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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4장. 조선 최고의 망나니 납시오
작성일 : 17-06-22 16:15     조회 : 19     추천 : 0     분량 : 8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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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커다란 상을 받쳐 든 궁인들이 연이어 강녕전으로 들었다. 왕과 중전의 석식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왕은 늘 중전과 함께 상을 받았다. 법도에 따라 겸상을 하진 않지만 왕은 중전의 식사를 세심히 챙겼다.

 

  “이번에 올라온 눌어가 아주 맛이 좋습니다.”

 

  익선관을 벗어놓은 왕이 제 몫의 눌어를 친히 젓가락으로 발라 살을 건넸다. 중전이 시중드는 궁인들 눈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소첩 많이 들었사옵니다. 전하 드시옵소서.”

 

  “아니오. 아까 보니 중전 상의 눌어가 내 것의 반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만큼 더 드셔야 합니다.”

 

  왕의 고집에 중전이 할 수 없이 제 상에 놓인 접시를 내밀었다. 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중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전하도 참.”

 

  왕이 과장되게 팔을 주물럭거리며 엄살을 떨어댔다.

 

  “팔 떨어지겠습니다. 조선의 왕을 외팔이로 만들 셈입니까. 어서 드세요, 중전.”

 

  중전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왕이 집어주는 눌어를 받아먹었다. 늘 깐깐하고 엄하기 그지없는 왕이지만 중전 앞에선 천진한 어린아이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에 궁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물었다.

 

  “어떻습니까? 중전 상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지요?”

 

  “예. 아주 맛이 좋습니다.”

 

  중전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이 대단한 칭찬이라도 받은 마냥 환하게 웃었다.

 

  “내 수라간에 이야기해 앞으로 중전 상에 올리는 고기와 생선을 내 몫보다 실한 것으로 올리라 할 것입니다.”

 

  중전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소첩은 괜찮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배가 부릅니다.”

 

  “아니에요. 요즘 들어 중전이 살이 내린 듯하여 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어의에게도 보약을 지어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중전이 슬며시 왕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에 비해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하였다.

 

  “그럼 전하, 보약은 두고……, 소첩의 청을 하나 들어주소서.”

 

  왕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전이 부탁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무엇입니까. 말씀해 보세요.”

 

  왕이 무엇이든 들어줄 듯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세자와 빈궁을 잠시 종학으로 내보내면 어떨지요.”

 

  빈궁 이야기에 왕의 안색이 표 나게 변했다.

 

  “갑자기 종학은 왜요?”

 

  “종학을 짓고는 들여다볼 틈이 없지 않았습니까. 세자와 빈궁에게 종학에 머물며 안팎을 살피라 하면 좋을 듯합니다. 두 사람이 종실을 파악하고, 종친과 유대를 다지는 기회도 될 것이고요.”

 

  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전을 빤히 보았다. 진짜 이유를 대라는 눈빛이었다. 눈빛에 실린 왕의 뜻을 읽은 중전이 한결 눅진 말투로 말했다.

 

  “실은 두 사람의 금슬을 북돋아주고 싶어 그럽니다.”

 

  “금슬을 북돋아요?”

 

  “젊은 나이에 궁에서만 지내기 얼마나 갑갑하겠습니까? 아무래도 궁에선 우리도 있고, 보는 눈도 많으니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지게 마련일 테고요.”

 

  “세자와 빈궁의 금슬이 좋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란 말입니까?”

 

  왕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세자가 너무 책만 붙들고 있습니다. 학문에 몰두하느라 정기가 약해졌을까 저어됩니다.”

 

  “종학에 내보낸다고 칠 년 동안 안 되던 회임이 되겠습니까?”

 

  “어찌될지 모르니 한번 해보자는 것이지요. 간만에 궁을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면 세자도, 빈궁도 마음에 여유가 생겨 더욱 친밀해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이참에 비가 새는 동궁전 수리도 하고요.”

 

  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빈궁이 궁에서 지내는 것이 갑갑하다 하였습니까?”

 

  중전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빈궁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저의 경우를 떠올려 짐작하는 것이지요.”

 

  “흐음.”

 

  왕의 입술이 휘움하게 굽어졌다. 중전은 궁인에게 눈짓하여 숭늉을 올리게 하고는 왕에게 다가앉았다. 중전이 다가앉자 왕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전하께서도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너무한단 말입니까?”

 

  왕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전하께선 빈궁 일이라면 어찌 그리 박해지기만 하십니까?”

 

  당황스러운 기색이 이내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박한 게 아니라 빈궁이 철딱서니가 없는 겝니다. 중전도 보지 않았습니까? 아침 문안 때마다 빈궁이 내 속을 어찌 뒤집는지요. 시부모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따박따박 해대니 세자 앞에선 오죽하겠습니까. 나라도 그런 아내라면 치를 떨 것입니다.”

 

  중전이 보기엔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따박따박 해대는 거야 시아버지나 며느리나 우열을 가릴 바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고 들자는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말한다고 바뀔 성정도 아니었다.

 

  중전이 더욱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전하께선 지아비 사랑도 받지 못하고,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지내는 며늘아기가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가엾긴 뭐가 가엾소. 그러니까 잘해서 세자의 마음을 얻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왕이 숭늉으로 입을 울걱울걱 헹군 뒤 꿀꺽 삼켰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구한다고 쉬 얻어지는 것이오니까.”

 

  “어허.”

 

  왕이 난감한 얼굴로 숭늉 그릇을 나인에게 건넸다.

 

  “내 늘 느끼는 거지만 중전은 너무 마음이 넓으십니다. 이러니 빈궁이 시부모 어려운 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답이나 하는 거 아닙니까.”

 

  중전이 몸을 외로 틀며 서운한 기색을 하였다.

 

  “지금 저를 허물하시는 겝니까?”

 

  “아, 아닙니다. 내 말은, 내가 지금 중전을 허물코자 하는 것이 아니고, 빈궁이 잘못했다는 것이지, 내 절대 중전에게 뭐라 한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시면 아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엄을 흩트리지 않는 왕이 중전이 토라진 시늉을 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중전을 달랬다.

 

  “그럼 두 사람을 종학에 내보내도록 윤허해주옵소서.”

 

  “그러니까 그런다고 안 생기던 원자가 덜컥 들어서는 것도 아니고…….”

 

  “아까 분명 소첩의 청을 들어주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거늘, 한 나라의 군왕이 되시어 약조를 어기시려는 것입니까.”

 

  “그런 게 아니고, 중전, 내 뜻은……,”

 

  밖에서 내관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영의정 황희와 악학별좌 박연 입대하였사옵니다.”

 

  왕이 살았다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다 중전의 시선을 느끼고 움찔했다.

 

  “미안합니다, 중전. 오늘은 중전과 함께 밤을 보내려 했는데 아직 처리할 일들이 남아 있어서…….”

 

  중전이 온화하게 웃었다.

 

  “어서 가보시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흡사 동무들과 놀러가도 되냐고 묻는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정사를 보는 일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시 우리 중전의 이해심은 태산만큼 높고, 바다만큼 깊으십니다.”

 

  중전이 부드러운 손길로 익선관을 씌워주고는 왕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대신 저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중전이 곤룡포의 깃을 꽉 잡으며 말했다. 왕의 눈썹이 다시 여덟팔자로 떨어졌다.

 

  “내,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왕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지 중전의 거듭된 청에도 확답은 하지 않은 것이라 못을 박았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시지요.”

 

  중전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며칠 고민하신 뒤 윤허해주실 테지. 서둘러 편전으로 나서는 왕의 뒷모습을 중전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사정전 한가운데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 소나무, 물이 그려진 일월오봉도가 펼쳐져있고, 그 앞으로 붉은 칠을 한 어좌가 당당히 놓여 있었다.

 

  어좌의 서편으로 비껴 앉은 박연은 입으로 율려를 외며 허공에다 손가락을 퉁기느라 왕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왕이 제 옆까지 와서야 왕이 든 것을 알아차린 박연이 얼른 일어나 곡배를 했다. 왕은 그런 박연의 모습이 익숙한지, 무덤덤한 얼굴로 옥좌에 앉았다.

 

  “진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

 

  “성심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얼굴이 더 마른 듯하구나. 어디 아픈 데가 있느냐?”

 

  “아닙니다. 악보를 정리하느라 며칠 밤을 새서 그러하옵니다.”

 

  왕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며칠씩이나! 이제 별좌도 한창 나이는 지났으니 건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지 않았느냐.”

 

  말은 그리 하지만 매일같이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안겨주는 이가 바로 왕이었다. 일거리를 조금만 줄여주셔도 밤을 새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박연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번 예기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조선의 아악을 능히 연주할 만한가?”

 

  “조선 팔도에서 최고라는 예기들만 모았사옵니다. 연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미흡한 점이 많으나 제법 두드러지는 이들도 두엇 있사옵니다.”

 

  왕이 눈을 크게 뜨고 반가운 기색을 하였다.

 

  “별좌가 두드러진다 할 정도라면 대단한 실력자들이 아닌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천향과 옥금이라 하옵니다. 개성에서 온 기녀들인데 기본기를 제법 탄탄히 다진 듯 하옵고, 천향의 경우에는 춤과 노래가 모두 보아줄 만하옵니다.”

 

  “그런가? 별좌가 이리 칭찬을 하니 내 속히 그들을 보고 싶구나.”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겠나이다.”

 

  왕이 흡족한 듯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난계, 우리 조선의 예악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내 자네만 믿고 있으니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나.”

 

  ‘정녕 믿으신다면 조금만 더 닦달하소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번에도 박연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헌데……,”

 

  “왜 그러느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박연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속을 썩이는 기생들이 몇 있사옵니다. 국심이란 기생이 그 중의 우두머리 격인데……,”

 

  왕이 혀를 차며 박연의 말을 잘랐다.

 

  “그런 일이라면 별좌가 알아서 처벌하면 될 일이지, 내게까지 고할 것이 무엇이냐?”

 

  “다름이 아니오라 그 국심이란 기생이 양녕대군의 총기인지라……, 소신이 함부로 처벌을 하기가 저어되옵니다.”

 

  양녕대군, 이란 말에 왕이 얼굴을 구겨뜨렸다. 왕에겐 싸가지 없는 빈궁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백 배 천 배 꺼려지는 이가 맏형인 양녕이었다. 왕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진연기생으로 임무를 다하는 것과 형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에 상관이란 말인가? 별좌가 알아서 처분토록 하라!”

 

  목소리에 언짢은 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연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물러났다.

 

 

 

  곧이어 영의정 황희가 들어왔다. 둥그런 얼굴에 여러 겹 접힌 부드러운 눈매가 쌍학흉배가 박힌 관복만 아니라면 인심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로 보일 듯한 인상이었다. 양녕대군의 일로 심사가 꼬인 왕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알아보라 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사옵니다. 강화와 거제의 왕씨들에게선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고, 삼척첨사 이영축에게서도 특별한 기미가 없다는 기무장계가 도착하였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예. 폐족들에 대해선 안심하셔도 될 듯하옵니다.”

 

  “아니, 아니다. 절대 안심할 수 없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도 반백년을 가지 못하였다. 조선은 이제 겨우 삼십 년이 되었어. 오백 년 고려의 역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란 말이다. 나라는 조선이나 백성은 여전히 고려의 백성들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백성들은 모두 입을 모아 전하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사옵니다.”

 

  “입에 발린 말 할 것 없네. 여전히 개성의 백성들이 다진 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고, 두문동 선비들의 충정을 좇는 학자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음을 내 모르는 줄 아는가?”

 

  황희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려의 폐족들이란 조금만 틈을 보여도 쑥쑥 자라나는 잡초 같은 족속들이네. 한 시도 경계를 늦추어선 아니 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황희가 읍하고 물러나려는데 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요즘 형님께서는 어찌 지내신다던가?”

 

  황희가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요즘은 바깥출입도 자제하시고 책을 읽거나 난을 치며 소일하신다 하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왕이 웃는 기색 없이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모두 상감마마의 성택 덕분이 아니겠사옵니까.”

 

  “나의 성택 덕분이라…….”

 

  껄껄 웃는 왕의 숱 많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겠다. 이만 나가보시게.”

 

 

  * * *

 

 

  그 시각, 양녕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양팔에 기생을 끼고 낄낄대고 있었다. 갓은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맨상투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옷섶은 다 벌어져 맨살이 보였다. 왼쪽 뺨에 길게 난 붉은 흉터가 취기 때문인지 더욱 붉어보였다.

 

  기생 하나가 양녕의 가슴팍에 입을 쪽 맞추며 아양을 떨었다. 양녕이 큰소리로 웃으며 바지춤을 풀렀다.

 

  “자자, 여기도, 여기도 입을 맞춰보거라.”

 

  문이 탁 소리를 내며 열리고 국심이 들어왔다. 양녕의 바지춤을 신나게 풀던 기생이 국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오, 어리야, 어서 오너라.”

 

  양녕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흐흐 웃었다. 국심이 구름무늬 은박을 화려하게 박은 치맛자락을 여미며 팽 돌아섰다.

 

  “어리는 또 어느 년이랍니까?”

 

  “아차차, 내 술에 취해 잠시 헷갈렸느니라. 너는 국화처럼 단아하고 고결한 국심이가 아니냐?”

 

  양녕이 국심을 당겨 안았지만 국심은 여전히 몸을 틀고 있었다. 양녕이 국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짐짓 성내는 시늉을 했다.

 

  “네가 너무 예뻐져 못 알아본 것이니 날 탓하지 말거라. 그러게, 누가 정인도 못 알아볼 만큼 이뻐지랬더냐? 고얀 년 같으니.”

 

  양녕이 국심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야말로 대군 나으리의 얼굴을 잊을 뻔하였습니다. 이번엔 어느 기생년에게 홀려 이 국심이를 까맣게 잊으신 겝니까?”

 

  “다른 기생이라니. 내가 정을 두는 이는 국심이 너뿐이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국심이 바알간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안고 계시던 기생들은 무엇이고요?”

 

  양녕이 서둘러 품속을 뒤져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선 청금석으로 만든 굵은 가락지가 나왔다.

 

  “이게 무어랍니까?”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안색이 밝아지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내 니 생각이 나 샀느니라. 명국의 상인에게서 구한 아주 귀한 물건이다.”

 

  “정말이십니까?”

 

  국심이 새침한 얼굴로 가락지를 제 손가락에 끼웠다. 가락지가 일부러 맞춘 듯 국심의 손가락에 꼭 들어맞자 양녕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호기롭게 웃었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국심이 그제야 양녕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목소리에는 달달한 애교가 잔뜩 얹어졌다.

 

  “마음에 들다 뿐입니까? 대군 나으리의 안목이 어쩜 이리 저와 비슷한지. 아무래도 나으리와 저는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안목보다는 속궁합이 더 천생연분이지 않았더냐?”

 

  양녕이 국심의 입술을 쪽 빨았다. 국심이 간지럽다는 듯 흥흥 웃었다. 국심의 입술을 빨아대던 양녕의 입술이 목덜미로 옮겨가려는데 국심이 아힝, 콧소리를 내며 양녕을 밀어냈다.

 

  “어찌 그러느냐? 내 오랜만에 너를 극락으로 보내주려는데.”

 

  “오늘은 몸이 좋지 않습니다.”

 

  “몸이 좋지 않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내게 말해보거라. 내 당장 도성 최고의 의원을 부르라 할 터이니.”

 

  몸이 단 양녕이 허세 섞인 말을 마구 쏟아냈다.

 

  “이걸 좀 보십시오, 나으리.”

 

  국심이 기다렸다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제 팔을 보여주었다. 가느다란 팔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니, 이 고운 살결에 누가 이리 모진 흠집을 낸 것이야?”

 

  “이것뿐인 줄 아십니까?”

 

  국심이 저고리를 풀어 가슴팍을 보였다. 가슴팍에도 멍자국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양녕의 눈이 향한 것은 멍자국이 아니라 반나마 드러난 보얀 젖무덤이었다. 양녕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것을 보며 국심이 모르는 척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것도 보십시오.”

 

  다리에도 온통 긁히고 멍든 자국투성이였다. 국심이 속곳을 벗어던지며 엉덩이에 난 상처도 보여주었다.

 

  “어허, 어떤 쳐 죽일 놈이 감히 이 양녕의 총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살아남을 생각이 없는 자가 아니냐?”

 

  양녕이 눈을 국심의 복숭아 같은 엉덩이에 박은 채 건성으로 입만 나불거렸다.

 

  “놈이 아니라 년입니다.”

 

  “년이라? 그렇다면 내 더욱이 혼을 내주어야겠구나.”

 

  국심이가 눈을 반짝 빛냈다.

 

  “정말 혼쭐을 내주실 겝니까?”

 

  “암암, 혼쭐을 내주어야지! 내주어야 하고말고!”

 

  “약조하셨습니다, 나으리.”

 

  “그래그래, 약조하마. 그 전에 너부터 나한테 혼쭐이 좀 나야겠구나.”

 

  양녕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국심의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국심이 몸을 뒤틀며 교태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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