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은 그의 옷장을 열고 옷들을 뒤적였다. 그런 하임을 문에 기대서서 지혁은 조금은 귀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큰 클로짓 안- 그녀는 그야 말로 , 시계토끼같다- 조그마한 얼굴도- 하얗고 조그마한 이마도-
그리고 조그마한 발도-
내가 그 안의 어떤 인물일지는 알수 없지만 말이다-
퉁명스런 하트 여왕이거나 혹은 의문만 늘어놓는 체셔캣은 아니길 바랄 뿐이지만-
미친 모자장수일지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목을 쑥 빼고 옷들을 계속 면밀히 살핀다- 그녀의 키는 조그마해서 , 옷장 윗부분 까지는 손도 닿지 않는것 같았지만 말이다.
옷장 속에서 한참만에 머릴 쏙 내밀더니 내게 물었다
"이 옷이 정말 다 당신꺼에요?"
그녀는 의문이라는 듯이 말했다.
"왜.....? 이상해?"
내 대답이 굉장히 내 귀에도 부드럽게 울렸다-
내 목소리지만 내 목소리 같지 않다고 할까- 어폐가 가득한 말이지만....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불평같진 않았다. 그저 의아해 하는것 같았을 뿐-
"무슨 남자가 옷이 이렇게 많아요- 같은게 대체 왜 두 세장씩 있는지..."
그녀의 물음에 지혁은 씩 웃는 자신이 더 놀랍다. 예전엔 그런 질문은 치부를 건드리는 질문일 뿐이었다.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픈 부위였다.
하기사 자신은 어디든- 개인적인 일이면 아픈 부위였다
들키기 싫은 일
그런데 그녀의 질문이라고 해서 기분이 별로나쁘지 않다니-
자신이 변한건지 아니면 하임이 그만큼 특별한건지 모르겠다.
"나 오래, 아팠었잖아- 살이 너무 빠져서 전에 있던 옷을 입을수가 있어야지- 사이즈가 다 안맞아서- 다 놔두고 왔어 본가에....
두 세장씩 있는건 내가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야- 그냥 좋은것만 입는거지-..... "
그 말에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 듯 하임이 돌아보았다.
"그 옷을 세탁하고 있으면- 건조기에 넣는대도 하루 종일 그 옷은 못 입을거 아냐?"
....
말하고 보니 내가 결벽증과 이상한 편집증도 있다던 김박사의 별거 아닌듯 말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들은 당시엔 별거 아니야 그랬는데, 말하다 보니 느껴졌다.
하긴 다른게 너무 크니까 김박사도 순차로 이야기 할수 밖에 없었겠지만-
나는 이해를 바라는 듯이 살짝 웃었다. 이럴때 내가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놀라우면서도- 슬퍼지지만- .... 나는 그냥 웃었다. 그녀가 이해 해 주길 바라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하임은 장난치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내 옷장에서 옷을 뒤적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는 곰 머리를 쓰더라도 옷이 평소의 나 같으면 들키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뭐 다른 옷 없냐는 말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더니, 그녀가 찾으러 온 거였다.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일 하나하나가 지혁의 가슴엔 따뜻한 일이었다.
연애가 이렇게 간지럽고 귀엽고 달콤한 거였던가-
하나하나가 너무나 달콤하고 참을수 없이 달달했다- 설탕을 입안에 가득 넣으면 입가 까지도 자글자글 해 지는 듯 한
그 기분- 그 기분이 가슴에 아주 가득했다.
내 공간엔 나만 있었으면 했던 , 너무나도 무겁고 지독히도 열리지 않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자 ,
나는 그녀가 내 공간에서 숨을 쉬는게- 좋아졌다-
내 손만 닿던 그곳에 그녀의 손이 닿고 숨이 닿자 얼마나 그것들이 빛깔을 다르게 품는지 알게되었다.
내 숨이 얼마나 건조 했었는지- 만물은 그녀의 손이 닿자 그제야 깨어나는 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있으면 난 아픔도 잊었다.
잊을수 있을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아픔이 있어도 무감각했다.
그녀를 눈으로 쫓기만 해도 그 아픔은 옅어져 버렸다.
그야말로 옅어졌다.
마치 그녀에게서 아픔은 도망가는 것 처럼-
그녀는 내 옷을 하나하나 젖혀가며 찾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옷이 뭔진 몰라도 그런 옷은 아마 없을 거였다.
물론 애초에 클로짓을 정리한건 내가 아니었다. 전에 옷을 다 놔두고 오라고 한건 내가 정리하는 사람에게 한 유일한 부탁이었다.
다시 주문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정장이나 커스텀 구두 정도는 다 가지고 왔지만.... 예전에 즐겨 신던 운동화들도 다 먼지 쌓인채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가지고 왔대도 신발 치수까지도 살짝 변할만큼 변화를 겪은 터라- 입지도 못했겠지만-
" 어떻게 남자가 나보다 옷이 더 많아요? 난 옷에 관심 없이 살아왔는데... 늘 그것 때문에 시달렸어요-"
그녀가 윗 옷장에 손이 닿지 않아 손을 뻗으며 낑낑대기에 나는 그녀가 딛고 올라 갈수 있도록 야트막한 앉은뱅이 의자를 밀어주었다.
신발을 신을때 쓰는 거였다. 좀체 그냥 신발 끈을 묶을수 없어서 놔둔거였다. 쭉 뻗어서 숙여서 신발 끈을 묶는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럴땐 심히 유용했다. 밀어주었더니 하임의 얼굴이 확 밝아 졌으니까-
나는 의자위에 올라간 그녀를 살짝 받쳐주면서 대답했다.
"그럼 내 옆에 붙어있어- 당신한테 어울리는 옷은 내가 더 잘 고르는 거 같으니까-"
그녀한테 어울릴 옷이라-... 그때 골라두었던 옷도 무리 없이 어울렸다.
어둑한 하늘빛 원피스도 짙디 짙은 피콕 블루의 파티 드레스도-
그녀가 입었을 모습을 나도 모르게 상상했었다. 고르고도 그렇게 잘 어울릴꺼라곤 예상 못했었다.
그런데 늘 상상보다도 아름답게 그녀에게 어울렸으니까-
그야말로 그녀의 색 , 그대로 녹아 들었으니까
내가 한 말에 그녀가 날 돌아보았다. 눈을 깜박이면서- 그러곤 씩 웃는다-
"닭살이네요- "
그녀가 한말에 내가 더 크게 웃고만다. 풉 하고 새어나오는 웃음- 전 같았으면 난 화를 냈을까?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마디 한마디가 어쩜 이렇게 톡 쏘는 소다처럼 상큼한지-
"닭살?... 너는 그럼 닭을 좋아하는거야?"
내가 장난으로 , 엄한척 진지하게 되묻자 그녀가 더 크게 웃었다.
"좋네요- 당신처럼 예쁜 닭은 세상에 없겠지만요.... 당신은 공작에 가깝죠- 닭보단-"
눈가를 애교있게 찡그리면서 말을 잇는다-
"전에 동물원가니까 하얀 공작이 있던데- 당신은 그 공작같네요-.. "
아련하게도 말한다. 마치 그 새와 자신은 언제나 인연이 없을 것 처럼-
나는 그 말에 맘이 쓰리다.
왜 우린 같이 있는데- 언제나 서로를 불안해 하는것 같을까-
하얗다는 말- 자신도 하얀 편이면서 별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당신이 더 닭살이야- 그런 말을 당연스럽게 하는 당신이 더- "
그녀는 피식 웃으며 안쪽까지 손을 찔러넣어 생전 있는지도 몰랐던 옷을 찾아낸다-
가죽으로 만든 자켓이었다.
"아- 드디어! 뭔가 당신답지 않은 옷을 찾았네요- .. 설마 청바지는 있죠?"
"......."
자켓은 바이커 자켓이었다. 나는 눈치빠른 이 여자가 이걸 못 알아챘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챌 것들이 크고 슬프다는 걸 미리 눈치챈 거였다.
바이커 자켓이야 사고 전에 20개도 넘게 있었다. 수 없이 많았다. 오토바이 때문에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그런 옷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화려한 셔츠나 원색의 스카잔 같은걸 입으며
그게 또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슴의 찌릿한 통증을 스스로 다잡았다.
"좀 두꺼울까요? 이젠 쌀쌀하니.. 괜찮겠죠?"
"응-"
나는 기를 써서- 산뜻하게 들리길 바라며 대답했다. 그녀가 골라준 옷은 한참이나 입지 않은 옷들 뿐이었다.
"자 갈아입고 나와요 나도 - 집에가서 생전 안 입은 옷들 입고 올게요-"
그녀는 내게 시간을 주려고 배려하는 듯 문을 살짝 닫고서 나섰다. 나는 이미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뜯으며 거울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죄책감이 들려올 시간이었다.
기어코?
기어코 이래야 해?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맞아? 기어코..... 너는 내게- 이렇게 해야 만 해?
하민이는 한번도 날 책망한적이 없었으니까- 단 한번도 그렇게 원망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 목소린 내 맘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일 뿐이었다. 알아도 잘 알아도 맘이 아팠다.
"미안해"
내 속삭이는 대답소리에 그녀는 더 날카로운 목소릴 냈다.
정말 미안해?
나한테 할 말은 그것 뿐이야?
나는 잠시 거울 속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저 응시하였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그저 애 쓸 뿐이다. 그녀의 예전 목소릴 떠올린다
부드럽게 웃던 목소리 한번도 그녀는 그런 목소릴 낸 적은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뿐이다.
하임이 골라준 옷을 걸쳐입는다- 나한테 남아 있는지도 몰랐던 옷들을 다 입고 거울앞에 서자-
나는 옷만 예전 같았다. 척 보기에도 위의 자켓은 내게 이미 좀 컸다.
나는 되뇌였다.
웃자-
웃기로 했잖아 웃자-
하민이의 목소리가 그제야 이명처럼 사라졌다. 내 거짓 미소 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
하임은 문을 닫고 들어와 잠시 멈춰섰다. 왜 하필 그 옷이었을까-
나도 참 멍청하다. 바보같고-
더 화가 나는건,
그가 와락 흔들릴 때 마다- 그 눈빛에 내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거다.
뻔뻔해 지질 못한 내 자신을 탓한다 탓할수 밖에 없다. 그의 기억은 여전하다-
그것이 그에게 추억이라도.. 난 그냥 기억이길 바랄 뿐이다.
여전히 그 기억은 그 추억은..... 지뢰밭이다. 터질때마다 그의 눈 안으로
여러 아픔이 파편처럼 내려친다- 그 눈에선 물보라가 인다-
짙푸른 눈에서 미친듯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언제나 그런일이 있으면 그는 숨소릴 죽인다. 그리고 애써 편한척 움직인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데....... 눈은 하나도 거짓말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나 보다도
훨씬- 더 훨씬 소질이 없다-
그 눈을 보면 난 그만 도망치고 싶어지고 만다. 그가 혼자 있으면 누굴 떠올릴지 뻔히 알면서
누구의 손에 넘겨주는 일인지 뻔히 알면서-
그는 내게 자신이 이제 물에 돌아가지 않는 다고 했었다. 이젠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눈치 못챘어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손을 놓을때마다
그는 웃고 있어도 잠시도 날 떠난적 없다고 믿어도
나는 보았다.
그가 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숨조차 잊고
그대로- 내가 다시 손을 뻗는 순간까지 그 안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나는 괜히 센치해지는 나 자신을 다그쳤다. 이러지 말자- 이런 일에서 이타적이면 안되는거다
이런 일에서 배려할 이유가 없는거다. 그는 내 곁에서 더 편하고 나를 위해서도 난 그를 놓칠수 없다.
여러가지 일에 매여 있어도 우린 서로 사랑하니까-
그가 매여있는 곳에서든 내가 매여있는 곳에서든
우린 서로 손이 닿았고 그 손을 잡았고-
우린 그제야 서로 손을, 맞잡았으니까..........
나는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되뇌였다
"욕심 낼 꺼야, 욕심... 낼 꺼야 이번엔-"
그 말은 내 스스로에게 충고하는 목소리 처럼 들렸다.
다짐인데- 왜 충고처럼 울리는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
-
장하임이 집으로 돌아온건 벌써 저녁 시간대였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장하임한테 저런 옷도 있었나?
".... 그걸 입고 ... 나가게?"
장하임은 왜 그런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이다-
"왜요? 안되요?"
"뭐... 안되는것은 아니지만.. 이제 날이 ... 추운데..."
내 말은 어물어물 변명처럼 들렸다.
그녀가 치마를 입은걸 ... 내가 또 본적이 있었던가? 치마는 좀 짧았다. 허벅지에 겨우 걸쳐지는 치마-
그녀의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늘 입던 셔츠대신 길게 내려오는 얇은 티셔츠와 짙은 빨간색의 재킷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매번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은 여자다.
이렇게 보니 좀, 더 앳띄어 보이네.....
하여간 신기한 여자-
" 이렇게 입어야 저라고 생각도 못하지 않겠어요? 그동안 살이 좀 빠졌나봐요 이거 신입생때 입은 치마인데- 그동안 못 입었거든요-"
그녀는 상큼하게 웃었다-
"당신이 강제로라도 뛰게 한 보람이 있네요-아 선글라스 꼭 챙겨요-"
"밤인데...?"
"밤인거랑 무슨 상관 있어요 얼굴 안 보이게 하려는 거지-"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조그마한 핸드백을 어꺠에 걸치곤 토끼 머릴 뒤집어썼다-
" 자 그럼 가 볼까요?"
나도 곰 머릴 썼다. 우린 입구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조용했지만-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우스웠다, 그토록 냉정하게 굴던 내가-... 지금
이 대책없는 짓을 하려고-..
하려고 하는거야?......
그녀는 내 손을 잡은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손을 잡고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다리를 진정시키려고 약을 한움큼 집어 먹었는데
그럴 필요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린 함께 달리고 있었으니까-
내 손을 꽉 쥐고 달리는 그녀의 다리를 따라서
무능하기 그지 없는 내 다리도 마치 다른 소리라도 들은 것 처럼- 마치 아주 오래 전- 내 다리 였을때 처럼
내달렸다- 숨이 찼다. 폐로 스며드는 거칠게 움직이는 공기- 그 공기는 너무도 그립던 내 젊은 날의 공기와
꼭 닮아있어서 난 웃고 말았다- 그녀도 웃고 있는것 같았다.
길에 있던 사람들이 우릴 돌아보는게 느껴졌다 목소리들이 들렸다.
"저거... 뭐야?"
"곰?"
"토끼야?"
"뭐하는거지?"
그런 목소리들 따위 신경쓰지 않고 달렸다- 다린 멈출줄을 몰랐다- 헉헉대면서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즐겼다.
이 여자랑 있으면 언제나 이런게 가능하다- 잊었던 것들- 중요한데 필요하다고 할수 없었던 것들을
별 힘들이지 않고 이 여자는 언제나 내 손에 그런 것들을 가져다 준다.
지금은 숨이었다- 달리는 기쁨도- 빨라지는 피를 타고 신나게 울려대는 내 심장도-
놀랄만큼 순종적인... 내 다리도-
우리는 마치 , 학교 땡땡이라도 치는 소년 소녀처럼 죽어라 내달렸다. 그리곤 길 끝에 서있던 택시를 그대로 탔다.
"에...? 뭐야?"
"아저씨!!!! 강남역이요-"
"예?"
"빨리요- 강남역이요-"
질겁하게 놀란 아저씨는 어쩔수 없이 토끼의 말을 따랐다- 차가 익숙했던 길을 벗어나 멀어지고 나서야 장하임은 탈을 벗었다.
나도 탈을 벗었다- 우린 숨을 고르고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아이처럼 웃었다.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진 알수 없었다- 한참을 웃었다. 그냥 미소 짓는것도 아니고
배가 아프도록- 가슴께가 당기도록 웃었다.
서로의 모습이 이렇게 웃길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우린 웃음을 그쳤다. 그 모습을 다 보고 있던 아저씨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참 재밌는 사람들이네- 뭐 한거에요?"
장하임이 그 말에 씩 웃었다.
"방금 저희 도망쳤거든요-"
장하임의 두루뭉슬한 대답에 아저씨는 백미러 너머로 장하임을 보더니- 뭐 어떠랴 싶은 표정으로 웃었다.
백미러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저씬 놀란 듯이 눈을 피했다- 이런... 아직은 남들 눈엔 무서워 보이는가 보군-
"다린 어때요?"
장하임이 내게만 들릴만큼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만큼-"
약을 먹었던 건 힘이 빠져 넘어질까봐서였다- 그런데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 처럼 다리는 잠잠했다-
나에게 달린다라는 의미는 비틀비틀 조금 위태위태 해 보이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심장이 미칠듯 차오를 만큼 달리는 일은 잘 없었다. 장하임의 집에 달려왔던 날도
내 기준에선 그건 한껏 달린 일이었으나 이렇지는 않았다. 물론 다리도 아팠고-
그런데 손을 잡음으로써 그만큼이나 달라질줄이야- 다리는 아직도 잠잠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프면 감추지 말고..."
그녀의 말을 멈추고 내가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안 감출게..... 당신은 정말 기적을 만드는 사람인가봐-"
내 뜬금없는 말에 그녀는 고갤 갸웃 거렸다 살짝 웃으면서-
"고맙단 말이야 고민 안 해도 되-"
내 눈에 낯설기 그지없는 , 아니 언젠가는 저 안에서 시간모르고 흘렀으나 이젠 낯설어져 버린 밤거리의 풍경이 들어왔다
여전히 그곳에는 셀수 없을 만큼 많은 불빛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마치 멈춘건 나 뿐이었다는 듯이-
그녀는 강남역 쪽에 다다르자 차를 세워달라고 하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우습게 둘다 한 손엔 탈을 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내게 재촉했다-
"일단 선글라스 써요-"
".... 아... 그래... 근데.... 왜?"
나는 알았다고 하려다 되물었다.
"당신 얼굴 아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글쎼... 예전에나 그랬지- 그도 그럴게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데 .. 과연 알아채는 사람이 있긴할까? 없을텐데..
어쨌든 그녀는 초조해 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난 말없이 선글라스를 꺼내 꼈다. 오히려 이게 더 눈에 띄지 않을까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으니 그런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자- 뭐부터 할까요?"
그녀는 개구지게 웃었다- 나는 정말 얼마만에 이런 대답을 하는지
새삼 감격하면서 대답했다.
"뭐든지- 니가 원하는건- 뭐든지-"
그 대답에 장하임은 더 없이 예쁘게 씩 웃었다-
-
세진은 하임과 헤어 진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말끔하게 씻었다.
울지 않았다.
도리어 냉정을 드디어 되 찾았다.
확신이 들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같이 있었기에 눈치를 챘다고 하는 편이 나을까-
왜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는 자신도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하임의 눈을 보는 순간 세진은 확신했다.
이 사랑이 불안불안한 상태라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걸 아는 건 자신이 인식하는 것 보다 빨랐다.
마음에 안심이 들었다. 적어도... 남들은 구질구질하다고 할 지 모르나 이 사랑을..
아주 오랜시간 이어온 이 사랑을 갑자기
중단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하임의 눈에 자신이 비치자 세진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 사랑은 나 하나가 굳게 이어온 사랑이기도 했다. 어차피 포기 못할거면 나라도 지켜야 하는 거였다.
멍청이처럼 난 그 남자와의 대화에 미친듯이 화를 내고 흔들렸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 동안 부주의하게 담배를 들고 있다가 몇번이나 데였던가-
그 동안은 다른 생각할 틈 조차도 없었다-바보처럼 담배를 들고서 생각에 잠겨서 타들어가길 몇번-
그 불씨들은 자신의 손에- 그토록 조심해서 다치는 일도 잘 없게 관리했던 자신의 검지에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그 손을 무연히 물에 헹구며 다른 생각을 또 떠올린다-
.....
우울한 면은-
하임이가 내게 말하는게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는것
그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을 하임이는 견뎌내질 못하는 애였다. 천성적으로 고통을 맞서기보단
도망쳐서 피하는 타입의 아이였으니까 -그건 언제나 그래왔다.
극복하게 늘 도와주고 싶었는데 절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언제나 도망쳤다
그건 거의 언제나- ..... 내 품이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내 곁에 오면 아이는 나를 의지하니까-
유치하고 비겁하지만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번엔 하임이가 도망치지 않았다. 본인의 의지라는걸 강조하고 싶어 보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 세진의 마음엔 의혹이 커져갔지만 말이다. 그 남자에게 정정당당하고 싶어 한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야말로 하임답다는 생각 밖에 할수 없었다.
고통스럽든 어쩌든 간에 그 사람에게 충실하고픈 마음이 큰 거였겠지-
차라리 하임을 잘 몰랐더라면 좋았을까- 그 아이도 알고 나도 알고-
그 아이도 내 속을 훤히 알 테고- 나도 하임이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니까 더 힘든것 같다-
다 아니까- 몰아붙이기도 쉽질 않았다. 그냥 질문하고 내 입장을 밝히는게 고작이었지만-
진심으로 난 하임이가 자신의 이익만을 쫓길 바랬다.
나 말고 그 남자 말고-
자신만 신경쓰기를- 자신만 생각하기를
그저 이기적일수 있기를
그 남자와 이야기 해야 한다. 얘기 해서라도- 그 사람을 설득할수 있다면-
아니다- 지금 하임을 포기하라고 한들 그에게도 그 말이 당연히 들릴 리가 없을 것이고..
내가 부탁하고픈 말은 단 하나다- 하임에게도 한 말이다.
하임을 행복하게 할것,
하임이 단 1%라도 행복하지 않다 싶으면 미련없이 그녀를 보내 줄 것-
나에게로 곧장 그녀를 보내 줄수 있도록 할것
그것뿐이다.
그럼 나는 주어진 시간에 내 모든 최선을 다해서... 모든 영혼이라도 다 걸고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테니까-
그 남자보다는 당연히- 내가 더 그렇게 해줄수 있을 것이다.
난 자신있었다.
그 남자보다 내가- 그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임이는 아마 이해할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꼬마때 그 아이를 본 순간, 그 순간부터-
쑥스러운 시간도 없이 - 나는 너무나 자연스레 그 아일 사랑했는데-....
그녀의 모든 시간을 난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늘 그녀곁에 있었는데-.....
세진은 잠시 물기어린 얼굴을 다시 쓸어냈다. 내 앞에서 마치 뭔갈 잃은듯 울어댄 하임을 떠올린다-
그 순간 나는 확신할수 밖에 없었다. 아직 내가- 그녀의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양면적이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가 소중해서 내게 와서 이야길 정리했지만
그 이야길 하면서 울었던 그녀의 모습도.....
자신도 확신할수 없을 정도의 애정이라면- ...
내게 필요한건 단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
그가 가진 행복을 , 아주 잠시 놓칠 기회-
그 기회만 필요하다-
생각하며 씻다보니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제야 똑바로 바라본다- 조금은 내 스스로가 초췌해 진것 같다.
한동안 다른 생각따위 못 했으니 그랬겠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쌓아놓은게 없다고 하임이한테 당당하게 말해놓고선
나는 혼자 아주 많이도 쌓아뒀다- 그녀의 그림자 뒤로- 그 그림자 위에 잔뜩 쌓아놓고선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빛이 들어 내 눈에도 내가 잔뜩 쌓아놓은 것들이 보였다.
바보같았다. 아니- 멍청했다. 마라톤인줄 알고 있었으면서 -
나는 지칠만큼 죽어라 내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 그 순간에야 눈치를 챈것 같았으니까-
나는 세면대를 잡고 손으로 기댔다. 그래서 미치도록 내달리는 내내 내 가슴을 콕콕 찔렀던것 같은 숨을 토해냈다.
제대로-
세진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만 떠올렸다.
언제나 그가 사랑해온- 유난히 , 도전적인 눈빛을 가진 그녀만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 눈만 생각하면 , 자신은 무서울게 없었다.
더 없이 용감해졌다.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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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들어서자 그는 다소 어리둥절해 보였다. 영화관이라..... 나 자신도 오랫만이었다.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의식하지 못한 듯 보였으나 주변에선 오히려 그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적은 편이었지만 , 적은 사람들이라도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가....
그는 잠시 주변을 보다가 그제야- 자신을 본다는 게 느껴진건지 안경을 벗었다.
그리곤 내 머리위에다 그 안경을 올려 놓았다 마치 머리띠처럼-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선글라스, 벗어봤자인데... 그 안의 눈이 한밤중 실내에서의 선글라스보다 훨씬 더- 아주 훨씬 더 눈에 띈다는걸 말이다-
살짝 상기된 볼과 군데군데 페인트가 묻은 청바지 , 그리고 두리번 거리는 모습까지도.. 오늘의
그는 어린아이같은 인상이었다. 늘 아는 그와는 왠지 또 달랐다.
역시 천개의 꽃잎을 품은 작약다웠다.
그의 예전 모습이 약간 지금 같았을까.. 나로썬 그저 짐작할수 밖에 없는 모습이지만.... 상상해보면 비슷 할것 같았다.
아마 지금 보다도 더 천진했을지도 모르지-
터치 스크린으로 두시간쯤 지나서 볼수 있는 영활 예매하는 그의 뒷모습을 , 아마 모두가 흘긋흘긋 봤을 것이다-
그에게 바지는 찾아주지 않았는데- 윗 옷에 어울릴만큼 그가 평소 입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저런 바지는 어디서 찾았을까-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었을까?
게다가 한 손엔 거대하디 거대한 곰 머리-...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왜 자꾸 웃어- 오랫만이라서-..... "
그의 손 놀림이 더 없이 어색하다- 입으로 나오는 글들을 중얼거리며 하나하나 입력해 나가는 모습
나는 웃으며 물었다. 괜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마지막 영화본거... 언제에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잘 기억이 안나는 듯이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아... 아마 ***** 였을껄?....."
맙소사 ...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영화가 쏟아져 나왔을까? .... 그런데 그는 단 하나도 보지 않았단 말인가?
"그 영화 ... 거의 6년전에 나온건 알죠?"
그는 나를 쳐다본다- "영화 볼일이 잘 있었어야지-.. 볼일이 없었어-"
"명색이 글쟁이인데-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단 말이에요?"
"뭐... 책만 읽어도 되니까?...."
무연히 그런 말을 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다른 시선 중 유난히 따가운 시선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보니-
어린 여자애들이 보였다- 애들은 그 사람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 같이 느껴졌다. 나랑 고작해야 몇년 차이 날텐데... 하긴 갓 스물이라면 나이 차이가
내가 이모뻘이겠지- 그녀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솜씨 좋게-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고 예뻐보였다. 화장이 필요한건 내 나이지 그녀들의 나이가 아닌데-
그녀들은 지금 자체로도 빛날만한 나이니까-
나는 그제야 좀 창피해졌다. 지독히 화장 기술을 배우지 못한 나도 조금은 원망스러웠고...
하다못해 립밤이라도 좀 바르고 나올껄 싶었다.
옷에만 신경쓰느라 다른 신경을 전혀 못썼었으니까-
메마른 입술을 나도 모르게 내 손으로 쓸었다. 까칠하게만 느껴졌다.
그도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녀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그런 눈빛을 아주 오랫만에 보았다.
차가운 눈빛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알수 없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난 그 눈빛을 볼때마다 가슴이 시렸는데
소녀들은 오히려 그와 시선이 닿은게 즐거운지 꺄르르 웃었다.
그때였다. 그가 몹시 냉소적으로 웃은건-
씨익- 고른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정답지가 않다 단 하나도- 말 그대로 살벌한 웃음
"재밌네-"
그는 내게만 들릴만큼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속으로만 되물었다..'뭐...뭐가... 재밌단 거지?'
난 두려웠다, 약간.. 그가 그런 웃음을 짓고 나면 늘 까무라칠 일이 생기곤 했었으니까-
갑자기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그는 립밤 하나를 꺼냈다.
그 립밤이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난 감히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는 그걸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
제 입에 아주 찐하게 발랐다- 투명해 보이던 립밤은 그의 입술에 닿자 색이 나기 시작했다.
아련한 핑크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예사로 투명해 보였는데 ... 아니었다-
그 대목에서부터 나도- 그를 쳐다보던 소녀들도 아마 함께 얼었을 것이다. 그는 그 립밤을 아주 빠르게 두터울 정도로 입에 덧칠하더니
그 뒤에 나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뻣뻣하다 못해
사후 경직 뺨치게 굳은 내게 찐하게 뽀뽀를 했다.
나는 바스라질것 같았다.
맞닿은 입술이 타는 듯 뜨거웠다.
뜨거운 피는 다 입술에 몰리는 것 처럼-
차마 눈조차 못 감았다. 평일이고 여기가 모퉁이라는게 그렇게 다행일수가 없었다.
그래보았자 볼 사람은 보았겠지만... 조금이라도 적게 보기를
그 짧은 순간에 난 그 생각을 했다.
이 남자와 같이 있으면 심장이 견뎌낼 수가 없다. 행복감 불안감 슬픔 기쁨 모든것이 뒤섞여서
내 의지와 감정과 상관없는 일들이 끊임없이도 일어나니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눈조차 감질 못해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음미라도 하는듯이
그리곤 곧 살며시 떨어졌다. 나는 아직도 얼어 있었다. 바스락 건드리면 부서질 정도로-
그리고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는 제 입을 살짝 문질러 색을 확인하고는 내 입술을 보았다-
"예쁘네- 색이 고르게 잘 발렸어- "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여전히 얼어있는 내 얼굴에 머리에 얹어뒀던 자신의 선글라스를 끼웠다
그리고 여유 넘치는 태도로 내 손을 잡곤 시계를 본다
"영화 시간 좀 남았네-... 그럼 다른 거 하고 있을까?"
그러더니 손을 잡고서 그 여자애들 앞을 지나친다- 여자애들의 얼굴을 빨갰고, 이제 나와 그를 비교한다기 보다
그런 행동을 그가 한 것에 더 흥분한 것 처럼 보였다. 자기들끼리 "봤어? " 라고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여자애들을 지나칠때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 눈부시게 웃었다.
그리곤 우린 지나쳐서 곧장 영화관을 나왔다. 한참을 그의 손에 이끌려
거의 뛰듯이, 걷고 나서야 난 마치 숨을 참았었던 것 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뭐- 뭐에요?"
그러자 그가 빙글 돌아서며 멈춰섰다. 사람이 조금 적은 골목- 그는 웃고 있었다.
마치 재밌다는 듯이- 여전히 한 손엔 곰을 들고서-
"그 애들 , 표정 봤어?"
나는 얼굴이 그제야 확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게 다행이었다
와락 와락 흔들리는 눈이 어둠에 가려져서 안 보이길 빌었다.
"봤죠! 왜 그랬어요!!!!"
그는 씩 웃으며 마치 내 맘을 읽은 듯 내 얼굴에서 안경을 벗겼다. 그러더니 내 코를 톡 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화를 내고 있는데- 그에게 왠지 앙탈만 부리고 있는거 같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는 거 같았다.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니 생각이 보이고- 들려서-... 너 그 애들이 나랑 너랑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머뭇거렸잖아-
그래서 보여줬을 뿐이야- 너희 100명 와도 당신이 못 당해낼 여자라는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운 좋게 내 옛날 옷엔 다 이런게 들었거든.......혹시 있지 않을까.. 했는데.. 있네 "
그는 씩 웃었다. 마치 그게 왜 들어있는지- 누가 봐도 고른 사람의 테이스트가 드러나는 그 연하게 분홍빛으로 변하는
립글로즈의 주인이 누군지-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한 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댄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집착이 심해져 버린 걸까- 항상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한 순간의 생각도 말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그는 다 말해주는데
아무것도 이제 감추지 않겠다고 했고- 이젠 숨기지 않는데도-
"당신은 당신을, 참 몰라- 매일 나만 날 모른다고 당신은 말하는데-.... 당신이 당신을 더 몰라-
다른건 몰라도- 그 여자애들이 당신을 업신 여기는건 참을수 없었어-
안타깝게도 내 귀에 들렸거든-..당신의 생각이-
당신은 내가 아주 많은걸, 저버리고 내가 손을 잡을만큼 대단한 여자인데, 당신이 그걸 너무 자주 잊잖아"
그는 다시 씩 웃었다. 눈매까지도 부드럽게
"예전엔 이런 짖궃은 장난을 수시로 해 댔는데..... 너무 오랫만이라- 장난 안같고 맘이 떨렸어-"
그는 내 코를 다가와서 자신의 코로 부드럽게 톡 , 다시금 쳤다. 그리고는 살짝 떨어져서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바투 내 얼굴에 다가서서 말했다.
"당신이어서 떨린 거야-..당신이니까.... "
이젠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간절함과 애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골목길에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터질듯 달리는 심장을 막고 싶었다. 숨이 가뻤다.
내 입에 올라 앉은 그 색이 누구 색인질 알면서도 그랬다. 누구의 몫인질 알면서도
이게 내게 왔다는게 믿을수 없이 기뻐서- 이기적이기로 한 나는 입을 살짝 막았다.
그가 내 생각을 눈치 채진 못하길 바라면서,
여전히 내가 빛이고 정의롭고 용감하다고 생각해 주길 바라면서
그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곤 내 머리에 내려 앉은 낙엽을 손을 가져가 떼어냈다.
우린 잠시 그렇게 , 가로등 불 빛 밑-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마치 우리 둘 뿐인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둘 뿐인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