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 자체도 자신을 무능한 부장으로, 이쪽과 관련한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취급을 한 고대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로 들려 차라리 이 사람이 곁에 없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과 함께 자괴감도 밀려왔다. 여기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란만 가슴과 머리 속에 존재할 뿐이고 아무런 판단도 자의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네 집! 아니 회사로 가야지. 임마!”
도무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이런 식의 농담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연어는 잘 알고 있었다.
혼자 내버려두고 모른 척 할 사람은 절대로 아니고 냉큼 달려 와서 해결을 해 줄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지금 약을 올리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부분이 더 화가 나고 무슨 잘못으로 이렇게 빙빙 돌려 약을 올리며 도움을 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귀여운 인형을 들고 여동생에게 약을 올리듯이 들고 마당을 빙빙 돌며 쫓아 다니는 것만 같았다.
“왜 이래~~ 오빠~~ 내한테 왜 자꾸 이래~~~. 내가 뭘 잘못했길래…..
수리는 머리가 한대 맞은 것처럼 띵해지고 갑자기 측은해졌다.
언제 내가 네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나?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
아! 그 놈의 6촌 오빠!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또 옹졸했다.
아직도 그때 앙금을 버리지 못하고 복수를 하고 있다는 꿀꿀한 기분과 함께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가식적인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더 이상 유치한 장난은 그만 치고 싶었다.
벌써 손주 볼 나이의 연주를 아직도 결혼할 사랑하는 연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꿈꾸던 알콩달콩한 연애와 신혼살림의 환상에 잠시 젖어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위기감도 몰려왔다. 연어에게 엔진에서 불이 날 정도로 달려갔다.
“야! 타!”
눈물 범벅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꼭 안아 보듬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막둥이 여동생 같았다. 한 손을 내밀어 손을 꼭 잡고는 또 친 오빠처럼 잔소리를 시작했다.
“간다고 인사는 하고 왔어?”
짧고 연약한 펀치가 소나기처럼 어깨로 쏟아졌다.
“지금 이 얼굴로 가서 인사하란 말이야? 너무 잔인해”
“뭐! 젖은 얼굴이 요염기만 하구만. 그래서 여자는 이런 우수에 젖은 얼굴이 인기가 있단 말이야”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 보기만 하고 수리는 능글맞게 웃다가 연어 볼로 손을 올리고 있다.
“저리 치워”
연어가 사정없이 손을 후려쳐버린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느낀 이 사람과 자신의 입장은 지난 세월만큼이나 큰 괴리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걱정 마! 보험처리 하면 돼”
그의 목젖에는 단 한 방울의 따스한 정감을 가진 온수는커녕 차디찬 물기도 없는 너무나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곧 이 사람의 목소리에서 학창시절에 어쩌다가 화가 나면 들었던 온몸에 소름을 치솟게 하는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귀청이 갈기갈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거길 제가 왜 가야 합니까? 용역 주고 있는 회사에서 가야죠. 저는 못 갑니다. 예?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 죽일 일이 있습니까? 저도 안 가지만 이 놈도 못 데려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휴대폰에 입을 대고 한참 동안 욕만 빼고 신경질을 내고는 자포자기 했는지 죽을 상을 쓰고 또 다른 데 전화를 하고는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했다.
“뭐 하려고? 누군데?”
“네 회사 회장! 영감님께서 노망이 들었는지 널 데리고 저 멀리 바다에 갔다 오란다”
“와! 정말? 그런데 방금 뭐랬어? 회장님에게 나를 이놈이라 해서? 오빠 정체가 뭐야? 회장님하고 어떤 사이야?”
“자빠지면 밟아주는 사이다. 정말은 오늘은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다. 오늘 파도가 셀 건데. 진짜 짜증나네. 아! 미치겠네…..”
윤부장은 회장과 이 사람과의 관계보다 바다에 더 가고 싶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괜히 건드려봤자 고집불통인 이 놈 아니 이 오빠에게서 덕 될만한 걸 하나도 가져 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 정말 가고 싶었어. 오빠! 그런데 배에는 왜가? 우리 화물 하역 마치고 다른 데 안 갔어?”
“오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어이 씨! 짜증나. 야! 배가 어디 너희 짐만 싣고 다니냐? 너희 회사서 전세 냈냐? 지금 먼 바다에서 다른 부두에 들어 갈 순서 기다리고 있어. 가서 화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란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닌데… 이… 씨! 그런데 너는 배에 못 타. 내가 같이 탔다고 할 테니까 부두서 기다려”
“안돼! 그건 직무태만을 떠나 거짓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옥신각신 오누이 같은 말다툼에서 오빠가 이기지 못하고 선박 대리점에서 발행해준 승선 허가서를 들고 세관을 거쳐 작은 배들이 있는 부두에 도착해 유조선으로 데려다 줄 작은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르자마자 전혀 별게의 세상을 본 윤부장은 신기해하며 먼 바다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출발하려는지 부르릉 소리와 함께 굉음이 귀청을 요란하게 할 때쯤 누군가가 윤부장 가슴을 꽉 눌렀다. 깜짝 놀라 가슴을 누르는 사람을 보고서야 아무런 방어자세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 윤부장이 그대로 놔뒀다.
“자! 꽉 싸매야 해. 갑갑해도 참아. 한번쯤 잘 사는 남의 인생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을 거야.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그런데 이 바다에서 일을 하면서 그런 환상은 없애기로 했어. 해 뜰 때와 해 질 녘에 파도가 발갛게 색칠된 바다는 정말로 환상적이야. 파도도 너울도 잔잔함도 시시각각으로 달라. 해변에 조약돌 같은 작은 돌에 스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때를 경험한 적이 있을 거야. 잔잔한 먼 바다를 보고 뛰어들고 싶을 때도 있었을 거고. 그런데 막상 한 발짝 더 디뎌 바다로 들어가면 바로 두려움이 밀려 들어오지? 그런 경험 있었을 거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바다도 마찬가지야. 육지에서 보면 동경의 대상이고 여기에 있으면 두려움의 대상이지. 항상 바다를 존중해야 해. 돈 많고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막상 그들 삶 속에 들어가면 이 바다와 같겠지. 바다에서 거의 매일 일하는 나는 육지에서 일하는 돈 많은 놈들처럼 절대 거만을 떨지 않아. 거만을 떨면 바다는 바로 화를 내. 그래서 이 오빠가 구명조끼를 꽉 채워주는 거야. 항상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알았어? ”
피곤해서인지 뱃멀미를 해서인지 연어가 꾸벅꾸벅 조는 듯이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수리는 입만 아픈 것 같아 눈살을 한번 찌푸리고 연어간 찬 구멍조끼 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조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