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민은 이정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서여주랑 무슨 관계입니까.”
“꼭 답해야 하나?”
“그럼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정후는 음료를 마시며 독고민의 말에 집중했다.
“해봐.”
“서여주와 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그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고?”
“네.”
“어떻게 확신하지?”
“그건. 제가 아직 여주의 마음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소릴 하는군. 그래서 진짜 할 말이 뭔가.”
“앞으로 여주에게 관심 두지 마십쇼.”
“음. 고맙네, 이렇게 본심을 말해줘서.”
이정후는 끝까지 독고민을 비웃지도 않았고, 어떠한 답을 내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독고민이다.
“반가웠어. 그럼 잘 가게. 난 약속이 있어서.”
무심한 듯 이정후는 손을 흔들며 교수실 쪽 계단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도도아에게 전화가 왔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어, 도아야. 어, 그래. 알았어. 식당으로 갈게.”
***
식당 입구에선 서여주와 공주희 그리고 도도아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도도아는 1학년 신입생으로 독고민을 만나려고 식당에 왔던 모양이다.
서여주는 더 이상 도도아에게 질투심이 나지 않았다.
자신을 비참하게 찼던 독고민.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의 연인일 뿐이다.
도도아는 여전히 깍쟁이처럼 말했다. 아마 서여주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서 쌤. 아니 선배님!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여주야. 너 아는 애야?”
“……아주 잘 알지.”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1학년 도도아입니다.”
도도아는 공주희를 향해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도도아? 헉! 여주야. 얘가……그?”
“됐어 가자.”
서여주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뒤돌아서는데 도도아는 앙칼진 목소리로 서여주를 불렀다.
“선배님 밥같이 먹어요. 좀 있으면 우리 독고민 오빠도 이리로 온대요.”
“…….”
독고민 없이 도도아만 올 거란 생각은 안 했다. 그래서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도도아! 여기서 뭐해 안 들어가고.”
“오빠 왔어? 서 쌤 계셔서…….”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독고민에게 팔짱 끼는 도도아. 아마 도도아의 애교에 안 넘어갈 남자가 없을 것이다. 식당에 있는 남자 선배들은 모두 귀엽고 예쁜 도도아를 힐끔 거리며 쳐다봤다.
서 쌤이라는 말에 독고민은 바로 팔짱을 풀었다.
“이거 놔. 여기 학교야.”
독고민은 도도아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서여주에게 꽂혀 있었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서여주!”
뒤돌아 가는 서여주는 독고민이 부르는 게 짜증이 나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공주희는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주야. 너 부르는데?”
멈칫했던 서여주는 반대편 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가자. 주희야.”
“서여주! 거기 서봐!”
참다못한 독고민이 소리를 쳤고, 도도아도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오빠!”
그제야 돌아서는 서여주, 그리고 도도아를 향해 말을 했다.
“도도아, 너 앞으로 남친 간수 잘 해.”
“네?”
“똑똑한 줄 알았는데,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나중에 속상한 일 있으면 나 찾아와.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아! 네…….”
독고민은 더 이상 서여주를 붙잡지 못하고 애꿎은 머리만 털어댔다.
***
캠퍼스 의자에 앉아 봄바람 맞으며 우유와 빵을 먹는 서여주와 공주희
“개강 첫날부터 추워 죽겠는데 여기서 이게 뭐냐. 그리고 독고민은 왜 자꾸 질척대? 미친놈. 너 잘 나가니까, 아쉬워 죽는 표정이더라.”
공주희는 빵과 우유를 먹으며 우물우물 연실 독고민 욕을 해댔다. 서여주는 자기 대신 욕을 해주는 공주희 덕분에 마음이 진정 되어가고 있었다.
“군대 간대.”
“뭐!?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며칠 전에 오피스텔 앞으로 찾아왔었어.”
“찾아왔다고? 미친놈. 그래서? 설마 기다려 달래?”
“응”
“미친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큭큭큭”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딱 그 말이다.”
한편 교수실 창가에 기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정후. 정후의 청력은 신체능력 강화로 더더욱 좋아졌다. 웬만한 작은 소리도 다 구분할 정도였다.
“군대라…….”
“!”
그때 멀리 한 사내가 여주와 친구에게 다가왔다. 그 사내는 한국대 다니는 아이돌 멤버 중 한 명인 ‘지아’였다. 교내에서 워낙 유명해서 이정후도 알 정도였다. 이정후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까르르 웃던 서여주와 공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아와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흠…, 이 기분 정말 적응 안 되는군.”
똑똑.
“들어오세요.”
끼익.
또각또각.
이정후의 예상대로 윤민아는 학교로 찾아왔다. 물론 오피스텔을 먼저 들러보고 왔을 것이다. 이정후가 학교로 도망 온 이유는 그래도 보는 눈이 많은 학교에서는 윤민아도 좀 더 이성적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정후 오빠. 나 왔어.”
***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자 이정후 앞에 서류 봉투를 내미는 윤민아
“출판 계약서야.”
“우편으로 보내면 되지. 번거롭게…….”
“보고 싶으니까.”
“…….”
“오빤 계속 연락도 안 되고, 만나 주지도 않고.”
“놓고 가.”
“이번에 오빠 원고 내가 맡았어. 편집이랑 홍보기획 전부. ……그래서.”
“너한테 또 잘 보여야 한다고 협박하는 거야?”
“오빠……그땐 내가…….”
“가라.”
“…….”
뚜------뚜----
이정후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서여주의 핸드폰에 ‘가면’이라고 저장해 둔 글이 뜨며 전화벨이 울렸다.
“어? 여보세요?”
“차차, 바빠?”
“아니? 바쁘진 않아. 왜? 무슨 일 있어?”
“바쁘지 않으면 교수실로 와줘. 지금.”
“가면 뭐 줄 건데?”
“하하핫. 좋은 거줄게. 빨리 와.”
“응 알았어.”
뚜---
윤민아는 저렇게 편하게 웃는 이정후의 모습을 처음 봤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잘 들어내지 않는 무뚝뚝함에 반했었는데. 그래서 지금껏 자신에게도 차갑게 대하는 이정후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노력하면 이정후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될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이정후가 다른 누군가에게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윤민아는 깊은 분노가 치솟았다. 전화 속 목소리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차차…….’
이정후는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냉랭해졌다.
“손님 올 거야.”
“원고 때문에 연락할 일 많아. 전화 받아.”
“…….”
“갈게.”
***
또각또각
윤민아는 교수실에서 나와 한두 걸음 걷는데,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설마 저 애가 차차? 이름이 차차인가? 아님 애칭?’
구시렁거리며 교수실로 향하던 서여주는 멀리 윤민아가 걸어오는 걸 보았다.
‘아 뭐야. 그때 그 여자네? 오늘 무슨 날인가…….’
둘은 가까워진 상태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니 윤민아가 멈추어서 서여주도 멈춘 것이다.
“그땐 초면에 내가 미안했다.”
갑자기 반말 시전하며 사과하는 윤민아의 모습에 서여주는 살짝 당황했지만 기꺼이 받아줬다.
“아! 뭐…, 됐어. 벌써 잊었어.”
‘잊긴 개뿔!’
너무나 당돌하게 반말로 받아내는 서여주 모습에 기가 막혀하며 윤민아는 자신을 어필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어. 알아야 해?”
“난 한국대 국어국문학과 11학번. 그리고”
윤민아는 자신을 소개하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서여주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한국대학교출판 문화원 이사 윤민아’라고 쓰여 있었다.
서여주는 명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학과 선배면서 이사구나. 완. 전. 대단하네~”
서여주는 엄지를 ‘척!’ 올리며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관심 없다는 듯 대화를 끝내버렸다.
“그럼 난 누가 불러서! 이만”
윤민아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하! 뭐야 저건? 지금 날 무시한 거야?……. 두고 봐!”
윤민아는 서여주가 자신에게 선배 대접을 하지 않는 모습에 분노했다.
하지만 서여주에겐 사회적 지위 같은 건 무의미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이나, 돈, 사회적 위치를 내세워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갑질 하는 인간들은 꼴도 보기 싫었다. 말도 섞기 싫었다. 또한 지난번 일로 인해 윤민아와 이정후의 관계가 대충 어떤지 알 수 있다. 윤민아는 절대 자신에게 해코지 할 위치는 아니라는 것을.
쿵!
서여주는 거침없이 이정후의 교수실에 들이닥쳤다.
“이정후! 저 여자 있는데 날 부른 거야?”
“미안. 대신 좋은 거 줄게. 이리 와봐.”
아까와는 다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진 이정후는 책상 위에 룬을 하나 꺼내 놓았다.
탁
“어! 이건? 엉망진창 2초식!”
“그래.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그런 게 있더라. 어제 구했어.”
“당신도 검을 쓰잖아. 근데 이 귀한 걸 왜 나한테…?”
“받고 조교자리 어때? 내 옆에서.”
“싫어.”
1도 생각 않고 거절하는 서여주 하지만 눈은 엉망진창 2초식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
“고민 좀 하고 답하지? 차차? 무려 엉망진창 2초식인데.”
어느새 이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룬석만 바라보는 서여주 옆에 다가와 섰다.
“어차피 자주 보잖아!”
“같이 있고 싶으니까. 하루 종일.”
꽤 가까이 다가온 걸 눈치 챈 서여주는 살짝 뒤 걸음 질을 했다.
“이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