에 지나가는 젊은이들 몇몇은 부러워하며 손뼉까지 쳐 주었다.
나와 쥰페이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니 트로이 목마 같았다.
쥰폐이가 감동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자고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씩 웃으며 그래, 그러자, 눈으로 대답했다.
아야코와 유리나는 하이 파이브를 하며 이야호오~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차에서 신기해하며 쳐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이랴!~ 였고, 나와 쥰페이는 기꺼이 말이 되었고, 개선장군의 포효였다.
다이히토는 미나미를 쳐다보며 주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