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조사한 기록들을 버렸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그때 잡혀 온 사람이 워낙 많아서 조사한 기록들이 산더미처럼 여기저기 쌓여 있었는데 네 기록 하나 정도는 쓰레기통에 버려도 됐는데. 걔 있잖아. 수현이 그년! 그년도 누군가를 꼬셔서 그랬던 것 같더라. 서울 시내에서 활보하고 다니더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등신같이!”
근수가 푸~ 소리를 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전과자가 되는데. 허허!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절대 네 잘못이 아냐!”
“그나저나 큰일이네. 너는 관공서에는 취업이 어려울 것 같은데.”
“허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나를 알면서도 한번씩 오해를 하더라. 내가 그런 흡혈귀 군단에 왜 들어가? 그런 등신들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적 없었다. 그나저나 그건 괜찮지만 기업체에도 정보가 공유되면 그땐 곤란해지겠지? 그렇겠지?”
성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뻔히 나올 대답을 했다.
“전역 취소하고 다시 말뚝 박으러 들어가라. 그게 낫겠다.”
근수가 쌍 손을 들고 손사래를 쳤다.
“어이 싫어! 싫어! 나는 군대 체질 아냐! 농담인 줄 아니까 그런 위로는 하지마. 그런데 만약에라도 그게 꼬리표로 남아 있다면 복학할 필요가 없잖아. 지방 대에 나와봐야 취업도 어려운데 꼬리표까지 달고 있는 놈을 누가 뽑겠어. 일단 고민 좀 해봐야겠다.”
“그래도 복학은 해! 부모님이 피땀 흘려 농사지어 벌은 돈이 벌써 들어갔잖아.”
“휴~~ 그게 아깝다고 또 버린다는 좀 무모한 것 같은데. 사실 군대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철없는 어린 애 같은 짓을 했다고 반성을 엄청 많이 하면서 복학을 하면 정말 열심히 공부만 하려고 했는데 대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전과자 돼서 나온 기분 있지. 그래도 어쩌겠냐? 일단은 그 놈의 복학 한번 해보지 뭐! 혹시 아냐? 정권이 바뀌면 사면될지! 허허허!”
“글쎄! 정권이 바뀌어도 그 놈이 그 놈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말고 학점이나 잘 만들어놔라. 내가 그날 널 구하려고 목을 싸맨 게 큰 실수였다. 너는 그때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놈이었는데 내가 오지랖을 부려서 네 인생을 망친 것 같기도 하다. 미안하다. 친구야!”
“자식이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 마음을 몰라는 주는 법이 문제지. 어쨌던 내려가서 생각 좀 더 해보고 판단을 해야겠다.”
근수는 그 길로 고향으로 내려와 일단은 부딪혀보자며 온다 간다 말도 사라졌던 학교로 돌아갔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도둑 고양이 구멍에서 개구멍으로 바뀐 것처럼 모든 게 바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김근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럿이 되는 복학생들이 후배들에게 기억을 잃어버린 환자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정신과 의사의 역할을 단단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아픈 가슴을 치유해주지는 않고 악몽을 되살리는 역할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이수경이 잘 있나?’란 질문이었다.
술자리만 가지면 김근수 인생 자체가 이수경의 현재 삶을 설명해주는 대리인이며 변호인이나 된 것처럼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건 그들도 김근수가 이수경의 현재에 대해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단지 안주거리가 필요해서 던진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런 안주는 김근수에게도 이수경에게도 미래의 삶을 위해서는 사약이었다.
세월이 해결해주겠지 했지만 술만 들어가면 그들은 마치 이수경과 직접 연애 질을 한 것처럼 김근수의 연애 사를 적나라하게 읊기도 했다. 그건 단지 그들만의 상상이었다. 화장실에서 한 상상을 그들이 녹화를 하지 않아나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더 가관인 건 김근수가 휴학을 한 이유를 이수경 대한 싫증으로 매도도 하고 있었다. 그 탈출구가 군대라는 소문이 지나치는 미세먼지처럼 귀를 가렵게 했다. 그 소문은 김근수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같았다. 후배 여학생들은 기피대상 일호의 복학생은 김근수로 낙인도 찍은 놓은 상태였다. 도망쳐도 받아줄 군대가 없는데도 여학생들은 김근수 몸에 똥이나 묻은 것처럼 피해 다녔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어도 이수경이 가져다 주던 자판기 커피가 없듯이, 다가오는 손길을 둘째치고 가는 손길도 거부를 했다. 복잡한 생각들에 머리에 들어가는 것도 없었다. 일급 살인을 저지르고 출소한 전과자처럼 여자 후배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데도 김근수가 행여나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까 봐 도서관에서조차 피해 다녔다.
어이가 없던 김근수가 하루는 점심을 먹고 화단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아주 도발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어이! 아저씨! 왜 이렇게 찌그려져 있어? 군대 갔다 오면 인간이 돼 돌아온다는 말은 들었어도 찌그려져 있다는 말은 처음인데, 찌그러진단 말을 내가 지어볼까? 어쩌다가 이 꼴이 됐어요?”
잠시 눈을 마주친 김근수가 이건 또 뭐야? 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그것도 여학생이 겁 대가리 없이! 김근수가 자세히 쳐다보면서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너 그러다가 맞는다. 이 아저씨 정신 상태가 요즘 정상이 아니다. 그때 곤봉으로 그 놈의 머리를 한대 맞았어야 정신을 차렸을 건데…… .”
김근수가 올라갔던 주먹을 그냥 내려놓지 않고 후배 여학생들을 생각했는지 제법 세게 여학생의 이마를 쥐어 박아버렸다.
“어이 씨! 주둥이만 더러운 게 아니라 주먹도 더럽네. 그런데 아저씨! 위문편지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 언어순화 교육을 시키려고 국어사전까지 찾아가며 일주일에 한번씩 한번도 빼지 않고 보냈는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답장을 보냈어야죠.”
펑펑 물면서 멱살을 잡아야 할 상황인데도 이 아가씨도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알아듣지도 못할 질문만 했다. 김근수의 굽혀진 검지가 한번 더 날아갔다.
“너! 정외과가 아니고 국방학과냐?”
“헐! 기억력이 좋은지 소갈머리가 좁아터졌는지 알 수가 없네요. 열 받아도 내가 받지 왜 아저씨가 받아요? 그때 내한테 한 망발을 다시 한번 해보세요. 기억력인지 소갈머리인지 테스트해봐야겠어요.”
김근수가 눈에 힘을 잔뜩 주자마자 여학생이 겁을 먹었는지 움찔했다. 그러나 김근수가 주먹을 겨드랑이 속으로 넣자 다시 눈을 힘을 주고 노려보며 있었다. 김근수가 일격을 가했다.
“야! 이 비겁한 새끼야! 그 언니 안 내려 놔! 했던 말도 잊지 않고 있다. 너 같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곤봉에 맞아 죽을 지경인데 그대로 두겠어?”
그건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바로 비웃는 인상으로 바꾸어 놓고 대들듯이 김근수를 움찔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