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은 복도 창틀 위에 음료수 두 상자를 얹어놓고 지도교수 연구실 문 앞에서 30분째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지도교수는 연구실 앞의 낯선 사람에게 물었다.
“저…….”
“아! 성준이?”
“아, 예준입니다.”
“아! 미안 미안. 기억나네. 강예준?”
“예, 뭐, 맞습니다.”
“그래 어쩐 일인가?”
예준은 지도교수를 따라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전화를 몇 번 드렸는데 강의 중이신지 연결이 안돼서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졸업생이 학교 오는 게 뭐가 이상한가? 그래 무슨 일로?”
“저, 이거.”
“아이고 참, 뭣 하러 그런 걸 사와?”
“저, 다름이 아니라 혹시 조교 자리가 있는지 해서요.”
“조교?”
“예. 한 2년 정도 공부도 하면서 조교 생활 가능할까 싶어서.”
학원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똥 닦는 일을 계속 하다간 바보가 될 것만 같았다. 예준은 자신이 그리던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것만 같아 고민 끝에 모교를 찾아 왔다.
“왜? 취직이 잘 안 돼?”
“아, 그게 좀.”
“그래, 요즘 쉽지 않지. 일부러 이렇게 왔는데 어쩌나? 올 초부터 조교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어! 마침 저기 오네.”
교수는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온 미모의 여성을 예준에게 소개했다.
“박 조교 인사해요. 한 참 선배 되겠네. 우리 과 졸업생 강예준.”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저, 아니 강예준입니다.”
“교수님! 1학년 리포트 모아왔는데 여기 두고 갈까요?”
“어, 그래요.”
교수 연구실 안에는 조금 전 나간 박 조교가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상황이 이렇네.”
“아니 괜찮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고요. 혹시라도 나중에 자리가 나면 연락 주셔도 됩니다. 꼭 조교 아니라도 뭐든 괜찮습니다.”
“그래, 그러지. 여기 전화번호랑 이름 메모해 놓게.”
연구실을 나온 예준은 그냥 집으로 가려다 회화과 실습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뭣 하러 음료수를 2통씩이나 사서 교수한테 안겼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기분이 안 좋았다. 졸업한 지 5년이 지나 자신을 아는 후배들이 거의 없을 테지만 예준은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실습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의가 없는 학생들 몇 명이 앉아 데생과 유화작업을 하고 있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저 때만해도 이렇게 막막한 현실이 앞에 놓여 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존재감 없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학생이 설 수 있는 땅은 단 한 뼘도 없었다. 미술계에서 밥을 먹고 사는 방법도 제대로 알 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전공을 살려 밥벌이를 해 보려고 버티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생각됐다. 차라리 사회에 나온 처음부터 모든 걸 포기하고 기술이라도 배웠으면 얼굴에 기름때를 묻힐지언정 매월 생활비 걱정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준은 실습실 알림판에 붙어 있는 A4 용지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뚝섬 매립지 예술원 청년화가 지원 사업 안내.’
‘작업 공간 입주 및 무료 이용, 작품 활동비 및 기초 생활비 지급.’
예준은 극적으로 한 건을 올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뭐든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