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끗 운전하고 있는 건후를 쳐다본 유화는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져있는걸 보았다. 눈을 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섹시한 입술이었다. 너무 넋 놓고 본 것 같아 민망해진 유화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한정식 집에 올 때보다 건후의 기분이 이상하게 더 좋아보였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가? 그렇다고 달라질건 없었다. 내 곁엔 민우가 있으니깐...... 지금과 달라지는 일 따위는 없어야했다.
“이사.... 왜 안 갔어?”
건후 때문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기 전에,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건후가 유화를 보며 물었다.
“이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갈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가려고 했다. 직장에서 잘리고 취업준비로 바빠서 이사할 시간이 없었다. 서울의 집값은 비쌌고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집을 찾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 달에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오는 엽서 때문에 갈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녀의 주소만 달랑 쓰여 있는 미국 어느 지역의 유명한 건물들의 모습이 담긴 엽서를 누가 보냈는지 알기에 갈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엽서가 오길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고 1년 전부터 엽서가 오지 않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혹시 오늘은 왔나 우편함을 저도 모르게 힐끔거렸고 아무것도 없으면 실망하며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건후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버리지 못하고 상자에 고이모아 서랍 깊숙이 넣어둔걸 들키면 안 되는데....
매번 바뀌는 지역들의 엽서를 보면서 혹시 설이와 같이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건후의 말처럼 설이와 출국만 같이 했다면 설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설이가 건후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으면서 설이의 말만 듣고 건후를 믿지 못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욕심내고 매달려볼걸. 그럼 지금 그녀 옆에 건후가.....
아니야, 이제와 후회한들 뭐해. 다 지나간 일인데. 다른 남자말고 박민우만 생각하자. 민우씨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지.....
건후는 혹시 자신이 보낸 엽서 때문에 유화가 이사를 가지 않았을까 조금은 들뜬 마음이 들었다.
유학을 가서 건후는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다 공사장이 보이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을 머무르며 밑바닥부터 일했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며 현장경험을 쌓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 공부도 틈틈이 했었다.
유명한 건물들을 눈으로 직접보고 사진으로 담고 그가 갔던 곳을 유화도 봤으면 해서 꼭 엽서를 보냈다. 1년 전부터 중국일 때문에 엽서를 보내지 못했는데 유화가 기다리기는 했을까? 그 엽서들 아직... 간직하고 있을까?
“그때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와는 결혼 안한 거야?”
“네....”
결혼할 남자도 없었는데 무슨.... 그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은 아니고?”
“......”
유화는 뜨끔했다. 속마음을 읽은 거야 뭐야?
뻣뻣하게 굳은 유화의 모습에 건후는 한동안 그를 괴롭혔던, 그녀의 결혼상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던 부분이 맞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를 위해 떠나갔단 소린데..... 휴~
“지금 남자친구는 얼마나 만났어?”
“6개월 됐어요.”
“응....”
6개월이라. 유화가 회사를 다닌 지 1년이 됐으니 만약 6개월 전에 그가 중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 유화의 옆에 있는 남자는 나이지 않았을까?
사랑은 타이밍이라던데. 그 타이밍이란 거.... 참 거지같네.
빌어먹을.
유화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차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건후는 유화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옆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새하얗고 긴 목덜미를 보는 것도 좋고, 익숙한 유화의 체향을 마음껏 맡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것도 안하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건후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하는 그로인해 유화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건후가 그녀를 보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면서 유화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들어가. 유화야.”
“운전 조심하세요.”
유화는 건후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내려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려는데 전화벨 소리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민우씨”
[금방... 유화를 본 것 같은데. 집에 지금 온 거야?]
민우의 말에 유화는 순간 몸이 굳었다. 설마 건후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거는 아니겠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며 물었다.
“민우씨 지금 어디예요?”
[나 지금 유화 집으로 올라가는 길. 원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얼핏 유화인 것 같아서 전화해 봤지.]
다행히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민우에게 들리지 않게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내려갈게요.”
유화는 뒤돌아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건후의 차가 아직 그대로 있는 걸 보며 그녀가 다시 나오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지나갔다.
[안 그래도 되는데......]
민우는 말끝을 흐리며 그를 향해 뛰어오는 유화를 보며 전화를 끊고 손을 흔들었다. 민우의 앞에 선 유화가 숨을 고르며 해사하게 웃었다.
“민우씨 어쩐 일이예요? 오늘 온다는 말 없었잖아요.”
“유화에게 줄게 있어서.”
민우는 그를 향해 뛰어온 유화가 예쁜지 미소를 짓고는 그의 팔짱을 끼는 유화와 함께 걸었다.
“줄게 뭔데요? 손에 들고 있는 그거예요?”
유화는 민우의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응. 들어가서 줄게.”
“네.”
건후의 차를 지나치며 유화는 민우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주며 곁으로 바짝 붙었다. 안하던 행동을 하는 유화를 의아한 눈으로 민우가 봤지만 다행히 밀쳐내지는 않았다.
아마 민우가 정색하고 유화의 손을 쳐냈다면 그녀는 난처한 상황에 민망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화는 알았다. 민우는 절대로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민우는 언제나 유화에게 친절했고 그는 착한남자였으니깐.
선팅이 진하게 된 창문으로 인해 건후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사이드미러로 그가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화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건후의 차를 지나쳐갔다. 그의 상처받았을 얼굴이 떠올라 다리가 떨려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원룸으로 민우와 함께 올라갔다.
집으로 들어오자 민우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유화는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보일러를 틀어 집안을 훈훈하게 만들고 주방으로 가서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민우씨 밥 먹었어요?”
“응.”
화장실에서 나오는 민우를 보며 유화가 물었다.
“유화는 밥 먹었어?”
“네. 녹차 줄까요?”
“응.”
좁은 원룸이라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 매번 그렇듯 2인용 식탁에 앉는 민우를 보며 유화가 녹차를 내밀었다. 민우는 조금 전에 들고 왔던 쇼핑백을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녹차를 마시며 꺼내보라는 눈짓에 유화가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보았다. 기초화장품이었다.
“저번에 보니깐 스킨, 로션이 다 떨어졌더라고. 유화 주려고 회사에서 가져왔어.”
“매번 이렇게 챙겨주고... 고마워요. 민우씨.”
별거 아니라는 듯 민우는 웃어보였다.
민우는 화장품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회사가 어디 있고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항상 같은 브랜드의 화장품을 가지고 와서 꽤 유명한 곳에서 일한다는 것만 알았다.
가끔 회사에서 나온다며 에센스에 영양크림, 작게는 립스틱, 브러쉬에 펜슬까지 가져다줬다. 그래서 유화는 그와 사귀면서 화장품을 사본적도 없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제품이 화장대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날 민우는 회사에서 개발했다며 시중에 판매하기 전에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며 마스크 팩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날 유화와 같이 얼굴에 붙이고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어떤 날은 매니큐어를 가져와 직접 발라주기도 했으며 민우도 유화에게 발라달라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남자가 무슨 매니큐어냐며 유화가 정색을 하자 직접 써봐야지 안다며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발라주긴 했었다.
화장품 회사를 다녀서 그런지 민우의 손톱은 항상 깔끔했고 눈썹 정리까지 했으며 얼굴은 35살 이라고 하기엔 탄력 있고 부드러웠다. 화장을 잘 안하고 다니는 유화에게 화장하는 법을 가르쳐줄 정도로 잘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화장도 잘하고 너무 잘 꾸며서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그의 직업이고 지금은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집에 언제 갈 거예요?”
“유화가 잠들면.”
“네.”
항상 그런다는 걸 알면서 왜 물어봤는지. 쩝.
요즘 건후 때문에 조급증이 왔는지 유화는 안하던 행동을 자꾸 했다. 민우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조금 전처럼 진한 스킨십을 한다거나....
저녁에 같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민우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외롭고 싶지 않았다.
민우가 안아줬으면..... 해? 갑자기 드는 생각에 유화도 깜짝 놀랐다. 만약 민우가 안아준다고 하면 안길 수 있겠어? 안길 수..... 있을까?
다....당연하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로 왜 망설이는 거야? 유화야! 제발 정신 차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민우라고. 건후가 아니라.
유화는 혼란스런 얼굴로 민우를 봤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이라고. 착한 이 남자를 상처 줘서는 안 된다고.
“왜? 할 말 있어?”
“아....아뇨.”
“싱겁기는. 샤워 할 거면 해.”
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잠옷을 입고 나오니 민우는 매번 그렇듯 드라이기를 들고 유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마하면 예쁠 것 같은데.”
가슴까지 오는 유화의 머리카락을 말리며 민우가 말했다.
“파마하면 관리하기도 힘들고. 신경 쓸 것도 많아서 그냥 생머리가 편해요.”
“그래도.... 파마 한 모습 보고 싶다.”
화장대 거울로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인다.
“다음에... 한번 해볼게요.”
“그래. 헤어숍 갈 때 같이 가자.”
그의 자상함에 유화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민우가 머리를 말려주면 같이 침대에 누워 그의 품에 안겨 그녀가 잠들 때까지 민우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민우는 어느새 가고 없었고 그의 온기조차 없는 텅 빈 옆자리를 느끼며 유화는 눈을 떴다.
어쩌다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이 떠진 적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새벽에 나가는 그를 보며 과연 잠을 자기는 했을까 생각이 들며 깊게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날 번도 한데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그가 신기하기도 했다.
오늘도 내가 잠들면 그는.... 가겠지.
양치를 하러 민우가 욕실로 들어가자 유화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러 일어났다. 무심코 창밖을 본 유화는 모든 행동을 멈춰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건후가..... 아직도 밖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