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 진급 시켰어? 일감은 내가 언제 안 준다고 했어? 정형이 하기 싫다고 했잖아”
“방금 요. 정군에서 정형으로 진급도 시켰으니 이젠 제 일에 대한 가치에 맞게 올려주신 후에 일감을 주십시오”
“에이! 이 놈아! 네가 똑바로 하는 일이 뭐가 있었어. 맨날 허둥대면서”
“그건 옛날이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올려 줄 거죠?”
“알았어. 이제 너 말고 다른 놈과 일하고 싶다. 이러다가 내가 겉늙겠다. 이 놈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보다 더 정정하십니다. 허허허”
“에끼! 이놈”
수리와 회장은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한다. 중요한 사안은 주로 요즘 유행하는 SNS을 통해 주고 받는다.
“참! 제가 보내드린 문자에 있는 그 놈을 꼭 보내주십시오. 제가 입사시켰으니 퇴사도 시켜야죠”
“알았어. 정형만 믿네. 이번 기회에 꼭 뿌리를 뽑아 줘”
“염려 마십시오”
전화를 끊은 회장이 윤부장을 들어 오라고 한다.
“윤부장! 이번에 내려가면 잘 배우고 와! 배도 타보고. 지난 번에 내가 얘기했지. 그 친구가 잘 안내해 줄 거야. 그리고 유의할 게 하나 있는데… 이번에 고대리가 거기 아마 나타날 거야. 자존심 숨겨! 알았어?”
윤부장은 궁금해졌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수입 화물을 실은 선박에 간다고 할 때는 잠시 신기하기도 해서 흥분도 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희망의 불씨 같은 것도 보였다.
부장 딱지를 떼고 이사에서 상무에서 전무까지라는 꿈도 꿨다. 그 꿈은 입사하면서부터 가진 꿈이었고 얼마 전에 낙하산 타고 온 한낱 대리에게 무시 당했을 때 그 꿈은 더 간절해졌다.
이번 출장에서 배에 올랐다는 현장 경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킬레스건을 단단히 보호해주는 보호대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 정군에서 정형으로 왔다 리 갔다 리 하는 그 사람이,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호칭을 보면 분명히 젊은 사람이 맞는데 자존심을 숨기라는 말은 또 고대리 같은 젊은 싸가지 없는 놈인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소름이 오싹 끼치고 그 사람! 그 선배에 대한 만남, 기대, 설렘 등등 돈은 깡그리 사라졌다.
그런 혼돈은 얼마 가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지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울산 KTX역에 내리고는 바로 실망을 했다.
회사에 듣던 대로라면 을이 항상 갑을 태우러 온다고 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라고 무시하나?
택시를 타고 부두 앞까지 오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울산에 가면 을이 나와서 기다리고 먼저 고래 고기부터 먹고 업무는 요식 행위로 잠시 하고 바로 소고기를 먹으로 간다고 했는데 개똥이었다.
“남편 만나러 가나 보죠?”
택시 기사가 윤부장이 부두에 가자고 하는 말에 선원의 아내로 여겼던지 어림짐작으로 물어서 놀라며 고개를 돌려 기사를 쳐다본다.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다..
“남편께서 외항선 선장이신 모양이죠?”
“예?”
백미러로 힐끔 쳐다 보는 기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기사도 약간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은 좀…”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너무 귀부인 같아서요. 선장들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하잖아요”
그때서야 ‘아~~’ 감탄사 섞인 탄식이 나왔다.
“아니에요. 업무 차 출장 가는 길이에요”
속으로 웃었다. 귀부인은 무슨 귀부인. 회사서는 부장이고 집에서는 주방장, 청소반장, 세탁 반장 등등 반장에다가 출신성분도 촌 년인데.. 그래도 그렇게 보였나 싶어 다시 백미러로 눈이 갔다.
“제가 택시만 50년째 하는데 사모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흐뭇했다.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그 놈의 햇병아리 대리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부장 취급을 받았을 때 당했던 모욕이 한꺼번에 날아 가는 것 같았다.
이젠 그 친구에게 자존심 버리고 배우기만 하면 뒤는 장미 빛 인생이다.
“다 왔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윤부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택시 기사에게 부두라고 했는데 바다는 보이지 않고 눈 앞에는 무슨 휴전선 같은 철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혹시 윤부장님이십니까?”
분명한 건 군복은 입지 않았지만 정장에 넥타이를 맨 이 사람은 대통령을 지키는 사복 입은 군인같이 보였다.
“아! 예!”
참 잘 생겼다는 생각밖에 별다르게 떠오르는 게 없이 이 사람을 따라서 출입 허가를 받고 다시 이 사람 차에 올라서 일 분도 채 가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다는 없었다.
눈 앞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엄청 큰 철판밖에 없었다.
굉장히 높았다.
뒷덜미가 부서지도록 젖힌 후에야 ‘아~~’ 탄성이 쏟아졌다.
배가 이렇게 크구나.
그 놈과 같이 탔던 나룻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했다.
아직 잠결 같기도 했고 방금 꿈에서 깨어난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뇌가 어떤지 의사가 아니라 모르지만 정말 신기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이름이 떠올랐다.
죽도록 공부하고도 학력고사 당일 날 문제를 보는 순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그때와 정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잊자고 있자고 그토록 애를 쓰고 노력한 결과가 한 순간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학력고사에서 그랬다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지 않고 아마 어느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만 일을 했을 것이다.
정말 거짓말 같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회장님이 저 녀석을 보낸다고 할 때 정군, 정형 하듯이 ‘윤부장 그 놈 보낼게’ 할 때 많이 서운했다.
이름이라도 뒤에 넣어줬으면 했는데 그냥 부장이었다.
그런데 뒤에 이름이 아무짝에도 필요 없었다.
부르지 않고 그냥 걸어가서 허리 춤을 감싸 걸으면 아무런 앙탈도 없이 같이 걸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부르고 싶었다. 백 년을 산다고 하면 거의 사분의 일 평생 만에 만나는 연인의 이름을 꼭 부르고 싶었다. 어제도 본 것처럼,
“연어 왔어!”
이건 무슨 소리?
연어?
누가 내 이름을 불러?
잠결인가?
그런데 너무 다감하게 들려왔다.
마치 어제 밤에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 귀속을 떠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고개를 획 돌리다가 목 뒤에서 바지락 소리가 들려 뒤 덜미를 움켜 잡고는 다시 고개를 살살 돌렸다.
너무 급하게 돌렸다.
그렇게 반가웠나? 그런데 은연중에 기대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나 보는 조직 폭력 배 졸개처럼 완전히 팔자걸음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폭력부터 행사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걷는 모습은 눈에 상당히 익은 걸음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뒤통수가 따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