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침대 바로 옆에서 시작해 벽을 따라 놓인 상자들 주위에는 옷가지며 세면도구, 화장품, 책과 문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창 아래 자리한 책상 위에는 열쇠, 여권, 구겨진 입장권, 기념품, 항공권 티켓이 빈틈을 찾기 힘들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벽에는 손예진이 푸른 수목 사이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인쇄된 포스터가 사람 키 크기만큼 확대된 채로 붙여졌다.
민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방문을 들어서다 자신의 방 풍경에 압도되어 멈춰 선다. 긴 한숨만 내쉬곤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나. 끔찍하다, 끔찍해.”
발을 디딜 자리를 찾기 힘들어 조심스레 움직이다 무언가 잘못 밟아 황급히 발을 떼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아얏!”
다급한 소리를 내뱉은 후 둘러보니 여행가방에 달린 은색 버클을 밟았다.
“이 지긋지긋한 짐정리는 끝이 없네. 짐 쌀 때도 진이 다 빠졌었는데 이걸 언제 다 처리하지.”
발을 감싸 쥐고 넋두리를 하는 민호의 뒤로 윤미옥이 다가와 방을 둘러본다.
“너 아직도 짐 정리 안 끝난 거야? 짐도 얼마 안 가져갔잖아. 원래 있던 대로 도로 넣어놓으면 되지 얼마나 시간을 끌려고 그래?”
민호는 그런 미옥의 말에 역정을 낸다.
“엄마는 그게 말이 쉽지. 직접 해봐요. 짐을 얼마 안 가져가기는. 옷이랑 세면도구만 해도 양이 얼만데. 거기다 책도 있지.”
방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셔츠자락을 오른쪽 발을 이용해 방 안으로 쓱 밀어 넣은 미옥은 책이 들어있는 상자에 눈길을 주며 혀를 찬다.
“읽지도 않는 책은 그러게 왜 가져가. 무게만 나가게. 내 처음부터 알아봤다.”
민호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방을 나서면서 던지듯 말한다.
“아버지 오시기 전에 말끔히 치워놓고 밥 먹으러 나와. 아버지 오실 때 다 됐다.”
미옥이 나가고 혼자가 된 민호는 바닥에 널려진 짐 위에서 대강 자리를 잡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를 곧게 잡는다. 양쪽 다리를 써서 제대로 지지대를 만든 후 몸을 앞으로 누이더니 쌓여진 짐 틈새로 양팔을 모아 거칠게 집어넣는다. 앞으로 진행하며 팔을 옆으로 쫙 펼쳐 길을 터는 게 순식간이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바닥에 쌓인 짐을 갈라 그 양 옆으로 물기둥이 아닌 짐기둥을 만들어낸다.
지나다닐 공간을 만들어낸 민호는 아주 큰일을 한 것처럼 휴, 하고 숨을 내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부터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접힌 종이를 펴서 읽고 난 후 관련된 것은 한쪽으로 모으고 영수증은 날짜와 금액을 일일이 확인해서 형광펜으로 체크한다.
서류정리가 거의 끝날 때쯤 손에 들어온 것은 작고 단정한 글씨로 쓰인 은지의 연락처다. 이름과 휴대폰이 두 줄에 걸쳐 나란히 적혀있다.
“지금쯤 한국에 들어왔을 텐데.”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적힌 메모를 바라보더니 주변을 뒤져 휴대폰을 찾아낸다. 액정 위에 번호판을 띄웠지만 번호를 누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세 번째 번호까지 겨우 눌렀을까, 민호는 번호를 마저 누르지 못하고 휴대폰의 화면을 꺼버린 후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지갑에 도로 집어넣는다.
“짐정리 하고 나서 연락하자. 마음 편하게 만나야지 이렇게 뒤숭숭한 기분으로 만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책상 위에 있던 서류 전부를 정리하는 동안 두어 번 더 그 메모가 들어있는 지갑을 쳐다보던 민호는 지갑을 아예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는다. 자신이 갈라놓아 여백이 생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거 언제 다 끝내냐’라고 탄식하며 손을 놀린다. 뒷머리를 잡아뜯어가며 물건을 들추는 민호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가 교차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방안의 빈공간이 넓어진다. 해가 지며 주위가 어둑해지자 민호는 일어나서 불을 켜며 자신이 정리한 방안을 둘러본다. 상자는 모두 비워졌고 옷은 모두 옷장으로 들어갔다. 자잘한 물건들만 세분해서 집어넣으면 거의 끝날 듯하다. 정리되어가는 상황에 만족한 민호는 방 전체를 둘러보며 잠시 침대 위에 걸터앉아 다이어리를 편다.
“그래, 말끔한 기분으로 연락을 돌려야 만나도 좋은 거지. 나갔다 돌아오니까 볼 사람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