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은 붓을 든 손 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유치원 오전반을 마치고 오는 아이들에 맞춰 한 시까지 학원에 가야했는데 잘 하면 그 전에 그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발가벗은 여자는 쪼그리고 앉은 채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로봇의 형상을 한 머리는 번쩍번쩍 불을 밝히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는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지만 로봇은 그녀의 결정이 오히려 감사했다. 식상했던 몸을 버리고 젊고 싱싱한 새로운 여자의 몸을 가질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은 점점 시퍼렇게 변색이 되었고 피부는 쭈글쭈글 주름이 졌다. 로봇은 더 밝은 불빛을 쏘아대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예준은 캔버스 왼쪽 아래에 사인을 마친 후 크게 기지개를 폈다. 시계는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놀 때 시간이 제일 잘 간다고 하지만 예준에게 미술작업만큼 시간을 잘 잡아먹는 괴물은 없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손목과 어깨가 아픈 줄도 몰랐다. 비로소 붓을 놓아야만 생리적인 현상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작업을 마친 예준은 급히 버너에 불을 켰다. 라면으로 점심을 대강 때우고 나갈 생각이었다. 양은냄비를 올려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예, 혹시 정예준씨 되시나요?”
“예, 맞습니다.”
“킨텍스 아트페어 사무국인데요. 지난 번 부스 문의 하셨죠?”
“아, 예. 그 때 안 된다고 해서.”
“예, 그런데 참가를 신청한 업체가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부스가 하나 비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드렸어요.”
“아!”
예준은 지난 번 사무국으로부터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는 참가할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저희가 올해 수도권에서 열리는 마지막 페어거든요. 편의를 봐 드릴 테니까 한 번 진행해 보시죠. 오늘 말고는 기회가 없거든요.”
예준은 편의를 봐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 얼마죠?”
“업체이신가요?”
“아뇨, 그냥 개인인데요.”
“마침 잘 됐네요. 지금 나와 있는 게 제일 작은 부스거든요. 원래 부가세 별도로 250만원 받는데. 부가세 포함해서 200만원에 해 드릴 게요.”
“정말요? 그럼 할게요.”
예준은 부가세 별도니 포함이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하지만 50만원이나 싼 가격에 전시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덜컥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럼 저희가 참가신청서랑, 행사개요, 준비사항 등을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지금 이 번호로 이메일 주소를 보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참! 참가비 오늘 중으로 입금 가능하시겠습니까?”
“어, 그게.”
“그럼, 다음 주 초에 될까요?”
“예, 예. 그 때까지는 입금할 수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이메일 바로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한 예준은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7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니까 겨우 3주 밖에 남지 않았다. 예준은 양은냄비의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전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참가비였다. 얼마 전에 받은 급여가 지난달에 쓴 현금서비스와 카드 대금으로 나가고 얼마 남지 않은 터라 다시 현금서비스를 풀로 받는다고 해도 참가비를 충당하기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