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 회장님께서 우리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신 사실. 내가 인물도 좋고 사내답게 생겼다며 회장님께서 내한테 장학금을 주고 싶어 하셨지. 그런데 성적을 보면서 명목이 없다며 야단을 치셨어. 그래서 내가 어쩌겠나? 네 힘이 절실했지. 네 덕에 장학금 받고 겨우 졸업했다. 허허허! 그래서 나도 네 은혜에 보답하려고 네가 그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힘 좀 썼다”
‘이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린가? 분명히 공채로 들어갔는데. 그럼 입사 비리란 말인가?’
“거짓말해도 좀 그럴싸하게 하세요. 오라버니!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로 짜맞추기를 하셔요. 그 머리로 많이 힘드셨겠어요. 계속 장난치면 나 화 낸다. 그리고 내 학점이 전부 에이 플러스였어. 다른 회사에 갔어도 백 퍼센트 합격이었어요. 말 돌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씀하세요. 저 짜증납니다”
금방이라도 잡아 먹을 기세로 팔짱을 가슴 위까지 올려 끼고 눈을 부라려 노려보고 있다.
“허허! 자식이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어디 팔짱을 지르고 노려봐. 그럼 그런 줄 알지. 나이가 더니 너도 천상 아주머니구나. 말이 엄청 많아 졌어. 아이고 세월이 그 아름다웠던 아가씨를 이렇게 말 많은 아낙네로 데려와 버렸구나. 참! 안타깝다. 누구를 원망하리. 세월이 야속할 수 밖에”
마이동풍이란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디 하나 진지한 구석이라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가지고 논다라는 표현이 이 상황에서는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아무리 추궁해도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굳이 밝힐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또 불쾌해졌다.
이 사람도 회장님도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은 보호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부장이라는 직책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이 사람의 소유 같기도 했다. 그럼 이 회사에 계속 남아있다는 건 이 사람 업무를 대신한다는 말과 같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나! 회사 그만둘래. 기분 더러워. 마치 대리인생을 사는 것 같아. 오빠도 기분 나빠! 빙빙 돌려가며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 내가 무슨 장난감이야?”
분명히 화가 나서 신경질을 내고 있는 데도 이 사람은 그렇게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대답도 가관이었다. 아예 무시해버리고 있었다.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번 출장에서 네 소임은 다하고 그만 둬”
소임은 또 무슨 놈의 소임?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이익 창출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진급도 하고 급여도 많이 받고 또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여기에 출장오지 않았는가?
그럼 지금 소임을 다하고 있는 중이지 아는가?
얼마나 더?
회사가 아닌 자기를 도우라는 말인가?
그럼 계속 대리로 남겨두지 부장은 왜 달아줬는가?
이 놈도 그 놈의 고대리와 같이 나를 판단한 단 말인가?
이에서 바드득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내 할 일이 아냐. 오빠가 할 일이지. 나는 오빠 대용품이 아냐. 내가 무슨 대리 운전 기사인 줄 아나. 싫어”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지만 자존심이 굉장히 상하고 지금까지 한 직장 생활에 괴리감마저 들었다. 남의 자리를 대신해 지키고 앉아 있었다는 패배감도 몰려왔다. 학교 다닐 때 답안지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이름까지 바꿔 치기 한 사람의 대리 짓을 아직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자존심도 상하고 불쾌했다.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경제적인 부분에서 나오는 배부른 말이 아냐. 입사해서 지금까지 일산처리로 진급 잘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면 그 이유를 집에, 신랑에게 어떻게 설명할거야? 내 때문에 그만뒀다고 할래? 설령 그만둔다고 해도 그 뒤에 머리 속에 맴도는 퇴사 이유는 어떻게 감당할래?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놈! 아마 너는 그 놈의 굴레에서 죽일 때까지 못 벗어 날 거야. 그러니 이전처럼 잊고 살아. 솔직히 불붙는 청춘에 연애 질 한번 못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나도 너도 그 중에 하나로 여겨”
뼈가 있는 말임은 분명했다.
연어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수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만 실제 지금 연어 머리 속은 수리처럼 이리저리 즉답을 피하기 위해 굴리는 수많은 생각과 달리 텅 비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잖아. 나는 계속 오빠 품속에 살아왔다는 그런 마음밖에 들지 않아. 따뜻한 사람의 품속이 아닌 전자동 온도 조절기가 설정된 온실 속에서 살았다는 그런 기분! 개운하지 않아! 나는 단 한번도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오빠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런 생각밖에 할 수가 없어. 로봇으로 살았다고 얘기하는 게 맞겠지. 참! 허무하다”
이런 얘기를 왜 했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지만 왠지 지금까지가 온실 속에서 활개를 쳤다는 기분과 그 시건방진 고대리의 비아냥이 사실인 같은 느낌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다 그런 거 아닌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처신하듯이 그렇게 살면 되지. 그리고 이 회사에 내가 추천한 것도 아니잖아. 네가 원서를 넣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그때 넌 이 회사에 입사가 간절했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사랑하는 사람이 꼭두새벽에 다른 놈과 그 놈 자취방에서 팔짱 끼고 나오는 모습보고 꼭지 안 돌아 갈 놈이 어디 있어? 만약에 내가 그 양아치인 아영인지 하고 꼭두새벽에 자취방에서 나오는 걸 네가 봤다고 상상해 봐? 너는 꼭지 안 돌겠어? 오히려 절대 뽑지 마라고 청원서를 안낸 게 다행이지”
연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머리 속도 복잡하고 가슴도 갑갑했다. 얽힌 실타래였다.
“그런데 오빠는 왜 우리 회사에 입사 안 했어? 회장님 돈으로 대학 다녔으면 당연히 보답을 해야지.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 혹시 내보고 보답하라는 의미였어? 대용품으로?”
웃음이나 미소 같은 표정이 전혀 없이 씁쓸하지도 진지하지도 않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는 한숨을 깊이 몰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 동안 회장님 멀리서 보필해야만 해. 그럴 사연이 있어. 가까이서는 보필할 게 없어. 그리고 부탁인데 너도 오랫동안 회장님을 보필해주길 간청할게. 앞으로 섭섭한 일이 생겨도 나를 보고 이해해줘. 부탁이야”
연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탁대로 하기로 은연중에 스스로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질 때 회장님의 전화로 보필을 해야만 했다.
“윤부장! 내려간 김에 하역 마치고 화물이 잘 들어 왔는지 확인하고 와. 그 놈에게 맛있는 거도 좀 사주고. 출장비로 청구해. 그럼 수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