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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6장. 개성의 미친 장검
작성일 : 17-06-24 15:21     조회 : 17     추천 : 0     분량 : 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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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천향의 뒤로 기생들이 일렬로 서 왈짜들에게 큰 절을 올렸다. 천향을 시작으로 옥금과 난앵, 춘섬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천향을 제외한 기생들의 얼굴은 보기 딱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밤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천향의 말에 왈짜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기생이 넷이나 있는데 왜 혼자 나서는 게야? 나머지 셋은 아껴뒀다 국이라도 끓여 드시게?”

 

  “나는 오늘을 위해 닷새를 굶었다고. 점심으로는 장어도 팔딱팔딱 뛰는 놈으로다가 한 마리 꿀떡하고 왔지.”

 

  “아이고 형님. 오늘밤 주무시긴 그르셨소.”

 

  “이놈아, 아까운 시간 잠을 왜 자나. 한 번이라도 더 해야지.”

 

  왈짜들이 너나할 것 없이 허리 들썩이는 시늉을 하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저희 기루의 가솔들이긴 하나 옥금은 술시중은 들지 않는 금기이고, 난앵과 춘섬은 아직 어린 아이들입니다.”

 

  “진정 니가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천향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왈짜들이 저들끼리 눈을 맞추며 시시덕거렸다.

 

  “으흐흐, 개성 기생들이 드세다더니 저년 기개도 제법이구만요.”

 

  “할 수 있다니 해보라 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가 언제 나오나 한번 봅시다.”

 

  “그래요, 이제 형님. 어차피 저 셋을 다 합쳐도 저년 미색 하나를 못 쫓아오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듯합니다.”

 

  양녕이 왈짜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턱짓으로 난앵과 춘섬을 가리켰다.

 

  “자넨 됐고, 저 두 아이로 하겠네.”

 

  내심 천향과의 질탕한 밤을 기대했던 왈짜패들이 불만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천향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스쳤다.

 

  “아직 머리도 올리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당황한 천향을 본 양녕이 득의만만한 웃음을 물었다.

 

  “더욱 잘 되었네. 내 저 아이들의 머리를 올려주겠다.”

 

  “기생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아이들입니다. 재주를 좀 더 갈고 다듬은 연후에 선보이겠사오니……,”

 

  “재주야 뭐 볼 거 있느냐? 다 거기서 거기지. 거문고 퉁기고, 치맛자락 휘날리며 뱅글뱅글 도는 거야 지겹도록 봤느니라.”

 

  “허나……,”

 

  술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술이 천향의 얼굴에 튀었다. 양녕이 쥐고 있던 백자 술잔을 벽으로 던진 것이었다. 난앵과 춘섬이 우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기쁘게 해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기쁘게 하려면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지. 어디 객줏집 요강보다 못한 기생년 주제에 고집을 부리느냐?”

 

  양녕의 붉은 흉터가 씰룩거렸다.

 

  “뭐하고 섰어? 니년들은 필요 없다니까! 당장 나가거라!”

 

  덩치가 상을 탕탕 두드리며 눈을 부라렸다. 천향이 냉랭한 눈빛으로 양녕을 보았다. 양녕 역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천향의 눈길을 맞받았다. 맞붙은 눈빛에서 푸른 기운이 튀는 듯했다.

 

  먼저 눈빛을 거둔 것은 천향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천향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옥금이 난앵과 춘섬을 보며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천향을 따라 나왔다.

 

  “언니, 저 아이들을 어찌 해요. 저도 같이 시중을 들 테니 한 번만 더 말을 넣어보세요, 네?”

 

  옥금이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차피 한 번은 겪을 일이다. 너는 들어가 육손이나 보살피거라. 아까 소동에 경기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천향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옥돌로 빚은 듯한 보름달이 동편 하늘에 둥실 떠올랐다. 어둑한 후원에 검은 인영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가까이 붙어있는 둘이 월과 석가이, 좀 떨어져 선 이가 왕의 곁에서 어명을 받드는 대령상궁 박 상궁이었다.

 

  제법 연치가 있어 뵈는 박 상궁이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

 

  “달이 떠오를 때 달 힘을 마시면 음기가 보해지옵니다. 제가 수를 셀 터이니 빈궁 마노라께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크게 내뱉으소서. 그럼 수를 세겠나이다. 하나……,”

 

  “저기, 박 상궁. 내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하문하시옵소서.”

 

  “정말 이걸 한다고 회임이 되는가?”

 

  “어찌 그러시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박 상궁이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내 중전마마께서 내리신 기자도끼도 차고 다니고, 원추리 뿌리도 늘 지니고 다닌다네.

 

  뿐인가? 아들만 일곱 낳았다는 숙부인의 개짐도 빌려 입었고, 그 집 금줄도 머리맡에 놓아두어봤다네. 그런데도 회임이 아니 되지 않았는가. 별별 수를 다 써도 안 되던 회임이 달 보고 숨 몇 번 들이킨다고 될까 싶어 묻는 것이네.”

 

  “무엇이든 된다 생각하고 하면 되고, 아니 된다 생각하고 하면 아니 되는 줄 아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극한 진심이 있으면 하늘이 돕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지극한 진심이 없었기에 회임을 못 한 것인가? 억울한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박 상궁이 월을 재촉하듯 다시 수를 세었다.

 

  “하나, 두울, 세엣, 내쉬오소서. 하나, 두울, 세엣, 들이쉬고.”

 

  월이 박 상궁의 구령에 맞추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인데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셋 다음은 일곱, 아홉, 열한 번인 식이었다.

 

  열세 번이 되자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어지럼증이 일었다.

 

  “마노라, 괜찮으셔요?”

 

  석가이가 다가섰다가 박 상궁의 매서운 눈초리에 뒤로 물러났다.

 

  “더는, 더는 못 하겠다.”

 

  월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주저앉았다. 석가이가 얼른 월을 부축해 일으켰다. 박 상궁이 흡족치 못한 기색으로 커다란 백자 사발을 내밀었다.

 

  “이건 뭔가?”

 

  사발 안에는 물이 한가득 들어있고 짚토막 하나가 세로로 떠 있었다.

 

  “짚까지 남김없이 다 드셔야 하옵니다.”

 

  속이 편치 않아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았지만 박 상궁이 돌기둥처럼 버티고 선 통에 억지로 사발을 비웠다.

 

  “다음 보름에 다시 하겠사옵니다. 그때까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시옵소서.”

 

 

 

  별궁에 들어서자마자 월이 웩웩거리며 토악질을 해댔다. 저녁 먹은 것을 다 쏟아낸 뒤에도 헛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마노라, 마노라, 어의를 들라 할까요?”

 

  금침 위로 지푸라기처럼 쓰러진 월은 말할 힘도 없어 손만 내저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이고, 그놈의 원자가 뭔지. 이러다 우리 마노라 잡겠네.”

 

  석가이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선 이불을 덮어주었다.

 

 

  * * *

 

 

  와장창창. 깨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옥금이 천향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기어이 파방을 하려나 봐요, 언니!”

 

  아니나 다를까, 마당에 난앵과 춘섬이 맨발로 서 있었다.

 

  난앵은 눈을 크게 뜨고 핏물이 배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졌다. 뺨을 맞았는지 볼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그 옆에 선 춘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둘 다 애처로운 몰골이었다.

 

  “아이고, 이걸 어째!”

 

  옥금이 난앵과 춘섬을 끌어안고 바닥에 앉혔다. 맨발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맨발을 보이는 것은 알몸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웃음을 파는 기생들이라 해도 참기 힘든 수치였다.

 

  “내 이 자식들을!”

 

  어느 새 뛰어나온 소쌍이 주먹을 불끈 쥐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천향이 단호하게 막아섰다.

 

  “나서지 말라 하였다.”

 

  “저 행패를 보고만 있으라고?”

 

  “기방의 일이다. 대접이 부실했으면 오입쟁이들이 내리는 벌도 달게 받아야지.”

 

  “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을 부득불 앉혀놓고선 대접이 부실하다고?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하지만 옥금 역시 소쌍의 소매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기생들의 접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오입쟁이들이 기물을 파손하는 파방은 기방의 관습이었다. 파방을 막겠다고 오입쟁이들에게 맞섰다가 화류계 전체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소쌍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춘섬이 더욱 섧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향의 손이 춘섬의 뺨으로 날아갔다. 춘섬이 깜짝 놀라며 제 볼을 감쌌다.

 

  “좋은 옷 입고 춤추고 노래하니, 기생 노릇이 신선놀음이나 되는 줄 알았더냐? 이만한 일로 울려거든 당장 짐 싸서 나가거라!”

 

  춘섬이 입술을 물고 울음을 삼켰다. 꾹 다문 입에서 끅끅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천향이 다시 손을 쳐들자 옥금이 잽싸게 천향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아이고 언니, 그만하세요.”

 

  옥금이 난앵과 춘섬을 보며 얼른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난앵과 춘섬이 울음을 터뜨리며 저희들 방으로 뛰어갔다. 옥금이 둘을 달래려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반닫이가 넘어가고, 술병과 술잔 깨지는 소리가 기루를 울렸다.

 

  “염병할, 결국 사달이 났구먼.”

 

  설매가 전유어가 그득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오며 혀를 찼다.

 

  “천향이 너는 안 그래도 넋이 나간 것들을 뭘 그리 그악스럽게 다그쳐대누.”

 

  “내가 무얼 했다 그러시오?”

 

  “왜, 니 동기적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게야? 하하, 천하의 천향이한테도 풋내 풀풀 나는 어린애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너도 참 순진무구했는데 말이다.”

 

  천향이 못 들은 척 등을 돌렸다.

 

  “스승님은 얼른 상이나 차려요. 음식 다 식겠소.”

 

  “맛도 모르고 처먹는 놈들, 좀 식으면 어때서?”

 

  설매가 접시 위의 전유어를 손가락으로 낼름 집어먹으며 누마루로 향했다.

 

 

  * * *

 

 

  옥금의 안내로 누마루에 들어선 왈짜패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입쟁이들이 파방을 할 때 기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사죄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사죄를 하면 부순 기물들을 모조리 사주어야 하지만 사죄를 하지 않으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부순 물건을 물어 달라 할 수도, 원망을 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 강해 보이는 천향이 절대 사죄를 할 리가 없다고 여긴 왈짜패들은 더욱 신이 나서 물건을 부수었다. 따지고 들면 기방의 법도를 들어 천향까지 발을 벗겨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상다리가 부러져라 상을 차려놓다니. 예상과 다른 반응에 왈짜패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이년들이 이제야 우릴 알아 모시는가 봅니다, 형님.”

 

  옥니박이가 부러 허세를 부리며 낄낄거렸다. 왈짜들도 큰소리로 웃어대며 음식을 손으로 마구 집어먹었다.

 

  잠시 후, 천향이 누마루로 올랐다. 시끄럽게 떠들던 왈짜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천향이 아까보다 훨씬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구름처럼 풍성한 가체에 진주와 수정으로 꾸민 자만옥 비녀를 지르고, 은색 항라 저고리에 붉은 비단 치마를 받쳐 입은 천향의 모습은 탐스러운 붉은 꽃, 그 자체였다.

 

  “저희 아이들이 우둔하여 심려를 끼쳤습니다. 향원각의 행수로서 대신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천향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옥니박이가 손을 내저었다.

 

  “사, 사죄는 무슨. 그냥 여기 와서 형님 옆에 앉으시……, 뜨악!”

 

  덩치가 주먹으로 옥니박이의 옆구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옥니박이가 얼른 말을 덧대었다.

 

  “……지 말고 거기 서서 사죄를 하라, 흠흠.”

 

  “보잘 것 없으나 사죄의 뜻으로 춤 한 자락 올리겠나이다.”

 

  “춤이라면 형님께서 지겹다 하지 않았더냐?”

 

  옥금이 옥니박이의 말에 개의치 않고 거문고를 무릎에 받치고 술대를 들었다. 술대가 줄을 길게 밀어 내리자 뚜웅, 하는 소리가 깊고 넓게 퍼져 나갔다.

 

  천향이 그 소리를 받아 걸 듯 팔을 들었다. 항라 저고리 안으로 가녀린 팔이 은은히 비쳤다. 그 소매 끝에 매단 붉은 한삼이 천천히 올라갔다. 천향이 시선을 들어 올려 하늘을 보았다. 흰 목선이 드러나자 왈짜들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침을 꼴딱 삼켰다.

 

  이윽고 옥금이 연주를 시작했다. 천향의 두 팔이 하늘로 치솟았다 왼쪽 어깨로,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팔이 하늘로 오를 때는 피어나는 꽃잎처럼 눈부셨고, 떨어질 때는 지는 꽃잎처럼 애틋했다.

 

  천향이 오른발을 살짝 내딛자 금박을 수놓은 치맛단 아래로 하얀 외씨버선이 드러났다. 천향이 다시 왼발을 비껴 디뎠다. 천향이 움직일 때마다 뒤꽂이와 떨잠에 달린 보석이 광채를 발했다.

 

  천향의 검고 촉촉한 눈망울이 왈짜들을 향했다. 천향과 눈이 마주친 왈짜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떨었다.

 

  왈짜 사이를 여유 있게 유영하던 천향의 시선이 가운데 앉은 양녕에게 꽂혔다. 순간 양녕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촉수들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을 느꼈다.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고 싶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끈적한 촉수가 제 뼈와 살을 녹이더라도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양녕은 속내를 숨기고 활촉 같은 시선으로 천향을 보며 술을 마셨다. 애써 숨긴 양녕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천향의 붉은 입술이 그린 듯 살짝 올라갔다.

 

  거문고에 얹은 옥금의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거문고 줄 위에서 노니는 듯, 천향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천향이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허공에 붉은 꽃이 피었다 졌고, 바닥엔 흰 나비가 날아다녔다.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가장 순결한 나비이나 결코 만날 수 없는 꽃과 나비였다.

 

 

 

  음악이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줄을 퉁기는 옥금의 이마 맡에 땀이 맺혔다. 천향 역시 땀이 솟기 시작했지만 몸놀림은 여전히 땅을 디디지 않은 듯 가벼웠다.

 

  옥금의 손가락이 꽃을 쫓는 범나비처럼 움직이면 천향은 범나비를 희롱하는 꽃이 되었다.

 

  옥금의 손가락이 바람을 타고 춤추는 학의 날개라면 천향은 맑고 서늘한 청풍이 되었다.

 

  옥금의 손가락이 버들가지 사이를 오가는 꾀꼬리를 그려내면 천향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가 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마침내 옥금의 손가락이 창공으로 치솟는 솔개의 날개처럼 줄을 퉁겼다. 천향이 한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붉은 치마의 봉황 문양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기다란 장대로 휘젓는 듯 왈짜들의 속이 울렁거렸다.

 

  뚜둥!

 

  거문고의 웅혼한 여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사방이 고요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삐딱하게 앉아 시시덕거리던 왈짜들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천향만 보고 있었다. 몇몇 왈짜들의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마저 서려 있었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한 재주야!”

 

  옥니박이가 홀린 듯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가 양녕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앉았다.

 

  “보잘것없는 재주로나마 저희 동기들의 무례를 대신 사죄드리오니 너그러이 받아주십시오.”

 

  천향이 곱게 고개를 숙였다. 양녕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기물이야 다시 사주면 그만이지만 어쩐지 사죄를 받으면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죄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천향이 한 번 더 물었다. 양녕이 내키지 않는 듯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옥니박이가 경망스레 웃으며 천향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자자, 형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신다 하셨으니 이제 형님 옆으로 와 앉거라. 이제부터 제대로 마시고 놀아보……,”

 

  천향 대신 앞으로 나선 옥금이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나리들이 파방하신 방의 물목을 적은 것입니다. 저희가 사죄를 드렸으니 동일한 물목을 사주셔야 하는 것은 아시지요.”

 

  “하이고, 내 오입쟁이 노릇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느냐? 그야 당연히……, 이, 이게 다 뭐냐?”

 

  옥니박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목을 읽어 내렸다.

 

  “청자칠보 투각 향로, 명 황실 소목장이 만든 난문갑, 청화매죽문 백자 항아리……. 청화백자라면 파사에서 들여온 회회청으로 만든 백자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뭐하는 수작이야?”

 

  덩치가 옥니박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형님, 이년들이 이제 보니 아주 사악하기 짝이 없는 년들입니다! 파방을 핑계로 단단히 한 몫 잡으려고 수 쓰는 게 아닙니까요?”

 

  덩치가 옥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년아, 우리가 주먹 쓰는 왈짜패라 우습게 보이더냐? 어디 가짜를 갖다 놓고 되도 않은 눈속임을 하려 들어?”

 

  옥금의 발이 허공에서 바동거렸다.

 

  “그 손 놓으시지요.”

 

  천향이었다. 덩치가 옥금을 내팽개치고 천향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마루가 쿵쿵 울렸다.

 

  “오냐, 니년이 다 꾸민 게지? 근데 너 크게 실수했다. 우린 시시껄렁한 왈짜놈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거든.”

 

  “이 몸, 천향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갖춰놓고 감탕질이나 하는 논다니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옥니박이가 여전히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이것들이 진정 모두 명과 파사에서 들여온 물건이란 말이냐?”

 

  “정히 의심이 가시거든 날 밝는 대로 도공과 소목장을 불러 감정을 받으시지요.”

 

  “우리가 못 할 줄 알아?”

 

  덩치가 주먹을 천향의 턱밑까지 들이밀었다. 천향이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하시지요. 단, 이레이옵니다. 이레 안에 물건을 모두 보내주셔야 합니다.”

 

  “이년아, 이것들을 당장 이레 안에 어찌 구한단 말이냐?”

 

  옥니박이의 입가에 하얀 게거품이 복작거렸다.

 

  “그건 나리들의 사정이시지요.”

 

  “뭐라고?”

 

  덩치의 주먹이 높게 쳐들렸다. 순간,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덩치의 목덜미를 스쳤다. 덩치가 무심히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었다가 자지러지게 놀랐다. 손바닥 가득 피가 흥건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덩치가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저놈이!”

 

  어느 새 양녕의 뒤로 이동한 소쌍이 양녕의 목에 검을 대고 있었다. 잘 벼려진 검날이 파르스름한 광채를 뿜어냈다.

 

  “오입쟁이가 기생을 이유 없이 겁박하고 때리면 기둥서방이 나설 수 있다, 이건 기방 법도에 어긋난 일이 아니지?”

 

  “뭐야? 이것들이 단체로 죽고 싶나? 어디서 함부로 검을 놀리는 게야?”

 

  덩치가 등에 지고 있던 언월도를 뽑아 들었다. 다른 왈짜들도 저마다 무기를 집어 들었다.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이번엔 나의 춤을 보게 될 것이다. 근데 난 천향이처럼 춤을 잘 추진 못해. 다만 열심히는 추지. 누가 그러더군. 날더러 개성의 미친 장검이라고.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보여줄게. 나도 참아도 아주 오래 참았거든, 니놈들처럼.”

 

  소쌍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니놈이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감히 형님께 칼을 들이대고 니가 무사할 성 싶으냐?”

 

  “버러지만도 못한 목숨, 죽으면 그뿐이다. 근데 그 전에 니놈들도 죽을 거야.”

 

  “이놈이, 어디서 되도 않게 큰소리야?”

 

  덩치가 콧김을 씩씩 뿜었다.

 

  “큰소린지 아닌지는 대보면 알겠지.”

 

  “저거 완전 미친놈 아냐?”

 

  “미친놈인 거 이제라도 알았음 됐고. 얼른들 와봐.”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왈짜패들에 둘러싸여서도 태연하기만 한 소쌍의 표정에 왈짜들이 기가 질린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긴장 어린 거친 숨소리만 허공을 가득 메웠다.

 

  “으하하!”

 

  양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와하하, 하하하하!”

 

  양녕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천향과 소쌍을 번갈아 보았다.

 

  “니년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봉황이 참새를 알아 무엇에 쓴답니까”

 

  천향의 싸늘한 대꾸에 양녕이 다시 한 번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양녕이 눈물까지 찍어대자 왈짜패들이 영문을 몰라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다.

 

  “천향이라 했더냐? 천 가지 향이라……, 가히 그 이름을 감당할 만하구나.”

 

  양녕이 술잔을 마저 비우고 말했다.

 

  “닷새 뒤에 오마.”

 

  양녕의 얼굴에 어느 새 웃음기가 삭 사라져 있었다.

 

  “이만 가자.”

 

  양녕이 일어서자 왈짜패들이 주섬주섬 따라나섰다. 붉으락푸르락 인상을 잔뜩 쓰고 나가는 왈짜패들의 등 뒤로 천향이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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