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심 쾌재를 부르고 말았다. 가슴이 쾅쾅거렸다. 이게 왠 떡인가 하는 기분이 덜컥 쏟아 올랐다.
두 말하지 않고 그날 밤에 서울 집으로 돌아가 옷가지를 챙기고 다음 날 다시 KTX을 타고 내려왔다. 깜짝 놀랬다. 부두 출구에서 배까지 태워 단 준 잘생긴 남자가 역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일정을 어떻게 아셨죠? 그리고 누가?”
“예! 수리 형님 명령입니다”
“그 사람과 무슨 관계….. ??”
생긴 것처럼 아주 샤프하게 망설임 없이 대답을 했다.
“아무 관계 아닙니다. 맞아 죽기 싫어서… 허허허”
농담으로 하는 대답 같아 웃었지만 그럴수록 그 사람의 드러나 있는 정체가 아닌 실체가 궁금해졌다. 연어 자신만 대리기사 같은 직장 생화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일인 다 역의 대리 배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호호호! 깡패인 가봐요?”
“예!”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아주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럴수록 의문은 더해져 갔다.
그날 이후 하역이 마치고 육상 저장 탱크에 들어 온 수량을 확인할 때까지 연어는 그 잘생긴 남자가 말한 깡패와 자연스럽게 부부가 되었다.
하나 섭섭한 게 있다면 그는 함께 오랫동안 같이 있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낮에는 배에 홀로 던지다시피 연어를 홀로 두고는 자기 볼일 봤다.
밤에는 갈라섰다가 재결합한 부부가 되어 본적이 없어 그런 부부의 생활을 모르지만 신혼 때 느낀 신혼부부처럼 뜨겁게 불을 태우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불안하고 어색했지만 결혼 전에 이미 부부처럼 지내서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늦게 오면 기다려지기조차 했다.
3만 톤을 하역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고 그 일주일 동안 둘은 일반적인 부부와 같았다.
자기 일 마치면 집에 가듯이 그는 호텔에 와서 잠시 자취생활 하던 때처럼 그렇게 하고는 옛날에 연어가 잠은 집에서 잤듯이 그도 잠은 자기 집에 가서 잤다.
그가 집으로 가고 나면 그때서야 현실이 인정되었다.
그는 나의 남자가 아니었고 외로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마 남편도 지금 자신처럼 현지 남편이 있듯이 그런 마누라가 있지 않나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출장 내내 이상한 점은 그는 절대 자기 차에 연어를 태우지 않았고 배에만 버려 두다시피 내던져 두었다.
얼씬도 하지 않았고 어쩌다 배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부두를 지나치는 그를 보고 눈을 마주치려 해도 그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차를 태워주고 끼니를 채워주는 사람은 그가 아닌 선원과 잘생긴 젊은 남자였다.
그 남자와 얘기할 때 그의 눈은 매를 보지는 못했지만 저런 눈을 매의 눈이라고 하는구나 할 정도로 선뜩했고 그 사람은 항상 긴장돼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밤에는 달랐다.
늦은 밤에 호텔로 찾아와서는 그날 일들을 상세히 들려 주고 메모를 하게 하고 USB에 저장해온 일지 같은 보고서를 노트북에 저장시켜 주었다.
그 저장된 내용들을 일일이 설명하며 현장에 있었던 일들을 잊지 마라고 제 각인시켜 주듯이 암기식 스파르타 교육을 실전처럼 시켰다.
자신을 위한 건지 아니면 회장님의 엄명을 철저히 수행하는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따뜻한 품에 안긴 실전은 절대 회장님의 엄명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또 사랑을 나누고는 그는 자기 둥지로 갔다.
수리가 간 둥지는 연어가 생각한 그 둥지가 아니었다.
“동원아! 이거 한번 볼래”
수리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나온 숫자를 적어 보여준다.
“이렇게 3만 톤에 0.8%를 만들면 240톤이야. 탱크로리로 하면 약 13대야. 지난번에 애들한테 돈 줬지. 그 애들이 이건 책임졌어”
그때 보스인 권태도 자리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260톤을 더 빼낼 거야. 그러면 탱크로리가 14대가 더 추가 되야 되고 그럼 총 27대야. 지금 여기서 출발한 탱크로리가 총 20대인데 동원이 네가 준 자료에 보면 15대 밖에 안되잖아. 그럼 12대는 다른 데로 세 나갔다는 말인데 이 다른 회사가 어딘지를 잡아야 하는데 벌써 잡았겠지?”
수리가 빙긋이 웃으며 동원을 쳐다본다.
“형님은 어떻게 친구를 둬도 그런 친구를 뒀어요. 김경일이가 자기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로 제품을 팔고 있더라고요. 여기 동영상 보세요”
휴대폰에 담긴 동영상을 심각하게 한참을 쳐다보는 동안 얕은 한숨 소리도 내고 있었다.
한 숨과 함께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넌지시 쳐다보는 권태는 수리 머리 속을 짐작하고 있었다.
저 머리 속에는 자기만의 숱한 실망과 비애 같은 게 일렁거리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측은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한때는 친구여서 수리의 마음이 복잡할 거라 추측을 했지만 그건 하나의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비웃기나 하듯이 수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권태는 그 웃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기업형 조직이 되기까지 아무리 친구라도 조직이 정한 법을 벗어나면 원수가 진 다른 조직의 보스를 처리할 때보다 더 냉혹하게 씨를 말려 태워야만 했다.
수리는 지금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지만 씨를 말려 태워 조직을 유지하는 데 일조를 했기 때문에 인정에 이끌릴 수 없는 입장이란 것이 권태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다고 아무리 보스라도 지금은 권태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모든 계획은 수리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뭐? 멋지구먼! 이 놈 이거 생각보다 능력 있네. 거래처를 많이 뚫었네. 강성호는 어떻데?”
권태는 빙긋이 웃기만 하고 동원이 보고를 듣고 있다.
“강성호는 이번에 5대만 가져 갔습니다. 제 생각인데 임운영이와 강성호가 조금 털어진 게 아닌가 봅니다. 소문으로는 강성호가 요즘 자금이 딸리는지 돈을 그때, 그때 바로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화가 묵직한 돌덩이에 눌린 듯이 무게 감이 느껴졌다. 수리도 권태도 이런 분위기를 아주 싫어한다. 그래도 지금은 진지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수리가 밝게 이끌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은 최신식 장비를 들고 은행 금고를 열고 보니 현금이 한 푼도 없다는 말과 같네. 도둑 놈들 다 굶어 죽겠다. 허허”
권태가 이 말이 언짢은지 눈살을 찌푸려 수리를 째려보고 야단을 치듯이 언성을 높인다.
“야! 이 놈아! 그 말이 우리도 도둑 놈으로 들린다. 말 좀 가려서 해라”
수리가 자세를 고쳐 다소곳이 앉아 머리를 숙여 사죄인지 장난인지 애매모호한 말로 권태 입술에서 미소를 번지게 하고는 계획을 다시 한번 주입시키듯이 말을 한다.
“아이고 놀래라. 형님! 도둑이 제 발 저리죠. 제가 그걸 깜빡 했네요. 허허허! 그 놈들과 우리는 차원이 다르죠. 그리고 코딱지만한 회사는 먹어봐야 골치 아프잖아. 지난번에 보고 드린 대로 이번에 깔끔히 마무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