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오랜만에 다시 봐도 좋다.”
재희는 우진이 가져 온 그림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우진은 비누 거품에 심취해 있었다. 인간이 비누로 씻어 내려는 것은 묵은 때나 흙먼지 같은 오염이지만 우진은 인간이 씻는 행위의 본질이 순수함 보다는 욕망과 과시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다.
최고급 외제 자동차의 보닛에 뒤 덮인 비누거품의 추상적인 무늬, 유명 브랜드의 비누와 샴푸가 노출된 샤워 장면, 터질듯 한 뱃살을 가진 사람들이 목욕탕에 앉아 있는 그림을 본 교수들은 우진의 작품을 남다르게 평가했다.
재희나 다른 친구들이 정물이나 인물, 풍경을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우진은 각종 공모전을 휩쓸 만큼 비구상 분야의 강자가 되었다. 탄탄한 이론적 배경과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기발한 해석을 듣고 있노라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교수님께서 하도 작품 좀 갖다 놓으라고 하셔서.”
“대학 때 그린 거라고 누가 믿겠냐?”
“아이고 참! 부끄럽다. 빨리 작업해서 싱싱한 놈으로 바꿔놓을게. 그때까지만 저기 구석에 어디 숨겨놔. 교수님이 찾으면 보여드리고.”
재희는 우 화백의 그림 하나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우진이 가져온 작품을 걸었다. 우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을 때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우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고, 그가 대단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 또한 아빠가 의도한 결과였다. 만약 아빠가 우진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우진의 그림을 갤러리에 걸어 두었다면 아빠는 무슨 말을 했을까? 재희는 우진이 또 다른 우 화백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