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후는 집무실을 나가는 유화를 눈으로 좇으며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워하던 여자이던가.
유학 가서 단 한번도, 단 하루도 생각 안한 적이 없었다. 유화는 건후의 삶의 일부이고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런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유화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어제 밤 그녀의 원룸 앞에서 불 꺼진 집을 보며 건후는 유화를 기다렸다. 아직까지 이곳에 살고 있을까 혹시나 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차안에 앉아있었다.
밤늦은 시간 유화가 걸어오는 모습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리운 마음에 그녀를 보고 있다 그들이 함께했던 가로등 아래 서있는 유화를 보며 아직도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차에서 내려 유화를 부르려고 했지만 누군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는 모습에 내릴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유화의 집으로 달려왔는데 그녀는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더니 집으로 함께 들어가 버렸다.
결혼을 하겠다던 유화였으니 그는 분명 그녀의 남편일 것이다.
유화의 집에 불이 켜지고 창문으로 걸어온 남자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집안을 환기시키는 모습이 자연스러워보였다. 그녀의 집이 오래된 원룸이라 유화와 사귈 때 그도 집에 들어가면 먼저 하는 일이 집안을 환기시키는 일이였다. 그 일을 이제는 다른 남자가 하고 있었다.
건후는 속이 뒤집어져 계속 있을 수가 없어 차를 몰고 무작정 달렸다. 늦은 밤 도로는 한산했고 속도를 올리고 창문을 열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까지 매서운 바람을 맞았다.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유화를 보며 화가 났고 자신은 이렇게 불행한데 행복해 보이는 유화가 너무 미웠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유화가 결혼을 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가 유화를 사랑한 만큼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죽을 것 같았다. 그녀가 미운만큼 가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아직도 내 사랑은 그대로인데....
건후는 유화를 잊기로 했다. 다시는 안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출근하고 보니 떡하니 유화가 자신의 비서라며 그의 책상 앞에 서있었다. 처음에는 환영을 본거라 생각하고 눈을 감고 떠보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도 않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는 유화를 보고 건후는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녀의 뒷모습이었지만 건후는 알아보았다. 유화의 모습을 보고 처음 느낀 건 설렘과 두근거림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온 어제의 기억과 함께 좌절을 맛보았다.
어떻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가까이에서 본 유화는 4년 전 모습 그대로였고 여전히 예뻤으며 그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체향은 그를 혼미하게 만들고 유화의 입술은 당장이라고 머금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숨결을 내뿜었다.
유화의 눈빛에서도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착각인 걸까?
건후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유화에게 남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앞으로 그녀와 같은 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흥분으로 가득 찼다.
허공을 향해있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미간에 굵게 주름이 잡혔다.
쌀쌀맞게 구는 유화에게 화가 나서 고작 한다는 말이 상사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니....
자신이 뱉어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건후의 입술 사이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을 열고 건후의 수행비서인 준현이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현은 멍한 시선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건후의 얼굴을 살폈다.
잠시 후 유화가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현이 들어와도 반응이 없던 건후가 유화가 들어오자 그녀의 행동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는 유화를 그의 시선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전무님.”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긴 한숨과 함께 힘없이 툭 내뱉은 건후는 유화의 모습을 머리에 담으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괜찮냐?”
“안 괜찮으면?”
준현의 눈에도 건후는 안 괜찮아 보였다.
건후는 잔을 들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평소에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쌉쌀한 맛을 즐기는 그였지만 오늘은 텁텁하고 쓰기만 했다.
“네가 새로 온다는 전무인지 알고 있었데?”
“아니.”
“알았는데도 계속 일하겠데?”
“응.”
커피에만 시선을 두며 대답만 간단히 하는 건후를 보며 준현이 넌지시 물었다.
“유화씨에게 남자가 있다며? 결혼한 것 같다면서? 물어는 봤어?”
“부정을.... 안 하던데?”
“그래?”
준현은 건후가 유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고 갈기갈기 찢겨지고 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당분간 지켜보려고.”
복잡한 마음에 건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커피 잔을 내려놓고 준현을 보았다.
“일해야지. 알아보라고 한 거는?”
“어. 아주 엉망이더라.”
준현은 서류가방 안에서 봉투를 꺼내 건후에게 주었다.
“재정상태가 너무 안 좋더라. 네가 중국일 안 따냈으면 회사가 어찌 되었을지 몰라. 지금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고.”
“그래서 하 회장이 날 불러들인 거겠지.”
준현이 건네준 서류를 보는 건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속으로 삭이는 한숨소리가 준현에게도 들리는 것 같았다.
하 회장인 그의 외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발로 뛰고 손수 건물을 올리며 노력하여 일궈온 회사였다. 외삼촌께서 맡아 운영하면서 회사는 많은 발전을 하였고 서울의 절반은 목한건설이 지었다고 할 정도로 꾸준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외삼촌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사촌형인 진호가 회사를 맡고 난 후부턴 회사가 점점 어려워졌다. 재정상태도 안 좋았고 수주를 받아 공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로인해 한차례 구조조정이 일어나 정리해고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1년 전 중국에서 백화점과 쇼핑몰을 건설하는데 건후의 독특한 디자인 덕에 목한은 시공까지 맡아서 공사를 진행했다. 건후가 중국으로 가서 현장을 직접 지휘했고 현재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만약 중국 일을 따내지 못했다면 지금 목한은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몰랐다.
건후는 회사에 욕심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께 받은 유산도 있고 그의 부전공을 살려 건축 디자인 일을 하면서 먹고살만했다.
그에게 관심조차 없던 하 회장이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한 이유는 혼자가 된 어머니와 자신을 거둬들여 이만큼 키워주셨고 하루아침에 회사가 무너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인그룹에서 제주도에 리조트를 짓는 다는 정보가 있다. 입찰안내서를 곧 발부할 것 같으니 준비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흠..... 나도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건후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을 턱으로 가져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인그룹은 백화점과 호텔을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번에 리조트사업까지 뛰어들었다. 부지가 거의 정해진 시점에 곧 있으면 건설업체를 선정하는 입찰이 시작될 것이다.
목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은 지금 좋은 기회였고 건후는 꼭 잡고 싶었다. 외관디자인부터 설계에 시공까지 명인이 만족할 만한 아이디어가 나와야했다.
“디자인팀과 설계팀 팀장들에게 미리 귀띔 해놔. 아마 이번 달 안으로 입찰안내서가 올 거야. 그때부터는 다들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쁠 테니까 준비하라 일러둬.”
“알았어.”
“이번 주는 회사 전반적인 실정이나 업무파악하고 분위기 좀 봐야겠다.”
준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건후는 인터폰을 눌러 유화에게 그에게 올라온 서류와 5년 동안 회사에서 진행했던 일들과 디자인, 설계도를 찾아서 가져오라 시켰다. 건후는 태평하게 앉아 보고서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유화는 5년 이라는 말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끊어진 인터폰을 노려보며 잠시 서있었다. 노려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생각한 유화는 각 부서별로 올라온 서류를 들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준현이 두고 간 회사 재정상태를 보고 있던 건후는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는 유화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후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유화는 자료실로 가서 건후가 말한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3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자료들을 집무실 안으로 가져다 놓았다.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건후와 준현은 무슨 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밤늦게까지 일했고 유화는 건후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을 하면서,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회의를 하고 들어오면서 유화를 들끓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야만했다. 그때마다 유화는 떨리는 마음을 들킬까 그의 눈을 피하며 시선을 돌렸다.
퇴근을 준비하던 유화는 집무실에서 나오는 건후를 보았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길에 오른 건후는 그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하는 유화를 보며 못마땅한 시선을 두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준현이 서류가방을 들고 나왔다.
오늘 유화가 모르는 저녁 약속이 있었고 한정식 식당을 예약해 달라는 준현의 말에 유화는 예약을 해놓았다. 아마도 그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인 것 같았다.
“유화씨. 오늘 특별한일 없죠?”
“네.”
“그럼 저녁 먹으러 갑시다.”
“네?”
갑자기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준현의 말에 유화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일주일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인사도 못한 것 같아서 오늘 하자고요.”
“그...그렇다면 전무님도 같이요?”
“네.”
아, 이런..... 그럼 한정식 집을 예약하라고 한 게 우리가 가기 위해서였나?
누가 봐도 유화의 얼굴은 불편하다, 죽어도 같이 밥 먹기 싫다는 뜻이 팍팍 느껴졌다.
“안 그래도 되는데.... 같이 밥 먹을 이유가.....”
“있죠.”
말을 가로채며 준현이 싱긋 웃더니.
“이제 우리는 한 팀이잖아요.”
“.... 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녁에 특별한일 없다고 대답해 버렸고 웃고 있는 준현을 보며 거절하기도 그랬다. 특히 그들을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 유화는 마지못해 답했다.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는지....
“가죠.”
준현이 앞장서 걸어가자 유화는 전무실의 불을 끄고 따라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