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고개를 숙여 고해성사하듯이 권태에게 읊조렸는데 수리가 동원이 말에 다시 고개를 빳빳이 쳐 든다. 굉장히 애민해 져 있었다. 이렇게 이글거리는 눈은 처음이었다. 살벌했다. 동원은 속으로 ‘정말 그 깐 여자가 뭐길래? 누군지 보고 싶다’을 되뇌고 있었다.
동원이 감각적으로 칼을 피했듯이 날새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언을 했습니다”
허허실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입에서는 나오는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시끄러운 편이라 동원은 조금은 얕보고 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허허실실의 웃음은 이 사람의 고유 모습이 아니란 걸 알게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이 사람에게 보인 자신의 모습을 확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이 사람이 거부감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지나가버린 이 사람에 대한 처신을 서서히 바꾸기로 동원을 다짐을 했다.
“그 깐 여자라니? 내한텐 얼마나 소중했는데. 그런 말 하지마. 알았어? 또 그러면 정강이 꽉 부셔버린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또 비실대며 웃었다. 그래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원은 형님들에게 했던 몸에 익은 자세로 가슴을 배꼽까지 붙였다. 이 사람도 이런 자세에 익숙했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미간만 주무르고 있었다.
수리가 잠시 미간을 세게 주무르고는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르고 있다.
김경일만 떠올리면 또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상하게 다른 동기나 후배들 이름은 잊지 않았지만 유독 그 사람 이름만 까맣게 잊었다. 하면 된다. 취직에 힘까지 보태줬는데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 나올 것 만도 같았다. 그래도 만나는 그날 이름을 못 부르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머리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그 사람 이름을 꺼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거짓말을 산더미처럼 보태 죽을 각오로 노력을 했다.
그 사람 이름을 잊기 위해.
그날 그 배신감에서 그 사람과 비슷하게 닮은 사람을 숱하게 만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새로 만나는 사람들 이름으로 머리 속에 주입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뿔싸 그 사람도 그 후에 그 사람과 비슷하게 닮은 사람들 이름들도 깡그리 잊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또 다시 불 붙을 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그 회사에는 절대 찾아가지 않았다.
그 사람을 깡그리 기억 속에서 털어내자고 다짐한 그날 새벽 5시.
학교 도서관 문이 열릴 시간이었다.
자취방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향하다가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전날 밤에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 자취방으로 갔는데 그 사람이 어떤 놈의 자취방에서 다정히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기분 더러웠다. 불결했다.
년 놈의 멱살을 붙잡으면 손이 더러워질 정도로 불결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가식의 미소를 짓는다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졸업하고도 손 편지를 쓰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김경일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을 할 때 얼씨구나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매너 있게 끝낼 줄 알았다.
세월이 엄청 흐른 후에 김경일이 말했다. 거기가 어디인지 지명은 잊었지만 일산이 갓 도시화 될 무렵 허허벌판 귀퉁이에 있던 어느 포장마차에서였다.
이름도 잊은 그 사람에게 프로 포즈를 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대답은 ‘수리 허락’이었다. 그때 또 불결했다. 그 사람이 허락을 받을 사람은 수리가 아니라 자취방에서 팔짱 끼고 나온 그 놈이었다.
그때 죄를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 사람에게 핑계거리가 그렇게 없었던가? 자문만 하고 답은 얻지 못했다. 지금도. 그 후로 그 사람도 김경일도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 김경일은 거머리였다. 잊을 만 하면 전화가 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떠올랐다.
머리를 흔들었다.
이름을 머리 속에서 털어냈다.
구역질을 했다.
이름의 찌꺼기를 모조리 토해 버렸다.
그 사람의 취업에 한 몫을 한 회사의 회장을 돌아가신 아버님 다음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회사의 일은 하지 않고 있다.
그냥 들러리로 급할 때 도움만 주고 있다. 불결한 그녀를 두 번 다시 꼴도 싫어서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그 사람 이름은 까맣게 잊게 되었다.
그런데 악연도 인연이라고 인연이라는 게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과 가슴에서 털어버리고 싶은 그 이름 중에 하나가 또 나타났다.
그 놈도 새벽 5시에 어떤 놈의 팔을 잡고 가던 그년도 이번에는 처참하게 응징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년을 응징할 수는 없었다.
그 년의 회사를 위해 지금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회사 따로 그 년 따로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속이 시끄러웠다.
“참! 형님! 혹시 모르니까 몇 장만 주십시오”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 수리에게 전해지고 그 지폐는 다시 동원에게 건네졌다.
“그날 그 화물을 검사하는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술자리를 만들 테니 네가 그 애들 주머니에 넣어줘. 그 다음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한번 더 얘기하는 데 강성호는 절대 쫓지마. 김경일이만 잡아서 족치면 줄줄이 걸려드니 애들한테 김경일이가 화물을 받는 모든 동영상을 찍으라고 해”
단호하게 딱딱 끊어서 하는 지시에 동원이가 또 깜짝 놀라 고개를 발 앞에까지 숙이고는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형님! 무섭습니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솔직히 헷갈립니다”
“자식이! 나도 지금 헷갈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자식이 몇 번 봤다고 벌써 겁먹고 있어. 나! 무서운 사람 아냐! 너 혹시 쓸데없는 소문 듣고 나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겠지”
수리가 빙긋이 웃으며 동원이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다시 톡톡 다독여준다.
권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고 동원이도 뭔가 후회를 하는 모습이 수리에게 읽혀졌다. 그 소문을 다시 끄집어 내 준 것만 같아 후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수리는 개의치마라는 등의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그때 일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 게 불문율로 돼 있었다.
수리는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절대 그 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단지 제풀에 풀이 죽듯이 그 놈 손에 쥔 자기 칼이 자기 심장을 찔렸고 수리도 제풀에 꺾이듯 놀라서 도망치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다리에 힘만 있었다면 그때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눈이 다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 도망치면 누명을 덮어쓴다는 간절한 매달림 같기도 했다. 또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에 그때 이 형님이나 형님 일행들이 그 장면을 못 봤다면 오히려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수리가 회장 회사에 중역을 맡고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