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윤화
그날 저녁, 저녁상을 물리고 다들 각자 볼일들을 보고 있는데, 막 세수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있던 윤화 곁에 노미가 가만히 다가가 헛기침을 했다. 깜짝 놀란 윤화가 노미를 올려다보았다.
“세수 하셨는교?”
“야...”
윤화가 영 어색하게 대꾸를 한다.
“어머니가 특별히 부탁하셔가 지가 동상한테 댕겨오긴 했는데예.”
윤화는 그 꼬장꼬장하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노미를 말간 눈으로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표정이 너무 아기 같아서 노미는 자꾸 웃음이 났다.
“뭐, 아침에 도련님 말씀을 들어서라기보다는…….”
하는데 윤화는 이미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진작부터 도련님이 미순이 동상을 별로 맘에 없어 하는 거 알고 있었다믄서... 우는데...”
“우... 울었다꼬요?”
“야,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윤화는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지는 도련님을 어찌 도와드려야 될지....”
하며 노미는 윤화의 표정을 살폈다. 윤화는 어느새 노미를 향해 고쳐 앉더니,
“지가 우야믄 좋겠습니꺼?”
하는데 표정이 사뭇 간절하다. 노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기... 그냥 슬쩍 건너가셔가 손에 뭐라도 쥐여 주고 오시믄 될 것 같기도 하고예.”
“남사스러버가, 우예 그랍니꺼. 마, 됐심더.”
하고 윤화는 고개를 획 돌린다.
“뒷마당 과일 나무에 보이, 자두가 열리기 시작했던데예. 아까 낮에 태화 도련님이 좀 따다 놓은 게 있는데, 미순이 동상한테 내가 갖다 주겠노라 약조를 해서예. 어째요. 제가 건너갔다 올까예?”
라고 했더니 윤화는 벌떡 일어나 바지를 몇 번 털고는
“지가 댕겨 오겠심더.”
하며 마루 끝에 둔 자두 바구니를 용케도 찾아 문을 나선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걸어 나가는 윤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미는 자꾸 웃음이 났다. 우리 서방님만 귀여우신 줄 알았는데 도련님들이 다 좀 귀여우신 듯하다.
윤화는 미순이네 집 앞에 와서 섰다. 내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라 따로 인기척을 내고 할 필요도 없는데 윤화는 주춤거리며 안을 살폈다.
“오라버니?”
그때, 뒤에서 미순이 윤화를 발견하고 불렀다. 깜짝 놀란 윤화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 집에서 바느질을 하다 왔는지 바느질감이 든 바구니를 든 미순이 서있었다.
“가시나가 오밤중에 어디를 싸돌아댕기노?”
하고 윤화는 빽 고함부터 쳤다.
“섭이네서 바느질 했어라.”
하는 미순이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미순이 풀죽은 목소리에 윤화는 급 미안해졌다.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말이다.
“울었나?”
윤화의 질문에 미순은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그리고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당황한 윤화는 얼른 자두가 든 바구니를 미순이에게 안기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저 친동생 달래듯이 소매로 미순이 눈물을 아무렇게나 퍽퍽 문질러 닦아주었다.
“와 우노? 니는... 참말로... 많이 묵고 키가 쑥쑥 커야 시집이든 뭐든 올 거 아이가. 석이가 기둥에다 표를 탁 해놓고 이만치 안 크면 시집 안 보낸다고 꼬장을 부려가 내가 약이 올라가 그란거지.... 니 섭섭하라고 한 말 아이다.”
하고 대충 달랬다.
“지가 키는 안 크고...흐흐흑.... 옆으로만 분다고... 으흐흑... 오라버니가...”
하며 미순은 통곡 직전이다. 깜짝 놀란 윤화는 미순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미순이 통곡은 그칠 것 같지를 않다.
“조용히 해라. 어무이 나오신다.”
하지만 미순이는 좀처럼 한 번 터진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울타리 구석 쪽으로 끌고 가 주저앉혔다. 달이 어스름한 시간이라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꺼이꺼이 하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 미순이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것은 알 수 있었다.
윤화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봐오던 아이였다. 여동생이 없었던 윤화 형제들에게 미순이는 여동생이었고, 마냥 귀엽고 어여쁜 아기였다. 그런 아기가 어느 날 자기를 바라보는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눈을 못 맞추고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윤화도 많이 당황스러웠다. 미순이 마음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지 알 수 없어 무조건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런 미순이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어른들은 덜컥 둘을 정혼시키셨다. 윤화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미순이에게 좋은 짝이 될 자신이 없었다. 세상이 험악하던 시절이었다. 누군가의 지아비가 되고 가장이 된다는 것은 윤화에게는 아직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달빛 아래 미순이는 고운 소녀였다. 그런 미순이가 윤화에게 주는 마음 또한 고맙고 고운 것이었다. 혼인하는 것을 영 달가워하지 않던 큰 형이 혼인하더니 내내 벙실벙실하는 것을 보니 윤화도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윤화에게 미순이는 그냥 정혼자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면 안 되는 동생이기도 했다.
“코 나왔다. 닦아라.”
윤화의 말에 미순은 얼른 소매로 콧물을 훔쳤다. 미순이는 윤화랑 그것도 밤에 이렇게 가깝게 앉아 있는 것이 처음이라 자꾸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아득했다.
“나가 싫어라?”
미순이는 용기를 내어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오라버니가 나를 싫어라 하믄 내도 오라버니 헌티 시집 안갈랑께.”
미순이는 입술을 앙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에는 어느새 또 눈물이 담뿍 고였다. 윤화는 그런 미순이를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씰데없는 소리 한다! 내는 이미 정한 거는 안 바꾼다. 아부지들이 정하신 게 아이다. 내가 정한 기다. 아직 니가 너무 어리가.... ”
윤화는 이런 마음을 미순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남자로서 와락 미순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오빠로서 어린 미순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윤화는 오늘만은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윤화는 가만히 미순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미순이 눈이 열 배는 더 커졌다.
“다시는 울지 마래이. 한 번만 더 울면 그때는 입술이다.”
하고는 휙 돌아서 집으로 달려왔다. 미순이가 자두 바구니를 품에 안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순이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이제 계절은 초여름을 지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7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6월에 심어놓은 벼들이 제법 자라 논에 거름도 더 주고, 피도 뽑고 하며 관리를 해주어야 했고, 둑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물은 잘 들어가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할 시기였다. 6월에 공출(일본이 정기적으로 조선의 곡식 등을 가져가는 일)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해 여름은 제법 농사들이 잘 되어, 보리도 밀도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구 많은 집 살림은 언제나 빠듯하고 바빴다. 그 식구들이 다 씻고 마시고 먹고 하려면 온종일 물을 길어다 대야 하고, 빨래는 언제나 산처럼 쌓였다. 빨래를 해 오는 것도 일이었지만 말리고 개키고 꼬매고 하느라 밤이 다 갔다. 틈나는 대로 소먹일 풀을 베어와야 하고, 무엇보다도 힘겨운 것이 삼시 세끼 밥해대는 일이었다. 농사철에는 사이사이 새참까지 하루 여섯 끼를 해야 했다.
할머니 말을 그대로 빌리면 커다란 무쇠솥에 빠져 죽을 만큼 수제비를 끓여도 다 퍼주고 나면 할머니 몫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 시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며느리 먹으라고 자기 그릇을 밀어주셨다. 그러면 동생들이 한 숟가락씩 형수 먹으라고 수제비를 떠주었다. 그러면 할머니 몫으로 어느새 한 그릇이 뚝딱 생기곤 했다. 어려울 때는 건더기보다 국물이 많은 수제비였지만 할머니는 그 시절 먹은 수제비만큼 맛있는 수제비를 요즘에는 도무지 드셔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왜 그때는 뭐든 그렇게 다 맛있었을까. 나는 그 맛이 궁금하기만 했다.
그렇게 바쁜 살림이었지만, 물은 내내 윤화랑 남화가 길어다 붓고, 빨래는 내내 정화랑 태화가 해와서 널고, 마르면 걷어다 바느질에 다림질까지 해서 넣는 것은 민화 일이었다. 소는 주로 윤화가 돌보고, 작은 동물들은 정화가 돌보았다. 그 사이 삼시 세끼 밥에, 아버지 어머니 약에, 무말랭이 만들고, 무청 매달고, 온갖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진화 일이었다. 부지런한 도련님들은 소풀이나 뗄감이 떨어지지 않게 돌아가며 해 놓았다. 아침이면 마당을 멀끔하게 쓸고, 마루며 방이며 반짝반짝하게 쓸고 닦고 하는 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아가며 했다. 워낙 성격이 깔끔하신 어머니 교육 덕분이기도 했고, 다들 그렇게 부지런 떠는 것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도련님들은 시간 나는 대로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해서 물고기도 잡아 오고, 조개랑 해초도 걷어왔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건강하고 피부가 좋은 이유가 해초때문이라고 철떡 같이 믿으셔서 밥상에는 파래,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가 항상 올라왔다. 그것을 된장이나 통멸치젓이랑 먹으면 고기 반찬이 부럽지 않았다.
석이랑 미순이는 맛난 것이 생길 때마다 꼭 들고 건너왔다. 저녁 먹고 난 후, 밤참이라도 먹으며 그렇게 다 같이 어울려 앉아 있으면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러앉으면 진화는 동생들에게 반드시 한문 숙제를 내주고 공부를 시켰다. 윤화는 산수 숙제를 내주고 틀릴 때마다 꿀밤을 때렸다.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진화네 석이네 논 모두 둑을 정리하고 피(논에 나는 잡초)를 뽑고 하는 날이라 두 집 남자들 모두 아침부터 논에 나가 있었다. 미순이는 노미를 도와 새참 준비를 하러 노미네 부엌에 와 있었다.
노미는 뭘 가져가야 할까 고민 중인데 미순이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이랑 싸 먹게 보리밥 쌈밥을 하자고 했다. 그릇이 따로 필요하지 않으니 새참으로 내가기에는 딱이었다. 보리밥만 잔뜩 해서 김치랑 강된장만 챙기면 되었다.
하지만 밥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장정 일곱에 여자 둘이 먹을 양이 중간 가마솥 크기의 함지박 두 개를 꽉 채웠다. 도련님들 먹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지 않으리란 걸 노미는 잘 알고 있었다. 입가심할 막걸리까지 챙겨 각각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했다.
논으로 향하는 길에 미순이
“언니! 내기 할랑게라?”
하고 제안했다.
“내기?”
노미는 머리 위에 진 함지박이 무거워 고개도 못 돌리고 눈만 옆으로 뜨며 물었다.
“오라버니들 중에 누가 우리 밥을 싸줄까요잉?”
“우리 밥을?”
“다들 정신이 없응께 지들 먹기 바쁠텐디,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 생각을 허지 않겠소잉?”
그리고 보니 노미도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래도 우리 서방님이 우리 밥을 챙겨주지 않겠나?”
하고 노미는 나름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미순이는 생각이 다른 듯 빙긋 웃었다.
“그라믄 좋을 틴디, 진화 오라버니가 의외로 먹을 거 앞에서 좀 정신없는 면이 있어 갔고라. 지 생각에는 민화 오라버니가 챙겨줄 꺼 같은데라.”
하며 미순이 큭큭 웃는다. 노미는 속으로 서방님이 챙겨주지 않으면 섭섭할 거 같았다.
“동상은 윤화 도련님이 안 챙겨주믄 섭섭하지 싶은데?”
하고 노미가 미순이 표정을 곁눈으로 살피며 은근히 물었다. 하지만 미순은 또 소리 없이 픽 웃더니
“윤화 오라버니는 질대로 넘 앞에서 지 챙겨주는 법이 없응께. 섭하지도 않당께라.”
한다.
“태화 도련님이나 정화 도련님이 챙겨줄지도 모르고.... 아! 남화 도련님이 챙겨주지 싶은데.”
하고 노미가 기대에 차서 말했다.
“태화 오라버니랑 정화는 지 먹느라 바쁠 테고라, 남화 오라버니는 챙피스라서 챙겨주고 싶어도 못 챙겨주것재잉~ 아따! 우리 석이 오라버니가 당장 언니 쌈을 싸주겠다고 법석을 떨 거 같어라. 형수님이라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낭께~. 암만해도~ 지밥은 민화오라버니가 챙겨주것지라~. 내 챙겨주는 사람은 그래도 민화오라버니 밖에 없응께요잉.”
도련님들 전문가랑 내기를 해서 노미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노미는 그래도 진화가 둘을 챙겨줄 것이라고 정했고, 미순이는 석이는 노미를 민화는 자기를 챙겨줄 것이라고 했다. 두 소녀는 이렇게 기대 반 설렘 반 하며 논으로 향했다.
멀리서 새참을 이고 오는 두 여인을 발견하자 남자들은 신이 났다.
“새참이다!!!”
하고 태화가 논 두 마지기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새참 함지박을 내려놓자 구수한 강된장 냄새에 남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수저 나눠 줄 사이도 없이 모두 양쪽으로 ‘와~!’ 하고 나누어 앉았다. 두 여인은 어찌하나 보자며 밥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아무도 여자들 밥은 안 챙겨줄 것 같았다. 그때 진화가
“잠깐!”
하고 소리쳤다. 수저를 든 동생들이 멈칫했고, 노미는 눈을 크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장유유서! 장유유서(나이든 순서대로 해야 한다는 유교식 규칙) 모르나? 체한다. 천천히 묵자. 알았지?”
한다. 다들 못마땅한 듯 바라보고 있는데 진화가 넓은 호박잎을 하나 척 손에 올리고는 수저로 밥을 듬뿍 퍼 담았다. 그때,
“잠시만! 장유유서도 좋은데, 여자들 밥부터 싸줘야 하지 않겠습니꺼?”
라고 누가 말했다.
“지금 막 그랄라 하고 있지 않느냐!”
하고 진화가 당황하지 않은 척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랄라 하기는 형 입에부터 넣을라 한 거 같은데?”
한다. 형은 이 맘에 안 드는 동생을 팩 째려봤다. 이 동생이 누구였을까요?
노미도 미순이도 모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둘 다 내기에서 졌다. 여자들 밥부터 싸주라고 말한 도련님은 바로 윤화였다. 노미는 미순과 눈짓으로 내기는 둘 다 졌다며 소리 안 나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