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찾지 않았던 강남 아파트... 미령이 현관문 앞에서 고민스럽
게 서 있었다. 이제는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성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까지도 계획된 일인지도 몰랐
다.
조성현. 처음부터 기분 나쁜 눈으로 정육점 고기를 고르듯 자신을 골랐
던 남자.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구석이 있었지만, 인연이 마지막이라
했을 때 안타까웠던 남자...
미령이 길게 한숨을 빼고 열쇠를 꽂아 돌렸다.
실내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둡고 침침했다. 미령이 더듬더듬 베란다로
걸어갔다. 발 끝에 걸려 튕겨져 나가는 캔소리가 들렸고, 축축한 걸 밟
고 찜찜해했다. 이중 커텐을 활짝 열어 제기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
다. 시큼한 냄새가 확 빠져나가는 듯 싶었다. 뒤돌아 거실을 보고 깜짝
놀랬다.
언제 먹었는지 모를 음식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굴러다니
는 술병들... 재떨이에 수북히 쌓여 있는 담배... 음식 찌꺼기가 남은 접
시들... 속상한 듯 작은방으로 가 벌컥 문을 열었다.
성현이 태평스럽게 자고 있었다. 당장 뭐라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호
흡을 가다듬고 문을 닫았다. 소매를 걷어부치고 거실을 쓸고 닦고 청소하
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에 모아진 쓰레기만도 두 봉지였다. 낑낑매 쓰
레기 봉지를 내놓고 손을 탁탁 털고 들어섰다. 싱크대에 쌓인 접시들...
화나지만 꾹 참고 씻었다. 게다가 술에 절었을 성현을 위해 북어국까지
끓였다. 할 일을 다 끝낸 미령이 아직도 잠들어 있는 성현에게 다가가 가
볍게 앉았다.
"아직도 자는 거야? 일어나... 자더라도 일어나서 속 좀 풀고 다시
자..."
미령이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술냄새를 풍기고 성현이 돌아누웠다.
"깼으면 일어나... 나 할 말 있어서 왔어...."
뒤치락거리다 성현이 억지로 윗몸을 일으켰다.
"할 말이 뭔데.....?"
"우선 밥부터 먹고....."
미령이 쌩긋 웃었다.
"뭐하러 왔어.... 할 말은 전화로 하면 되잖아..."
비척거리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북어국이 놓인 식탁 앞에 성현이 앉았다. 간만에 받아보는 밥상다운 밥상
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 있어? 집이 엉망이야..."
"좋을 리가 있겠어."
"아직도 내가 널 배신했다고 생각해?"
"아니..."
"그럼.....?"
성현이 허공에 두고 젓가락질을 했다.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래... 근데 그렇게 해줄 수 없을 거 같아 미안해...."
"원길씨 좋은 사람이야...."
돌 씹은 얼굴처럼 성현이 가만히 있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줘... 응?"
미령이 간절히 애원했다.
"그 얘기라면 집어쳐.... 세상엔 좋은 사람 없어. 사람들은 다 악해. 뭐
든 자기 이익으로 착하게 살아갈 뿐이야...."
"그 사람이 당신을 보고 싶어해."
"날?"
다소 놀라 미령을 봤다.
"응... 내가 사촌오빠라고 했거든..."
그러자 숟가락을 탁 내려놨다.
"제정신이야!!!"
잔뜩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왜......왜에.......?"
미령이 당황해서 쩔쩔맸다.
"사촌오빠라고? 장 회장이 너에 대해 하나 조사 안 했을 거 같아?... 사
촌오빠라니!! 빌어먹을...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벌써 내 신분까
지 노출 시킨 거야!! 응!!"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였다.
식은땀을 흘리고 성현을 바라봤다.
잘못했을까... 잘못한 거겠지...
성현이 분에 못이겨 손등을 식탁에 찧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말한 거 없어... 정말이야...."
어지러운 듯 이마를 붙잡았다.
심호흡하고 미령을 차갑게 봤다.
"너가 저지른 일이야..."
"뭐......"
"장 회장 목숨 끊어버릴 거야!!!"
미령이 무서워 긴장했다.
"날 알고 있다면 내가 위험해져... 어쩌면 모든 게 들통날 수 있어....
안돼... 그럴 순 없어.... 나랑 어머니랑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순 없어...."
기절이라도 할 듯 성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