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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흔들림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19.9.5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남녀주인공의 이야기를 엮어보려 노력했습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흔들림 8
작성일 : 19-09-09 09:44     조회 : 64     추천 : 0     분량 : 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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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8.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서 믿을 수가 없다. 화면에 뜬 전화번호. 그의 번호를 받았다는 사실이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하나 때문이다. 이건 모두 하나의 잘못이다. 상현 씨랑 죽이 맞아서 나랑 진우 씨만 달랑 뒤에 남겨지는 걸 전혀 개의치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졌지. 잘못한 건 없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지만, 하나와 상현 씨 없이, 진우 씨와 둘만 만나기로 했다. 굳이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서로 동의해버렸다. 이걸 왜 내가 변명하고 있지? 진우 씨와 만나기로 한 게 어때서? 이건 데이트가 아니다. 단지 카메라 전시회장에 같이 가기로 했을 뿐이다. 우리 두 사람의 공통관심사였고 하나와 상현 씨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하나는 때마침 비행을 해야 하는 날짜였고 상현 씨는 친척 어른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갔다. 이것도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전시회에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마다 인연이 된다면 결혼정보회사는 문 닫아야 할 판이겠지. 그런 걸로 인연이라니. 어쨌든 뭘 입고 가지? 도대체 언제쯤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평생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할 고민일지 모른다. 너무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어둡고 우중충한 느낌이 드는 건 싫다. 약속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마음만 급해져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맨 처음 점찍어두었던 옷을 골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고른다고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제 뛰지 않으면 곤란하다. 헐레벌떡 문을 나서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온다.

 “엄마, 나 지금 급하게 어디 가는 중이거든.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누가 다쳤대?”

 “누가 다치긴. 약속시간에 늦어서 그래.”

 “이것아. 맨날 잔소리를 해도 어디 귀로 들어야지. 매사 미리 준비하라고 하잖아. 꼭 닥쳐서 하려니까 그렇게 늦는 거야.”

 “지금 그런 잔소리 들을 여유가 없다고. 나중에 통화해. 끊어.”

 평소 전화통화를 자주 하지도 않는데 꼭 이런 때 연락이 온다. 가끔 하는 통화이니 만큼 안부라도 제대로 묻고 싶지만 지금은 정말 여유가 없다. 버스 놓치면 진우 씨에게 늦는다고 사과하는 전화라도 해야 할 형편이다. 버스에 올라 쌕쌕, 거리며 겨우 숨을 가다듬다 보니 의구심이 들었다. 딱히 전화할 이유가 없으면 연락하지 않는 엄마인데 왜 전화를 했을까? 무슨 일이 있나? 그렇지만 그 생각은 금방 진우 씨를 만날 일로 지워져버렸다. 뛴다고 흘린 땀 때문에 얼굴이 번들거리면 어쩌지?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용케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맙소사, 온통 땀에 젖어 마치 방금 육상경기를 끝내고 골인 지점을 통과한 선수의 모습이다. 손수건을 꺼내 대충이라도 닦아보려는데 버스가 차선을 바꾸기 위해 이동한다. 나름 균형을 잡아 별 무리 없이 손수건을 꺼낼 수 있었다. 이, 은, 정, 운동감각 좋아.

 땀을 닦고 나니 이제 가볍게라도 메이크업을 할까 싶었다. 땀 때문에 번져버린 얼룩이 상상이 되니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손에 든 손거울과 손수건을 집어넣고 메이크업 도구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어딘가 앉아서 하면 편하겠지만 아직 자리가 나지 않는다. 아마 다음 정류장을 지나면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을 해야 했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님 지금 당장 움직일 것인가. 두 번이나 별 문제 없었으니까 세 번째도 괜찮겠지. 손에 든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집어넣었다. 이제 꺼내기만 하면 되는데, 아차, 버스가 기우뚱거렸다. 하필 버스 앞으로 끼어든 스쿠터가 문제였다. 곧 정류장에 도착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버스 기사가 앞에서 달리는 스쿠터가 너무 가깝다고 느꼈는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고 덕분에 버스가 휘청거렸다. 가방에서 꺼내든 콤팩트가 손을 떠나 위로 날았다. 바닥 위에 닿기 전에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 휘저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거의 닿을 뻔했지만 탕,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올랐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이 흩어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바로 눈앞에서 뚜껑이 열렸고 뭔가가 얼굴에 튄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최대한 빨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굴러다니는 물건을 줍느라 바빴다. 등 위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쩜 그리 빨리 굴러다니는지 흔들리는 공간 안에서 물체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걸 새삼 경험했다. 손에 닿는 대로 주워들었고 전부 되돌아왔는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빨리 내려야겠다는 생각만 불같이 떠올랐다. 바닥에 흩뿌려진 아이보리색 가루를 보며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미안했지만 다행히 아저씨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버스의 바닥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손수건을 다시 꺼내 손에 든 물건들을 둘둘 싸맸다. 제대로 정리해서 집어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하차벨을 눌렀지만 이미 늦었다. 그때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신병 훈련소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을 때 이런 기분이 들려나. 간절히 버스에서 나가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문을 발로 차버리고 뛰어내릴 마음까지 들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내려 반대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뛰면서, 겨우 땀을 닦아놨는데 또 흠뻑 젖겠네, 라며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면서 잡생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겠다는 일념, 그 하나에 집중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인다.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숨이 차올라서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헐떡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짓던 그가 조금씩 거리가 줄어들수록 어째 이상하게 얼굴빛을 흐린다. 뭐지?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아님 땀범벅이 된 내 얼굴이 너무 번들거려서 그런가?

 “하아, 하아.”

 인사말을 건네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목에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진공기관이 있다고 하던데 내쉬고 들이쉬는 공기로 가득차서 소리를 낼 여유 공간이 없으리라.

 “아, 하아, 하아.”

 안녕하세요, 라고 억지로 쥐어짜내다 아, 에서 멈췄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진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웃다가 만 모습으로도 보인다. 어이없겠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으리라. 하지만 내가 늦지 않게 전속력으로 뛰어왔다는 것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노력했다는 점을.

 “하아, 하아, 하아.”

 잠시 가만히 기다려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는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나한테 말을 시켰다면 억지로 대답하는 말을 꺼내려다 목이 막혀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다. 그 정도로 숨이 가빴다. 이런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겠지. 그렇게 한동안 머릿속이 핑핑 도는 것 같더니 잦아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고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꺼내려던 말을 마저 끝마쳐야겠다는 생각까지 가능해졌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냈다.

 “아, 안녕하세요.”

 그가 살짝 목례를 한다. 말이 없다. 기분이 나빠진 걸까? 뭐라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은 않고 내 팔목을 잡는다. 이건 무슨 행동이람? 팔을 잡아끈다. 왜? 기분 나쁘다고 어딘가로 끌고 가는 건 어째, 그, 그렇지 않아요? 몸에 저항할 힘 같은 건 당연히 남아있지 않아서 그가 이끄는 대로 아주 고분하게 끌려갔다. 도착하고 보니 화장실 앞이었다. 어라?

 “거울부터 보셔야겠어요.”

 거울? 땀 닦으라고? 아무리 번들거려도 그렇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화장실로 끌고 오는 건 살짝, 무례하지 않나? 아무튼 그가 하라는 대로 여성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론 땀범벅이 되어있을 거라 예상하며 거울과 마주했다.

 “맙소사.”

 땀이 문제가 아니었다. 콤팩트를 떨어뜨릴 때 그걸 주우려 몸을 최대한 숙였었는데 얼굴이 너무 가까웠나 보다. 아이보리색 분가루가 얼굴이랑 목 주위 온통 범벅이었다. 이건 그저 괴물이다. 괴물이라고! 첫 데이트인데! 아니, 데이트는 아니지만 이게 뭐냐고! 물이라도 묻혀 닦아내려고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는데 그만 손수건으로 말아두었던 물건들이 후두둑, 밑으로 떨어져 내린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흐읍, 흐읍.”

 소리를 내지 않게 자제하려고 했지만 가슴 위까지 차오른 덩어리가 펄떡거리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며 어딘가 막힌 듯한 울음소리를 내게 만든다.

 “은정 씨, 괜찮아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우 씨가 들은 것 같다.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울음까지 터뜨리는 여자가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모르겠다.

 “예, 예, 괜찮아요. 금방 나갈게요. 잠시만요.”

 비어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눌러대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킨 것 같지만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 노력했다.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주워 이번엔 제대로 정돈해서 집어넣었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이며 목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는 동안 울음이 잦아들었다. 기분은 차분해졌지만 그와 비례해서 밖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진우 씨를 마주해야 한다는 공포가 점점 커져간다. 이건 악몽이다. 얼른 깨고 싶다.

 “읍.”

 꿈이라면 깨라는 마음으로 얼굴 위로 물을 한껏 끼얹었지만 물론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젖은 머리 때문에 더욱 볼썽사나워졌다. 가슴이 답답하다. 자꾸 손수건으로 젖은 부분을 닦아내 보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작은 손수건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은 넘어섰다. 거의 체념한 채로 화장실 밖으로 나섰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진우 씨가 물끄러미 나를 본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그래도 조금 전보다 낫네요.”

 슬그머니 웃는다. 위로가 되지 않는데. 이런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어,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요.”

 나오려는 눈물을 막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래요.”

 뭔가 말하려다 그만 둔다. 그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건넨다.

 “물기를 조금 더 닦으셔야겠어요. 아님 어디 가서 타월을 하나 살까요?”

 “저기, 그게요∙∙∙∙∙∙.”

 그가 손을 흔든다.

 “굳이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나름 사정이 있으시겠죠. 어디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있을 텐데요.”

 그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편의점을 발견했다. 큼지막한 비치 타월을 하나 구입해서 열심히 닦고 있으니까 진우 씨가 손을 내민다. 그 손 안에 커피가 들렸다.

 “어떤 걸 사야 하나 고민하다 달달한 카라멜 라떼로 골랐는데 괜찮아요?”

 다시 눈물이 핑 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감상적인지 모르겠다.

 “아니, 제가 또 울린 겁니까?”

 “저 사실 잘 우는 성격이 아닌데 완전 울보라고 생각하시겠네요. 오늘따라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그래요. 원래 안 이런데.”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덥석 커피를 받았다. 정말 뭐라도 마시고 싶었다. 다행히 커피가 뜨겁지 않았다. 서늘하게 냉장 보관된 것이라 좋았다. 빨대를 꼽고 그대로 절반 이상을 들이켰다. 그가 같이 커피를 마시며 한층 마음을 놓은 얼굴을 한다.

 “이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얼굴빛도 살아나시는 것 같네요.”

 “그게 말이죠, 어떤 일이 있었나 하면요.”

 “아니, 굳이 설명 안 해도 된다니까요.”

 “아니요, 말하게 해주세요. 자세히 알려드리고 사과를 하고 싶네요.”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은정 씨가 하시고 싶으시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털털하게 웃는다. 웃으면 코에 주름이 잡히고 얼굴이 각이 지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경찰이 저렇게 사람 좋게 웃으면 범인들이 너무 쉽게 보지 않을까? 아님 나한테만 그렇게 웃어주는 걸까? 무슨 생각이야, 너?

 “엄마가 전화만 안 했어도 그렇게 늦진 않았을 거예요.”

 엄마랑 통화한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쁜 딸답게, 엄마 핑계를 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정거장을 지나쳐 내려 온힘을 다해 힘껏 뛰어왔다며 마무리를 하자 그가 허허, 거리며 소리 내어 웃는다.

 “차라리 늦는다고 하고 편하게 오셨으면 더 나을 뻔했네요. 앞으로는 절대로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화장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쑥스럽게 같이 웃었다. 이미 하루를 다 써버린 것처럼 힘이 빠지고 피곤함이 차올랐지만 이제 전시장 관람 시작인데 지쳐 널브러질 수는 없었다. 다행히 구경하는 것은 재미가 쏠쏠해서 금세 지나간 일들은 잊어버리고 둘러보기 바빴다. 카메라도 휴대폰만큼이나 기술이 발전하고 기기를 교체하는 주기가 빠르다. 어쩔 땐 너무 빨라 그저 감탄만 하게 된다. 어느새 새 모델들이 이렇게 많이 출시되었나 감탄하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리개며 렌즈의 발전이 특히 놀라웠다. 점심때가 슬슬 가까워지자 아직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급격하게 졸려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뛰어온 데다 내 추악한 몰골에 충격 받고 울기까지 해서 체력이 바닥난 게 분명했다.

 내가 피곤해 보였는지 그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쉬자고 했다. 괜찮다고 사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에 내기 힘들 정도로 어딘가에 주저앉고 싶었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얼른 근처 벤치로 향했다. 허리를 내려놓는데 이 세상 모든 중력이 내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 든다. 몸이 천근만근이라는 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금 딱 내 상태가 그랬다.

 “점심시간인데 어디 들어가서 먹을까요, 아님 제가 뭐라도 사올까요?”

 일어설 힘도 없어요, 라는 말이 목 언저리를 맴돈다.

 “힘들어 보이세요.”

 오죽 하겠어요.

 “아니요, 힘들긴요. 너무 신나게 구경하느라 조금 지쳤나 봐요. 잠시 쉬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어디 먹을 만한 거 없나 둘러보고 괜찮다 싶으면 사올게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마지못해 그렇게 하자는 식으로 그를 보냈다. 진우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잠깐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이제는 누가 이 자리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해도 차라리 날 터뜨리라며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힘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질 못하겠다. 거의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그 와중에도 내 앞엔 참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간다. 저 사람들은 이런 나와는 상관없이 에너지가 충만해서 옆 사람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며 앞을 향해 걸어간다. 예정대로라면 나도 진우 씨와 저런 모습으로 같이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해져야 하는 건데. 친분을 쌓는 건 다음에 하고 지금은 그저 나를 업고 우리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 절이라도 하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은 옷 색깔이 참 화려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밝은 색 계통의 옷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런 색은 도저히 그냥 줘도 못 입겠다는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다 옷들의 무늬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흩어진 털실처럼 사방으로 삐죽삐죽 뻗어나가는 것 같더니 윤곽이 뿌옇게 흐려진다. 어, 왜 다들 흐릿해지지? 집중해서 보려고 눈에 힘을 줘봤는데 힘이 들어가긴커녕 눈꺼풀을 뜨고 있기도 힘들다. 진우 씨가 곧 올 텐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눈 앞 화면이 가물거리더니 딸칵, 하고 카메라 렌즈가 잠기듯이 한순간에 세상이 온통 까만 어둠에 잠긴다. 화면 정지. 줌 아웃.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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