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두 명의 뱀파이어를 바라보던 에디스는 엷게 웃었다.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에디스는 먼 곳을 바라봤다.
이 단순한 행동조차 자신에겐 얼마나 힘든지 그들은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로드가 로드의 자리에 앉아야만 가능한 일들이 있죠?”
“예, 그렇죠.”
“그중 하나가 바로 땅으로 돌아가야 할 뱀파이어들이 제때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설마.”
“그 설마입니다. 저는 지금 제때 죽지 못한 게 200년이 넘어가고 있어요.”
수천 년을 살아오는 뱀파이어에겐 죽음은 제대로 쉴 수 있는 휴식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단어로 칭하면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지나친 힘을 쓴 탓에 죽음이 다가오면 신체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팔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던가, 시력을 빼앗긴다던가. 목소리를 잃는다던가.
그런 식으로 몸이 망가져 버린 뱀파이어는 더 능력도 쓰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에디스 씨도…….”
“예, 저도 몸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한쪽 팔은 썩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약으로 어떻게든 막고 있지만, 곧 막지도 못하겠죠.”
에디스는 자신의 왼팔을 감싸 쥐고 쓰게 웃었다.
약으로 막는 것도 임시방편일뿐이었다. 이제 약으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신체가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에디스를 보며 두 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200년 동안 죽지 못했다니, 몸이 썩어가는 고통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니 전 어서 로드가 로드의 자리에 앉아서 저에게 평안을 주면 좋겠습니다.”
에디스의 진심 어린 말에 클리프는 브리지트를 바라봤다.
클리프의 시선에 브리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가 정말로 믿음직한 뱀파이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이 진실함을 알았으니, 그를 믿어봐도 괜찮겠지.
“그렇다면, 에디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블러드 로즈에 관해서 조사해줬으면 합니다.”
“블러드 로즈에 관해서요…? 왜 그런걸…….”
“자세한 이유는…. 지금 설명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조사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아, 가시기 전에 잠시만요.”
일어나려고 했던 두 명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에디스의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게 됐다.
에디스는 집사에게 무언갈 지시하는 듯 집사의 귀에 둘에겐 들리지 않도록 속닥거렸다.
그 모습에 두 명의 뱀파이어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단단히 긴장했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브리지트와 클리프를 본 에디스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네요.”
“이해합니다. 제가 가져오라고 한 건 수상한 것이 아닌 돈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과 동시에 집사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가방은 꽤 커서 안에 들어간 액수가 얼마일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집사가 가방을 건네자 무게도 꽤 나가서 가방을 받은 클리프는 당황했다.
“무거운데요…? 얼마나 넣으신 겁니까?”
“얼마 넣지 않았습니다. 한…. 3천 골드 넣었습니다.”
“3천 골드나요…?”
3천 골드면 평범한 뱀파이어가 돈을 벌지 않고 3년을 살아도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런 큰 금액을 이렇게 덜컥 내주다니. 클리프는 자신의 두 손에 들린 가방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에겐 꼭 필요한 금액이었다. 새 무기를 사고, 제대로 된 갑옷을 사려면 이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일단 이만큼을 들고 가서 필요한 걸 먼저 사두라는 의미겠지.
“블러드 로즈에 관해 조사해두겠습니다. 조사를 끝마치면 다시 부르도록 하죠.”
“그땐 이걸로 우리에게 연락해주길 바라.”
브리지트가 건넨 것은 동그란 모양의 돌이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였지만 그 돌은 각자의 짝이 있으며, 짝인 돌에게 연락을 보낼 수 있는 신비한 돌이었다.
에디스는 돌을 손에 쥐고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법은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 돈, 꽤 큰돈이니까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당연하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로드에게 전해드려야 하니까요.”
클리프는 가방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로 가방을 꼭 쥐었다.
인사를 하고 둘이 나가자 혼자 남은 에디스는 서재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옆을 집사가 따라 걸었다. 서재에 들어온 에디스는 집사를 바라봤다.
“블러드 로즈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하도록”
“예.”
“만약 이 서재에서 블러드 로즈에 관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왕궁 도서실까지 샅샅이 뒤져봐.”
“알겠습니다.”
“칼립에게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알았지?”
“예.”
집사는 조용히 자신이 할 일을 시작했고 에디스는 그가 조사를 시작하는 걸 보고 서재에서 나갔다.
왜 조사해야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뱀파이어 로드와 관련이 있으니까 조사하라고 시킨 거겠지.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잠시만 그들을 믿고 조사만 해야겠다.
섣불리 나서서 먼저 알았다간 겨우 산 신임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었다.
“더 잠들지 못하는 건 사양이니까.”
한시라도 빨리 평안하게 잠들기 위해서라면…. 에디스는 썩어가는 자신의 왼팔을 붙잡으며 침실로 향했다.
한편, 숙소로 돌아간 두 명은 가지고 온 가방을 내려놓으며 겨우 안도했다.
3천 골드라니. 상상 이상의 금액에 가방을 들고 오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정도로 긴장했다.
누군가에게 뺏겨버리면 큰일이니 여기까지 오는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지금 왔나?”
“네, 지금 도착했습니다.”
“그 가방은 뭐야? 갈 땐 들고 가지 않았잖아.”
“에디스가 준 겁니다. 내용물은 3천 골드입니다.”
“3천 골드? 그 큰 금액을 줬다고?”
리키나가 놀라서 가방을 보자 지유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뱀파이어 세계의 경제관념을 모르는 그녀이기에 3천 골드가 얼마나 큰 돈인지 이해 못 하는 거겠지.
라티안스는 그런 그녀에게 이해를 시켜주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3천 골드는 인간계 돈으로 환산하면 한…. 6천만 원 정도 되려나.”
“6…6천만 원이요?!”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 뱀파이어 세계에선 3천 골드면 평범한 뱀파이어가 일을 하지 않고도 3년을 살 정도니까.”
“그 정도면 엄청 큰돈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들 놀라는 거야.”
그래서 3천 골드라는 말에 다들 그렇게 많이 줬냐고 물어본 거구나.
라티안스가 파티장에서 만났다는 그 뱀파이어는 생각보다 더 많이 부자인 모양이었다.
3천 골드를 턱턱 내줄 정도니 말 다 했지……. 지유는 묘한 부담감에 돈가방에서 슬쩍 물러났다.
“그래서 이 3천 골드는 어디다 쓸까요?”
“일단 기다려봐. 막 쓰기만 하면 불릴 수가 없잖아.”
“불리실 생각이입니까?”
“계속 받을 수는 없어. 그렇게 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마련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가장 안쪽 방에 두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브리지트는 돈 가방을 들고 안쪽 방으로 향했고 라티안스는 클리프를 바라봤다.
라티안스는 여러가지 묻고 싶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어때, 믿을만해 보였어?”
“목적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블러드 로즈에 관해 조사해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래? 그의 목적은 뭐던가?”
“영원한 숙면, 죽음입니다.”
“…그렇군. 하긴 지금 로드의 자리에 앉은 것은 진정한 뱀파이어 로드가 아니니까 말이야.”
클리프의 말에 라티안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스같은 뱀파이어가 분명 많을 것이다.
제대로 영면에 들지 못하는 뱀파이어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들에게 하루라도 빠른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굴하면 안 된다.
“일단 클리프, 시장에 나가서 우리가 투자할만한 게 있을까 조사해봐.”
“알았습니다.”
“에디스가 준 3천 골드의 반만 쓸 거야. 그리고 반은 병사들에게 쓸 거고. 시장 조사를 하면서 괜찮은 갑옷이나 칼을 파는 곳도 알아보고.”
“저만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부탁할게.”
클리프가 나가고 라티안스는 남은 천오백 골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병사들의 갑옷과 칼을 전부 사는 데에만 쓰기엔 쓸 곳이 너무 많았다.
다른 곳에도 쓰고 싶기도 하고, 우리들에게도 써야 다들 기분도 좋아질 것이다.
“음. 좋아, 다들.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두도록 해. 지금이 아니면 살 기회가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
라티안스의 말에 다들 신났는지 각자 대화를 하며 화기애애해졌다.
돈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기분을 좋게 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얼른 빨리 그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돈을 쓸 수 있게 해줘야지.
각자가 라티안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며 신나는 얼굴에 라티안스 역시 웃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