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장. 꽃을 보았다
작성일 : 17-06-19 14:22     조회 : 48     추천 : 0     분량 : 9363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뭐가 아니 된다는 것이야?”

 

  왕의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강녕전을 울렸다. 문안을 올리던 세자 내외가 추국청에 끌려나온 죄인들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봄날의 순풍처럼 부드럽던 공기도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니 된다는 것이 아니오라……,”

 

  급히 내뱉느라 세자빈 월의 목에선 새된 소리가 섞여 나왔다.

 

  “아니 된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왕이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노기충천한 음성에 월이 다시 무춤했으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첩의 짧은 생각으로는 부녀자들에게만 평교자를 탈 수 없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 여겨져……,”

 

  “온당치 못하다? 네가 지금 온당치 못하다 하였느냐?”

 

  왕이 숱 많은 눈썹을 잔뜩 치켜올렸다.

 

  “허면 빈궁은 부녀자들이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사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느냐? 잡인들과 눈이 맞아 정절을 잃고 실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야?”

 

  “정절을 잃고 실덕하는 것을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옵니다. 다만 평교자를 금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가 아닐뿐더러, 실덕의 책임을 오롯이 여인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여겨져 여쭙는 것이옵니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월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제 할 말을 마쳤다.

 

  “책임을 전가하다니, 내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처분임을 네가 정녕 모르느냐!”

 

  “전하의 하해와 같은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결과적으로는 여인들의 불편만 더하게 되었으니……,”

 

  “그만, 그만하라!”

 

  분기 실린 주먹이 서안을 내리쳤다.

 

  “내 너의 망발을 어디까지 들어주어야 하느냐! 너 또한 요새 횡행하는 폐미(폐할 폐廢, 아름다울 미美. 사내들이 정해놓은 여인의 규범에 저항하는 무도한 여인들을 이름) 무리에 깊이 현혹된 것이냐!”

 

  “그, 그렇지 않사옵니다.”

 

  월이 황망히 바닥에 엎드렸다. 옆에 앉은 세자 향의 고개도 더욱 숙어졌다.

 

  “빈궁 너는 아녀자가 되어 어찌 그리 바깥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게냐? 네가 세자 대신 왕좌에라도 앉고 싶은 것이냐?”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왕이 마뜩찮은 눈빛으로 월의 정수리를 쏘아보았다.

 

  “네가 쓸데없이 정사에 쏟는 관심의 반의반만 지아비에게 쏟았어도 회임을 몇 번이나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세자빈으로서 회임을 하지 못한 것은 어찌 해도 변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흠결이었다. 왕은 언쟁이 길어지거나 대꾸할 말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회임 이야기를 꺼냈다. 싹퉁머리 없는 며느리의 입을 단번에 막을 수 있는 강력하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보다 못한 중전이 나섰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빈궁이 아직 미욱하여 전하의 깊은 뜻을 채 혜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겠습니까? 아니 그러냐, 빈궁.”

 

  월이 고개를 조아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왕의 얼굴에 다시금 노기가 뻗쳐올랐다. 중전이 얼른 말했다.

 

  “문안은 이걸로 되었다. 세자와 빈궁은 이만 나가보거라.”

 

  월과 향이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그런 말은 대체 왜 하셨습니까?”

 

  당혜를 신고 섬돌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향이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왕의 꾸중에 이어 세자의 잔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겐가. 월은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아바마마께서 빈이 정사에 가타부타하는 것을 질색하심을 모르십니까. 지난번에 그리 꾸중을 듣고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시다니요! 어찌하여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일마다 번번이 토를 달고, 어깃장을 놓으시는 겝니까?”

 

  “토를 달고 어깃장을 놓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그런 하교를 내리셨는지 궁금하여 여쭌 것입니다.”

 

  “궁금하여 여쭙는 사람이 옳지 못한 처사라 바락바락 따지고 드십니까?”

 

  “바락바락 따지고 들다니요. 저는 다만 저의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글쎄, 아바마마께선 빈궁의 생각 따위……,”

 

  그때 저쪽에서 낯익은, 하지만 월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밤새 안녕하셨사옵니까.”

 

  세자의 후궁 권승휘였다. 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하의 불호령에 사지의 잔소리, 재수 없는 권승휘까지 마주쳤으니 일진이 사나워도 보통 사나운 날이 아닌 듯했다. 월이 뜨악하게 보거나 말거나 권승휘는 예의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양궁께서 아침부터 무슨 정담을 그리 나누십니까. 그 모습이 너무 정다워 소첩, 시샘하는 마음이 들겠나이다.”

 

  권승휘가 월과 향의 안색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뻔히 말다툼하는 걸 보고서도 의뭉스럽게 시침을 놓는 것이었다.

 

  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세자와 빈궁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궁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하필 여우같은 권승휘에게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장 오늘부터 월과 향의 소문은 두 배, 세 배로 부풀려 퍼져나갈 것이었다.

 

  “양전께서 성심이 편치 않으시니 문안은 오후에 드리시게.”

 

  향의 말에 권승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어째서요? 양전께서 어찌 성심이 불편하신 것이옵니까?”

 

  향이 대답은 않고 회강이 있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권승휘가 월을 보며 알 만하다는 얼굴로 눈을 찡긋했다.

 

  “빈궁 마노라께서 전하와 또 언쟁을 하신 것이옵니까?”

 

  월이 못마땅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마노라께선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소첩은 처소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도통 까막눈인데, 마노라께선 어찌 그리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깊으신지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종알거리는 자네가 더 대단하구만’ 하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것을 참고 월이 대꾸했다.

 

  “칭찬이 영 칭찬으로 들리지만은 않네 그려.”

 

  권승휘가 월의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으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전하께선 그저 여인들은 안살림만 잘하면 된다 여기시지만 바깥일을 모르고 어찌 안살림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저는 마노라처럼 바깥일을 알려 해도 안살림 챙기는 일만으로도 벅차서……,”

 

  “마노라, 전의감의 공 판사가 별궁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뒤에 서 있던 몸종 석가이가 권승휘의 말을 자르고 들었다.

 

  “중전마마께서 전의감에 특별히 하명하시어 빈궁 마노라의 보약을 지으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누구처럼 박사 따위가 아닌, 판사가 직접 진맥코자 들었다 하옵니다.”

 

  석가이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 ‘누구’란 권승휘를 이르는 것이었다.

 

  “이만 가보겠네.”

 

  월이 권승휘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듯 빼내고는 홱 돌아섰다.

 

  “살펴 가시오소서, 빈궁 마노라.”

 

  권승휘가 월의 등 뒤에 대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숙여진 권승휘의 얼굴에서 미소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 * *

 

 

  “아니, 하루아침에 여인들에게 평교자를 금하시기에 까닭을 여쭌 것뿐인데 회임 이야기를 꺼내시다니. 아무리 전하시지만 너무 치사하신 것 아니냐? 매일 문안 때 닦달하시는 걸로도 모자라 눈만 마주치면 회임, 회임! 내 이름이 월이 아니라 회임이 된 것 같다.”

 

  월이 억울해하며 투덜거렸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다른 궁인들을 물리고 석가이와 함께 후원을 거니는 중이었다.

 

  친정어머니 민씨가 시비로 딸려 보낸 석가이는 어릴 적부터 월의 몸종이었던 지라 동기간처럼 허물없는 사이였다. 낯설고 삭막한 궁궐에서 월이 진심을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벗이자 충직한 하인이었다.

 

  “전하는 그렇다 치고 세자저하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게냐? 내 편은 들어주지 못할망정 남들 눈이 환한데 타박이나 하시고. 남편은 평생 남의 편이라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느니라.”

 

  “저하 그러시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어요? 전하 눈 밖에 날까 발발 떠는 소심증 환자시잖어요.”

 

  석가이가 목소리를 확 낮추고 말을 이었다.

 

  “저는 세자저하도 저하지만 권승휘 고게 더 얄미워요. 일개 승휘 주제에 감히 마노라를 희뜩허니 째려보더라니까요? 성질 같았음 고 눈깔을 확!”

 

  석가이가 손가락으로 눈 찌르는 시늉을 하다 마주오던 궁인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손을 내렸다.

 

  “저하 앞에선 눈웃음 살살 치면서 궁둥짝을 흔들어대는데, 아주 여우도 그런 여우가 없다니까요. 고년 고거, 지 아비 권세 믿고 까부는데 언젠가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줘야 돼요. 안 그럼 마노라를 우습게 알고 머리꼭지로 기어오를 거라구요.”

 

  “매운 맛을 어찌 보여주겠느냐.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이쿠!”

 

  후원 담장을 돌아나가던 월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석가이가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어떤 잡놈이 무엄하게 앞길을 막는 게냐? 이분이 감히 뉘신 줄 알고! 대체 눈깔을 엇다 붙이고 댕기는 거……여요?”

 

  석가이의 목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두 손도 가지런히 가슴 앞으로 모였다.

 

  “괜찮으십니까?”

 

  거문고를 등에 멘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름답구나!

  짙고 검은 눈썹과 눈망울이 월의 시선에 박히듯 들어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흑색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월을 보고 있었다. 순간 잔잔한 못에 나비가 내려앉은 듯, 월의 가슴에 부드러운 파장이 일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사내의 나직한 목소리가 넋 놓고 앉은 월을 깨웠다. 사내는 목소리마저 부드러웠다.

 

  “다쳤또, 다쳤또. 너무 잘생긴 사내를 봐서 내 심장이 아야했또요. 호, 해주세욥.”

 

  석가이가 콧소리를 내며 가슴팍을 내밀었다. 사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석가이야, 부딪힌 것은 난데 어찌 네 혀가 반 토막이 났느냐? 얼른 일으키기나 하거라.”

 

  석가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월을 부축해 일으켰다.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그리 무턱대고 뛰어들면 어찌하느냐?”

 

  “죄송합니다. 용무가 급하여 미처 앞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공손히 사과를 하는 모습이 더한 죄라도 용서해주고 싶게 만들었다.

 

  “흠흠, 되었다. 급한 일이라니 얼른 가보거라. 석가이야, 이만 가자.”

 

  석가이가 아쉽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지만 월은 모르는 척 걸음을 떼었다.

 

  “저기…….”

 

  석가이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던져 사내를 답싹 안았다. 사내가 기겁하여 석가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팔 힘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않았다.

 

  “예, 저도 그래요! 처음 본 순간 운명임을 알았어요. 제 이름은 석가이에요, 나이는 올해로 꽃다운 스물다섯,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석가이의 몸이 거짓말처럼 확 떨어져 나갔다. 월이 석가이의 댕기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사내에게서 떨어진 석가이가 사내를 다시 안으려 두 팔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월의 손은 단단히 댕기를 틀어쥐고 있었다.

 

  “아이 참, 왜 이러셔요 체통 없이. 이거 놓고 말로 하셔요, 말로.”

 

  석가이가 사내의 눈치를 보느라 웃는 낯을 유지하며 월의 손등을 찰싹찰싹 쳤다.

 

  “그러는 너는 체통을 따져 외간사내를 끌어안은 게야?”

 

  월 역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죽을힘을 다해 체통을 지키고 있는 거거든요? 안 그랬음 지금 벌써 자빠뜨리고도 남았어요.”

 

  “으이그, 내가 못 살아 정말!”

 

  월이 나머지 손으로 석가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댕기와 손목이 동시에 잡힌 채 끌려가는 석가이는 자신의 참담한 처지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헌데 왜 그러느냐?”

 

  석가이를 질질 끌고 가던 월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저 몸종을 구해내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 고민하던 사내가 흠칫 놀랐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 아니었느냐?”

 

  “아, 그것이…….”

 

  괜히 질문했다가 제 머리채도 잡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내가 머뭇거렸다.

 

  “뭘 그리 미적거리고 섰느냐?”

 

  월의 짜증 담긴 목소리에 사내가 얼른 입을 열었다.

 

  “겨, 경회루가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경회루라면 이 몸이 잘 알죠! 잠시만 이것 좀…….”

 

  석가이가 댕기를 놓아달라며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궁이란 게 워낙 복잡하고 거기가 거기 같아서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궁의 지리에 어두우신 듯한데 자칫 궁 안에서 길을 잃어 갇히기라도 하면 어쩐답니까?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 끝내 원한 맺힌 지박령이 되어가지고, 밤이면 밤마다 나타나서는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보시오, 경회루가 어디인지 아시오, 이러기라도 하면……. 으휴,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무서운 일 아니어요?”

 

  월이 들은 척도 않고 딱딱한 말투로 빠르게 답했다.

 

  “이 문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가다 갈림길이 나오면 좌로 꺾어라. 그 길로 죽 가다 보면 큰 대문이 있는 누각이 보일 것이다. 누각 뒤로 돌아가면 쪽문이 있으니 그리로 가면 된다.”

 

  “에이, 그리 설명해서 어찌 알아들어요. 제가 금방 가서 길을 알려드리고 올 터이니……,”

 

  “알아들었습니다.”

 

  사내가 빙긋이 웃었다.

 

  “진정요?”

 

  석가이가 사정이라도 하듯 눈썹을 내려뜨렸지만 사내는 야속하게도 고개를 또 한 번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니 우리가 도와줄 것은 더는 없는 듯하구나. 어서 가자.”

 

  월이 다시 석가이의 댕기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질질 끌려가던 석가이가 입에 손나팔을 대고 사내를 불렀다.

 

  “이름이 무엇이어요?”

 

  사내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소쌍, 소쌍이라 합니다.”

 

  석가이가 끌려가는 와중에도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얼결에 손을 함께 흔들던 소쌍이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또 한 여인을 울리게 생겼네.”

 

  소쌍이 억울한 듯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부러 소맷자락에다 분홍색 천도 대었건만 어찌 다들 사내인 줄 아는 게야? 옥금이 말대로 분홍색 천을 더 크게 댔어야 하나? 그럼 안 이쁜데.”

 

  사실 소쌍이 사내로 오해받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유난히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어린 시절에도 예쁘다는 말보다 잘생겼다는 칭찬을 더 많이 들었었다.

 

  하기사, 치마저고리를 입어도 사내아이라 오해를 받곤 했으니 분홍색 천의 크기가 문제가 아닐 지도 몰랐다.

 

  진짜 문제는 소쌍을 사내로 오해한 여인들이 하나같이 첫눈에 반해 상사병을 앓는다는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게 되니 웬만하면 여인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 또 조심하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당한 것 같은데?”

 

  소쌍이 월이 사라진 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반듯하고 흰 이마, 흑요석을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와 작고 동그란 콧망울, 앵두를 문 듯한 입술. 잠깐 본 얼굴인데도 생생하게 되떠올릴 수 있었다.

 

  소쌍이 월이 서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월의 잔향인지 묘한 향이 은은히 머물러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도 맡아본 것 같은,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향기였다. 소쌍은 그 향기를 오래 간직하려는 듯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차, 거문고! 천향이 또 난리치겠네.”

 

  소쌍이 서둘러 걸음을 떼려는데 발에 무언가 밟혔다. 호박으로 만든 쌍나비 노리개였다. 고급스러운 모양새를 보아 월에게서 떨어진 것인 듯했다. 소쌍이 재빨리 노리개를 집어 들고 뛰어갔지만 월과 석가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잠시 고민하던 소쌍이 노리개를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 * *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오른 소쌍이 경회루로 올랐다. 경회루 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기생들이 저마다 미색을 뽐내며 앉아 있었다. 난데없는 사내, 그것도 굉장한 미남자의 등장에 기생들의 시선이 일순 소쌍에게 쏠렸다. 곳곳에서 누구냐는 수군거림과 교태 어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소쌍이 밝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기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소쌍의 뒤를 끈적하게 쫓았다. 소쌍이 천향에게 다가가자 어두워졌던 기생들의 얼굴이 소쌍이 천향을 지나 옥금 앞에 멈춰 서자 약속이나 한 듯 밝아졌다.

 

  “이 먹퉁아, 너 또 거지 애들 밥 먹이고 왔지?”

 

  천향이 쨍한 목소리로 퉁박을 놓았다. 거문고를 내려놓은 소쌍이 퍼질러 앉아서는 숨을 골랐다.

 

  “그럴 틈도 없게 재촉을 해놓고선 뭔 소리야.”

 

  “그런데 왜 이리 늦었느냐?”

 

  “늦기는. 나나 되니까 지금이라도 온 거다. 풍물장이 문도 열기 전에 왔다고 얼마나 지청구를 놓던지. 천향이 네가 갔으면 거문고를 고치긴커녕 반으로 부숴가지고 왔을 거다.”

 

  옥금이 소맷자락으로 소쌍의 땀을 닦아주며 웃었다.

 

  “그러게. 소쌍이 아니었음 어림도 없지. 꼭두새벽부터 나 때문에 고생했네. 고마워, 소쌍아.”

 

  “고생은. 그런 거 하라고 비싼 밥 먹이고 재워주는 게지.”

 

  천향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예예, 잘 알고 있습니다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친절히 일러주시니 까먹을 틈도 없지요.”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왜? 얼굴에 뭐 묻었냐?”

 

  소쌍이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천향이 시선을 내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 평소랑 좀 달라서.”

 

  “다를 게 뭐 있어. 내 얼굴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멋있는데. 아, 오는 길에 꽃을 보아 그런가?”

 

  “꽃을 보았다고?”

 

  옥금의 물음에 소쌍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 처음 보는 신비로운 꽃이었다. 오색영롱한 빛이 막 흘러나오는데, 천상에 피는 꽃 같았어. 확실히 임금님 사시는 궁궐은 뭐가 달라도 달라.”

 

  “신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가. 난앵이랑 춘섬이 밥 잘 챙겨 먹이고.”

 

  “걔네는 내가 안 챙겨도 밥 엄청 잘 먹거든? 나 온 김에 여기서 잠깐 구경하다 가면 안 되냐? 기방 밥을 그리 먹었어도 이리 기생들 많은 것은 첨 본다.”

 

  “빨리 안 꺼져? 네깟 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천향이 목소리를 높이자 소쌍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아이고 간다 가. 천향이 너는 악기 연습이 아니라 성질머리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너 같은 애가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니, 조선 기생의 앞날이 어둡다 어두워.”

 

  천향이 종주먹을 쥐자 소쌍이 얼른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소쌍이 가고 나자 기생들이 옥금을 흘깃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리 잘난 사내가 저 못난 얼금뱅이 기부라고?”

 

  “거문고 메다준 거 보면 몰라?”

 

  “저 얼굴로 어떻게 저런 사내를 꼬셨대?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도 되나?”

 

  기생들의 비아냥이 천향과 옥금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거문고 줄을 풀었다 조이며 음을 맞추었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성마른 고성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기생들이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깡마르고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 기생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음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내 몇 번을 일렀느냐. 이리 산만해서야 어찌 조선의 바른 음을 지어낼꼬!”

 

  노인은 악학별좌 박연이었다.

 

  박연은 원래 대제학이었던 조부 박시용, 이조판서를 역임한 부친 박천석에 이어 선대왕 시절 진사시에 합격한 문관이었다.

 

  하지만 박연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본 왕이 예악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던 그에게 조선의 예악을 다듬는 임무를 맡겼다. 박연은 특유의 고집과 뚝심을 발휘하여 이제는 ‘지악지신’이라 칭송받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 고집과 뚝심을 보여주듯 한눈에 봐도 꼬장꼬장한 인상이었다.

 

  “모든 음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음이 생기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내 말, 명심하렷다.”

 

  “예, 별좌 어르신.”

 

  기생들이 입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기생들의 정신은 온통 소쌍에게 팔려 있었다. 박연이 그 머릿속을 꿰뚫어보듯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끌 차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시작해보지.”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4 13장. 우리에게도 다음이 있다면 2017 / 6 / 28 42 0 8035   
13 12장. 아름답구나, 그대 2017 / 6 / 28 29 0 6086   
12 11장. 나쁜 놈은 사과하지 않는다 2017 / 6 / 27 18 0 9020   
11 10장. 그대에겐 좋은 것만 2017 / 6 / 27 19 0 8988   
10 9장. 삼짇날엔 꽃놀이라 2017 / 6 / 26 23 0 6866   
9 8장. 운명입니까! 2017 / 6 / 26 21 0 7223   
8 7장. 봄꽃이 아직 아니 피었더냐? 2017 / 6 / 25 22 0 7758   
7 6장. 개성의 미친 장검 2017 / 6 / 24 18 0 9638   
6 5장. 미친 거문고 대對 최고 망나니 2017 / 6 / 23 23 0 7748   
5 4장. 조선 최고의 망나니 납시오 2017 / 6 / 22 20 0 8040   
4 3장. 개성의 미친 거문고 2017 / 6 / 21 21 0 6254   
3 2장. 봄은 더디게 피어나니 2017 / 6 / 20 20 0 8025   
2 1장. 꽃을 보았다 2017 / 6 / 19 49 0 9363   
1 서序 2017 / 6 / 19 269 0 677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